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Blank’ 상지자 무대감독
언제 어디서건 분야를 막론하고 알고리즘이 나에게 어울릴 법한 것들을 추천해준다. 인터넷상에 공유한 일상은 사람들이 서로의 감시자가 되게 하고, 범람하는 이미지의 파편은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내가 내 삶의 주체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나라는 정체성도 희미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까.
2018년, 홍콩현대무용단(CCDC)의 상주 안무가였던 상지자(桑吉加, Sang Jijia)는 폴 오스터의 소설 『기록실로의 여행』 속 노인에게서 오늘의 우리를 발견하고 ‘Mr. Blank’를 창작, 초연했다. 작품은 무용과 영상, 디지털 창작이 결합한 크로스미디어 공연이다. 무용수들은 강렬한 신체 언어로 감시, 기억, 정체성 등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표현했다. 홍콩에서 크게 주목받아 온 이 작품이 홍콩위크 2025@서울을 맞아 'Mr. Blank 2.0'으로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한국 관객을 만난다. 지금은 홍콩현대무용단의 무대감독으로 있는 상지자를 서면으로 만나 다가오는 공연에 관해 물었다.
한국 공연을 앞둔 소감이 궁금하다.
처음 서울에서 공연했던 것은 1990년대였다. 그때는 다른 안무가의 작품으로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ICF)에 참가했는데, 관객들의 뜨거운 열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번에는 직접 창작한 작품을 선보이게 되어 설레고 기대가 크다.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 작품이 어떤 공명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공연이 단순한 작품 발표에 그치지 않고, 서로 교류하고 영감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공연을 만들며 소설 속 ‘Mr. Blank’를 어떤 인물로 해석했나.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다. 주인공 ‘Mr. Blank’가 밀실에 갇혀 있는 상태, 그리고 감시받는 존재로서의 처지에 주목했다. 무대 디자인 역시 이러한 폐쇄감과 불확실성을 시각적으로 반영하도록 구성했다.
창작 과정에서 중점이 되었던 정서가 있다면?
‘불안’에 주목했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받는 자’의 관계는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은 인물의 내면적 불안을 극대화한다. 각기 다른 연령의 무용수들이 자신의 신체 언어와 개성을 결합해, 저마다의 ‘Mr. Blank’를 만들어냈다.
이 공연이 동시대에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오늘날 인간의 내면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다음 걸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미지와 불확실성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시대 전체가 공유하는 불안과 혼란을 반영한다.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무대가 삶의 압축본이라면 이번 무대는 어떤 점이 삶을 닮았는가.
우리는 지금 빅데이터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다.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Mr. Blank’는 낯선 밀실에 던져진 듯한 감각을 느낀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눈앞의 세계는 더 이상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아 헤맨다. 한편 외부의 관찰자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Mr. Blank의 모든 움직임을 엿본다. 하지만 그들 또한 또 다른 시선에 의해 감시당한다. 끊임없이 교차하는 ‘봄’과 ‘보임’의 행위가 공간 속에서 확대되고 중첩되어 퍼져 나간다.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으며, 문이 열려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작품은 바로 이 감시와 고립, 그리고 무감각해진 현실을 하나의 농축된 ‘삶의 단면’으로 제시한다.
어떤 부분에 특히 유의해서 공연을 감상하면 좋을까.
한국의 관객들이 동시대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예리한 감각과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이 작품은 명확한 해석을 요구하기보다, 관객 각자의 경험과 감정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관객마다 다른 ‘해석의 여정’을 걷게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한국 관객들과 진정한 교류를 나누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단순히 무대를 바라보는 일방향적 관람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하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서로 다른 문화와 감정을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점이 되기를 바란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