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빚진 순간들

by 아트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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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따금씩 아주 멋진 일들은 계획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나곤 한다. 비콘 힐 파크는 계획에 없던 목적지였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계획의 울타리 바깥에 있던 그 잔디밭에서 세 명의 멋진 사람들을 만났다.


누가 봐도 바다 건너편에서 온 여행자인 것이 분명한 이름 모를 우리를 위해 계속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주신 할아버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다가오셔서는, 작고 둥근 돌 위에 직접 그린 그림을 건네주신 또 다른 할아버지. 그 돌의 표면에 손글씨로 적혀 있던 “Be Fabulous”라는 문구. 여러분이 Fabulous한 삶을 살길 바란다는 말.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 한 분을 가리키며 할아버지가 덧붙이신, 그녀가 자신의 아내이며 세상에서 가장 Fabulous한 사람이라는 말.


이름 모를 오래된 노래들, 손을 많이 탄 할아버지의 초록색 기타, 그 어떤 기교도 화음도 없이 공기 중에 홀로 오롯이 낭만을 더하던 단일한 기타 선율, 할아버지의 눈가에 걸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뒤로 감추어 둔 Be Fabulous를 수줍게 내미는 할아버지, 그걸 보고 해맑게 웃는 할머니, 다시 무어라 귀엣말을 하는 할아버지와 그 말을 듣고 남편을 꼭 끌어안는 할머니. 우울한 일기예보를 깡그리 무시하고 예고 없이 아름답게 내리던 햇살. 세상에서 가장 Fabulous한 사랑을 목도하게 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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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밴쿠버 공립 도서관의 한국어 서가에 가면 여행자 두엇이 쪽지를 남겨 놓은 책이 있다.’


사진 몇 장과 함께 소소한 미담처럼 떠돌아다니던 이 이야기를 접한 뒤 밴쿠버에 가면 직접 그 쪽지를 찾아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더랬다. 정작 밴쿠버가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몸담은 현실이 되었을 무렵엔 반쯤 그 이야기를 잊고 있었고, 밴쿠버 공립 도서관을 몇 번이고 드나들었지만 아무런 자각이 없다가 결국 밴쿠버를 떠날 즈음이 다 된 사월에서야 불현듯 이를 떠올리고 다시 도서관을 찾게 되었다. 먼 땅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이 쌓아 올린 낭만에 나도 조그만 돌 하나를 얹고 싶다는 생각으로 준비한 작은 쪽지와 함께.


오래전 보았던 그 사진 속 쪽지는 두 사람이 쓴 것이었다. 가장 먼저 쪽지를 남긴 최초의 사람, 그리고 그 쪽지 뒷면에 화답하듯 다른 메시지를 남긴 사람. 그런데 처음으로 펼친 페이지에는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내용의 새로운 쪽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물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다. 이 책을 뒤이어 읽을 모든 사람들의 행운을 기원한다는 사람. 도망치듯 떠나온 이곳에서 찰나의 다정 덕에 힘을 얻고 간다는 사람. 이 쪽지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는 언니와 동생. 발신인도 수신인도 특정하지 않은 수많은 담백한 글자들이 읽는 사람의 마음에 정확하게 내려앉는 멋진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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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끝도 모르고 침잠해만 가던 시기가 있었다. 우울이 물을 잔뜩 먹인 솜이불처럼 온몸을 짓누르던 시절. 효과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하염없이 어디론가로 향해 걷고 걷고 그저 걷기만 했던 시절. 사람을 이루는 본질의 항상성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 그저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왔다고 해서 한국에서 곧잘 느끼곤 했던 부적 감정이 이역만리 타지에까지 나를 따라오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는 것이었다.


하루는 남의 나라, 남의 도시, 남의 대학 캠퍼스 벤치에 무턱대고 앉아 시간을 죽였다. 종종걸음으로 걷는 참새들을 바라보면서, 책을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멍하니 시선을 주면서. 그러다 한 학생이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 내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 보여 걱정하는 기색이던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너 지금 입고 있는 옷 정말 멋지다.”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예상치 못한 멘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바보 같은 투로 나는 얼떨떨하게 고맙다고 답했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내지는 무언가를 안심시키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갈 길을 갔다. 그는 알까. 그가 맑은 날 좋은 햇살 아래 앉아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던 나를, 완전히 그리고 온전하게는 아닐지라도 찰나간 건져 올려 주었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종종 그 말을 떠올려 보곤 한다는 사실을.


가끔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빚지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나선형으로 나날이 나빠져만 가는 듯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언제나 날을 세우는 태도를 견지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연이 아니고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될 일도 없을 남들을 위해 작은 시간을 내어주는 따뜻함은 여러 모로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믿기지 않는 거짓말. 그런데 분명히 존재하는,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 숨쉬고 있는 그런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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