예술 속 위선과 삶 속 겸손이 만날 때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며칠 전, 한 성직자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짧지만 그 울림은 오래도록 가슴 속에 번져 나간다.
그는 생의 끝자락까지 소외된 이웃을 품으려 애썼고, 그 삶 자체가 이미 한 편의 진실한 증언이었다.
그 한마디는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라, 자신을 비워 타인을 채우고자 했던 진솔한 고백이었기에 더욱 묵직한 무게로 다가온다.
며칠 동안 그 말을 곱씹으면서 떠오른 그림이 있다. 펠릭스 발로통의 〈거짓말〉.
19세기 말 파리의 위선과 허영을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이다.
화면 속 연인은 다정히 포옹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을 붙드는 것은 인물이 아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강렬한 붉은빛이다. 불길처럼 번져 나가는 새빨간 색채가 온 화면을 휘감으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붉음은 마치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말을 눈앞에 그려낸 듯, 감상자를 압도한다.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이 남자의 귀에 속삭이고,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누가 거짓을 품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이미 거짓 속에 잠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로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겉으로는 건전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악덕을 품은 사람들을 그린다. 그리고 그것을 즐긴다.”
실제로 그의 그림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연인의 밀어가 아니라, 관계 속에 숨어 있는 불신과 위선이다.
그의 붓끝은 표정과 색채 속에 거짓과 진실이 부딪힐 때의 긴장감을 날카롭게 각인했다.
거짓은 오래전부터 동화 속에서도 경계되어 왔다.
피노키오의 길어지는 코는 거짓의 대가를 보여 주었고,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는 반복된 거짓으로 인해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의 참담함을 들려주었다.
단순한 동화지만, 어린 시절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거짓이 얼마나 쉽게 모든 것을 허물 수 있는지, 진실의 가치를 처음 배웠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처럼 단순하지 않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은 자주 쓰이지만, 그 안에는 종종 자기합리화가 숨어 있다.
순간을 모면하려 던진 작은 거짓은 차츰 무겁게 쌓여 가고, 습관이 되어 양심을 무디게 한다.
결국은 자신조차도 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리플리 증후군’은 그 극단의 모습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허구를 진실처럼 믿게 만들고, 거짓이 반복되며 하나의 현실로 굳어진다. 그러나 그 끝에 남는 것은 늘 같다. 무너진 신뢰, 깨어진 관계.
거짓의 본질은 단순하다.
타인의 신뢰를 담보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욕망.
그것은 크든 작든, 그것은 결국 공동체를 해치고 인간 사이를 잇는 가장 소중한 토대를 무너뜨린다.
다시 성직자의 삶을 떠올린다.
그의 사목 표어는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였다.
겸손과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라는 이 말씀은 종교의 가르침을 넘어선 인간이 지녀야 할 태도의 핵심이다.
그는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았고, 끝내 진실로 봉사하는 길을 걸었다.
말과 삶이 하나였기에, 마지막으로 남긴 그 한마디는 더욱 묵직한 울림을 지닌다.
발로통의 그림이 인간의 위선을 폭로한다면, 성직자의 삶과 유언은 우리 앞에 고요히 물음을 놓는다.
“당신은 지금, 진실의 편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