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나에겐 믿음이 있어. 이 건물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믿음. 수호자와 범죄자, 법복과 수인복, 우린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단죄 내려야 할 부류들과는 다르다는 믿음. 아무리 느슨해져도 타인을 해치치 않는다는 믿음."] - 드라마 비밀의 숲
그리고 나에겐 믿음이 있다. 세상 만물을 나누는 그 어떤 절대적인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수인복과 검사복, 메스와 식칼은 겉보기에 다르지만 그 본질마저 다를 수 없다는 믿음이 있다.
방 창가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작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책임감에 대해 떠올린다. 온전히 나의 힘으로 기르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잊힌 채, 내가 나무에 무관심했던 1주 그리고 3일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나무는 말라갔다. 급하게 물을 주었음에도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댈 때마다 맥없이 바스러지는 나뭇잎을 보며 나는 올해의 조금 이른 낙엽을 만져본다. 언제나 성장은 느린 법이다. 하지만 짧은 무관심은 나무를 죽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레몬 나무에는 열매가 두어 개 맺혀 있었다. 선선한 날씨에도 여전히 여름의 푸름을 머금은 열매들은 당최 익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삶의 위협을 받는 나무는 어떻게든 씨앗을 완성시키기 위해 열매를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오직 열매에만 집중하며, 양분을 빨아들이는 잎사귀는 모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어느새 열매의 모세혈관은 노란 물감을 열매 꼭대기까지 흩뿌린 모양이다. 기분 나쁜 색이다. 추수가 다가오는 풍성한 벼의 황금빛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들을 모두 희생한 채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잔인한 노란색이다.
방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을 주우며, 나는 내가 버려왔던 것들을 떠올려본다. 나의 어딘가에 맺혀 있을 열매들을 붉게 물들이기 위해 외면했던 것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그 모든 죽어가는 것 중에 빛나지 않았던 것은 없음을. 오히려 잎사귀를 하나씩 죽여가며 내가 더럽혀지며 나의 열매가 썩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 죽어도 되는 것이 있고 죽어선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다른 존재보다 덜 소중한 존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지나는 모든 나그네의 삶의 무게는 같다. 나와 타인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감히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럴 자격은 애초에 그 누구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떨구어지는 낙엽들을 바라보니 슬픈 마음이 든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달랑 세 장 남은 잎사귀들을 보며, 나는 소설 '마지막 잎새'를 되뇌인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해 자신의 잎새를 선물했떤 한 화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잎새를 떠올려본다. 만약 나에게도 마지막 잎새가 존재한다면, 나는 나의 잎사귀가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무언가를 떨어뜨리지도, 혹은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떨어지지도 않기를 바란다.
봄의 새순처럼 깨끗하지도, 따사로운 태양처럼 맑을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나무의 부분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긴긴 시간 끝에 엽록체의 가로등이 마침내 꺼지면, 그제서야 바닥의 낙엽과 어우러져 포근한 가을을 완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