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한 올에 담긴 삶의 조각들

손끝에서 피어나는 추억 #2

by 박영미

옷장을 정리했다. 겨우내 입었던 옷들을 하나씩 꺼내며 세탁할 것과 보관할 것을 분류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것은 30년 넘게 입어 온 주황색 니트 카디건이었다.


검은 상하의 옷 위에 걸치고 검은색 허리띠로 마무리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서 “세련되고 단정하다”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여름을 제외한 계절 내내, 입을 때마다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내가 20대 처녀 시절부터 입었던 이 카디건을 언제부터인지 20대 초반의 딸도 입었다.


그런데 카디건의 허리 부분에서 동전만 한 구멍이 보였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옷에 스며든 시간이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이대로 버리기가 아쉬웠다. 궁리 끝에 모자와 머플러를 짤 계획으로 방바닥에 카디건을 펼치고 한 올, 한 올 실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은 엉켜버렸고, 얽히고설킨 실을 푸느라 점점 짜증이 올라올 때, 딸이 말했다.

"엄마, 같이 해볼까요?“


장-프랑수아 밀레, The Knitting Lesson, 1869.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나란히 앉아 딸은 카디건을 양손에 잡고 실타래를 돌리듯 했고, 나는 실을 풀어 감았다. 그렇게 손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진 실, 마치 시간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실을 양손에 걸어 돌렸고, 엄마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실을 감아 커다란 실뭉치를 만들었다. 다양한 소품을 상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감는 실 한 올 한 올에 엄마와 나의 시간이 쌓였다.


엄마 옆에서 뜨개질을 배우며 손바닥 크기의 어설픈 네모 모양을 뜨다 말기를 반복했다. 지루해서 포기했던 그 자리에서, 엄마는 어느새 목도리를 완성해 냈다.


거울 앞에서 목도리를 두른 맵시를 보며 설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남은 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상상했던 모자, 장갑, 가방을 더는 만들 수 없어서 속상했다.

엄마가 말했다. "목도리가 생각보다 실이 많이 들어. 보는 것과는 다르단다."

나의 바람이 담긴 색색의 실들이 더 많은 모양으로 남길 바랐던 걸까.


그러나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엄마의 손에서 탄생한, 따뜻한 목도리.

그 목도리에는 상상했던 소품들보다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음을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의 자리에 앉아 있고, 어린 나의 자리에는 딸이 앉아 있다.

마치 프레더릭 레이턴의 그림 <실타래 감기>처럼.

프레더릭 레이턴, <실타래 감기 Winding the Skein>, 1878. 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

그림 속 엄마는 양손에 실을 걸고 딸이 실을 잘 감을 수 있도록 움직인다. 실이 엉키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적당한 힘으로 감아야만 한다.


이 적당함에 문제가 생기면 실은 끊어지거나 엉켜서 낭패를 보게 된다. 실은 끊어지면 다시 붙일 수 없고, 엉키기 시작하면 엉킨 부분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져서 포기해야 한다.


이 그림은 서로를 도와 실을 풀고 감아 실뭉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의 상호 의존성과 협력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모녀의 눈은 실이 풀려나가는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서로를 도우며 실을 풀어가는 조화로운 동작은 마치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닮았다.


그림의 원경에는 나무와 강, 산과 하늘이 펼쳐져 있다. 일에 집중하는 모녀의 평온한 모습과 어우러진 자연은 초연해 보인다.


엄마의 손에 실이 몇 가닥 남지 않았고, 딸의 발 근처에는 감긴 실뭉치들이 놓여 있다. 그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실뭉치는 결국 무엇이 될까?

머플러가 될 수도, 장갑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풀려 새로운 이야기로 엮일지도 모른다.

유진 드 블라스, The Knitting Lesson

실타래는 단순한 실이 아니다. 세대를 잇는 이야기이고, 손끝으로 감아온 시간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감아가고, 때로는 엉킨 실을 함께 풀어나가며 만들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실을 감으며 딸을 바라보았다.

손끝에서 감기는 실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세대를 이어가고 새로운 형태로 엮이며 나아간다.


오늘 감은 이 실타래가 언젠가 딸의 손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 실에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