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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브랜더 시내 Dec 22. 2020

카멜레온의 원래 색은?

나다움을 지킨다는 것


친한 언니의 집들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일수록 이야깃거리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같은 기숙사에 살던 언니의 기억 속엔 17살의 내가, 내 기억 속엔 19살의 언니가 살고 있다. 20살이 되어 혜화동에서 첫 소주를 마시던 날, 엄청 쓸 거라고 생각하고 눈을 질끔 감고 생에 첫 잔을 원 샷 했다. “헐 이거 왜 달아요?”라고 말하던 내 표정이 언니의 눈에 담겼다. 그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2호선 열차에서 동생이 내리는 모습을 봐야 마음이 놓였나보다. 너무 마음을 놓았던 나머지 열차가 같은 곳을 두 바퀴 돌 때까지 기절해있었다. 오히려 비교적 멀쩡했던 나는 열차 문이 닫히던 찰나에 언니의 모습이 왜 그리 위태로워 보였는지 나중에 알았다. 서로의 눈에 담겼던 그때 그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한 시간을 통화해도 못내 아쉬워 집들이 날짜를 잡았던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언니가 너무 반가웠다. 언니는 이제 3년 차 유부녀가 되어 중산층의 꿈이라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산다. 주방 창문으로만 보여도 집에서 한강이 보이면 성공한 삶이라고. “설거지할 때 얼마나 예쁜지 몰라. 너 우리 집에 설거지하러 올래?” 라는 농담을 던지는 유머러스한 언니. 이제는 소주가 아닌 와인을 마시며 요즘 근황부터 옛날 그 사람들의 근황까지 한 바퀴 돈다. 돌고 돌다 다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너는 뭐랄까, 너만의 세계가 뚜렷했어. 회사 들어가면서 사회성 있어진 것 같아!”


분명 칭찬으로 건넨 말이었고, ‘사회성 있다.’라는 말이 나쁘지 않았다. 10년 넘게 나를 보아온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회사에서 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인 나는 근 3년간 많이 변했다. 사회성 있는 나로. 남들의 대화에 내 색깔을 카멜레온처럼 맞추는 법을 알게 됐고, 말을 아낄 줄도 알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상식적인,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그전에 나는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내 주장이 지금보다 확실했고, 독특한 캐릭터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캐릭터를 다들 좋아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차원스럽다고 불리는 20대의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30대 버전의 내가 있다. 사회성이 조금 더 가미된 나는, 겁도 늘었고 세상의 잣대에 민감해졌다.


그런 변화가 나쁘다고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내게 사회성이 내게 준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예컨대 낯을 많이 가려서 소개팅도 한번 못해봤던 난 이제 소개팅 자리에서 대화를 리드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결과가 안좋은 건 왜일까) 사회성이 많은 나는 일을 전보다 원만하게 처리한다. 그리고 그전에는 마니아 취향이었던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럴때는 더 사회성을 길러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람들은 나처럼 여러 가지 자아를 갖고 살아간다고 한다. 엄마 말에 따르면 집에서의 나는 무신경하고 무뚝뚝한 딸이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면 하루를 버티기 위한 싹싹한 자아로 살아간다. 내 세계가 확실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일관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답지 못한 모습으로 누군가를 대할때면 거짓말을 한 사람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지금도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나를 보면 소름끼친다고 느낄때가 있다. 하지만 서로에게 얼마나 편리한가. 사람들이 하고싶은 말을 다 하고, 속 마음을 그대로 표정에 드러냈다면 이렇게 평화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적인 자아를 잃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나다움'에 대해 생각했을 때 어떤게 나다운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된다. 자꾸만 사회의 일원으로 성격과 생각이 획일화되고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붙잡고 싶다. 나의 본질적인 자아가 없어지지 않도록. 지금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자아를 지키고자 성찰하고 사유하고 글을 쓴다.


사회 속에서의 삶이 수동적일수록 능동적인 부분을 늘릴 필요가 있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이 사회와는 조금 다른 시간-고정관념, 효율성, 이해관계와 무관한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적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아무튼, 메모 - 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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