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간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여름 날씨였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고, 낮에는 햇빛이 아무리 강렬해도 습도가 낮아 크게 덥지 않았다. 유난히 더위와 습도에 약해 여름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나에겐 지금의 쾌적한 날씨가 눈물겹게 소중하고 애틋하다. 조금만 지나면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내 몸을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만들 것을 알기에, 지금의 이 상쾌한 초여름 날씨를 다소 절실한 마음으로 붙잡게 된다.
오늘의 맑은 하늘과 가벼운 공기, 산뜻한 기분을 그대로 꽁꽁 얼려, 불쾌지수 높은 한 여름에 천천히 녹여다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이 온도와 습도, 무엇보다 지금의 보송보송한 마음을 최대한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음악이 가진 타임머신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음악은 언제 어디서든지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생의 한순간으로 순식간에 데려다 줄 뿐만 아니라, 공기의 흐름과 냄새까지 완벽히 재현해 준다. 이 계절과 잘 어우러지는 음반을 하나 골라 그것을 올 초여름의 사운드트랙으로 삼는다면, 더위에 낡고 지치기 전의 깨끗한 마음을 필요한 순간에 바로 꺼내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고심 끝에 내가 고른 음반은 바로, 톰 미쉬(Tom Misch)의 데뷔 앨범이자 첫 정규 앨범인 'Geography'이다.
어느 날, 갑자기 유행어처럼 떠오른 'Chill'이란 단어는 이제 너무 많이 사용되어 다소 뻔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톰 미쉬의 'Geography'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을까? 이 음반을 인생의 어느 한순간으로 표현하자면, 산들바람 불어오는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멍때리는 느긋한 토요일 오후일 것이다.
정식 데뷔하기 전, 톰 미쉬는 수년간 부지런히 작업해 사운드클라우드에 믹스테이프와 EP 등을 세상 밖으로 내놓았다.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나온 정규 데뷔 앨범 'Geography'에는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과 탐구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다.
첫 트랙 ‘Before Paris’는 전설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로이 하그로브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돈을 벌거나 직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음악가를 선택한다면 그건 틀렸어. 이 일은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해. 당신이 빈털터리라도, 반드시 하게 될 만큼.”
세상에 선언하는 듯한 이 자기 암시적인 독백은 음악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후 통통 튀는 기타 리프가 매력적인 ‘Lost in Paris’와 그가 평생 살아온 고향인 남부 런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South of the River’는 재즈, 디스코, 힙합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톰 미쉬 특유의 리드미컬한 그루브가 돋보이는 곡들이다.
멜로영화를 선율로 표현한 듯한 잔잔한 발라드 트랙 ‘Movie’, 패트릭 왓슨의 곡을 포근한 기타 리프와 바이올린으로 재해석한 ‘Man Like You’는 앨범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It Runs Through Me’부터 ‘Disco Yes’까지 이어지는 가볍고 펑키한 리듬을 듣다 보면 여름의 반짝이는 생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Water Baby’에서는 그의 오랜 음악 파트너 로일 카너의 느릿한 랩이 재지한 멜로디와 조화를 이루며,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살 거라는 톰 미쉬의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뒤이어 잔잔하게 흐르는 ‘You're On My Mind’, 리드미컬한 밝은 에너지가 인상적인 ‘Cos I Love You’를 지나 몽환적인 멜로디에 대조되는 세련된 비트가 대조를 이루는 ‘We've come so far’까지. 톰 미쉬는 각기 다른 색채의 곡들을 하나의 음반에 엮어내며 자신만의 여유로운 리듬을 완성해 냈다.
그가 말한 '잿빛을 햇빛으로 만드는 그루브'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다 보면, 불쾌할 정도로 후텁지근한 한 여름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