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음악 문외한이다.
멜론 인기차트 탑 100을 맨 윗줄부터 순차적으로 즐겨 듣는 대중음악 애호가이지만, 재즈, 힙합, 뮤지컬,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공연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내가 사회초년생이던 시절, 공연 업무를 담당받은 적이 있었다.
전 담당자의 퇴사로 갑작스레 인수인계를 받아, 6팀의 공연단체와 한 달에 걸쳐 야외공연을 운영했다. 음악과 공연용어를 전혀 모르던 상황에서 참 곤혹스러웠다. 악몽 같은 시간들이었다. 공연의 ‘공’ 첫 글자만 들어도 짜증이 났다. 나에게 공연이란 그저 별 탈 없이 잘 해내야 하는 일에 불과했다.
그랬던 내게 이번 재즈 공연은 공연의 기억을 전환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무대의 뒤편에서 제대로 세팅이 되었나. 사람들은 많이 왔나, 반응은 어떤가 현장을 살피기 바빴던 나는 처음으로 편안한 공연 객석에 앉아 연주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공연현장에서 긴장한 채로 미간에 힘을 주고 있었던 나는 오늘만큼은 설렘이 부푼 기대감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디즈니 인 재즈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ost 뿐만 아니라 알라딘, 라이온 킹 등의 영화 ost도 재즈로 편곡하여 어린이와 성인들까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곡의 트랙리스트는 디즈니의 주제곡 9개였다. 이 중에 내가 아는 곡은 겨울왕국과 알라딘의 노래 2곡뿐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곡이었지만 재즈연주로 듣는 디즈니 ost는 특유의 밝고 희망찬 느낌을 웅장하게 전달했다. 잔잔한 멜로디의 노래로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흥겨운 템포를 가진 곡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라이온킹의 ost Can you feel love tonight 곡은 대망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듣는 것만으로 이렇게 신날 수 있다니! 기분을 가장 흥겹게 만들어준 클라이막스 소절을 기억에 남겨두고 싶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살다가 문뜩 기억에 남았던 책의 문장이 생각날 때가 있다. 또 문뜩 좋아했던 노래가 생각나 한 소절 흥얼거릴 때가 있다. 좋았던 순간들은 모두 기억에 저장되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뜩 떠오른다.
곳간에 수확한 곡물들을 저장해 놓는 것처럼, 오늘의 공연은 텅 비고 지친 마음에 기분 좋은 양식들을 쌓은 것 같은 하루였다. 이런 소소한 경험을 통해, 좋아하는 순간들이 모여지고, 취향이 생기고, 취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손가락으로 버튼 몇 개만 누르면 영화제 수상작, 십 년 전 즐겨봤던 애니메이션, 아이돌 직캠영상 많은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지만, 결국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공연만큼 실감 나게 느낄 수는 없는 것 같다.
귓가에 들리는 악기의 선율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흥겨운 표정과 몸짓까지. 평면을 뚫고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연의 현장은 지친 일상의 감각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했다.
세상 모든 음악인들이 태어나자마자 나 음악 할래!라고 외치지는 않는다. 그들도 음악을 시작하게 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가수가 멋있어서, 노래가 좋아서, 제각각 매료된 순간을 바탕으로 공연업계에 발을 디뎠을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보컬리스트의 에너지도 너무 좋았지만 그날 내가 재즈공연의 매력을 느꼈던 순간은 첼로연주자의 표정을 포착했을 때였다. 보컬 3인의 노래로 흥겨움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환하게 웃으며 첼로를 켰던 연주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것이 현장공연을 보러가는 이유구나.
그는 보컬에게 쏟아진 하이라이트 조명 뒤편의 조금 어두운 공간에 위치해 있었다. 보통 주인공은 가장 많은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날은 생각이 바뀌었다. 가장 몰입하며 진심으로 순간에 임한 사람이 그날의 주인공이지 않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몇 명이 아닌, 무대 뒤편에 있던 재즈 공연팀. 그리고 연주자와 보컬리스트를 포함해 무대 뒤편에서 관객석을 바라보고 있는 기획자, 감독, 스태프 같이 관객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숨은 조력자들까지 말이다.
잔뜩 긴장한 채 무대 가쪽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관객석을 지켜봤던 그날의 나 또한 사실 그 공연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라는 기억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