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완전히 녹다운이 되고 말았다. 모처럼 기나긴 여운에 휩싸이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애도를 목격했다. 거의 한풀이에 가까운 에너지를 쏟아내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게 승화이구나. 이런 게 예술을 통한 승화이구나'라고 되뇌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 다시 못 본다는 것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절규, 죄책감. 그 후로 순식간에 얼어붙은 남은 자들의 관계, 바꿀 수 없는 사실과 깊게 배어 버린 원망. 그러나 불신과 실망, 비난과 분노를 뒤바꿔버린 단 한 번의 연극.
런던의 한 극장에서, 말 그대로 피, 땀, 눈물이 섞인 〈햄릿〉의 초연을 보여주기 위해. 절망에 빠진 이에게 그것이 어떤 구원을 선사했을지, 그 의미를 가늠시켜 주기 위해. 2시간여 되는 시간을 달려온 것이다. 역사 속 한 문장을 놓치지 않고 읽어내려 했던 매기 오패럴의 손끝과 클로이 자오의 시선으로부터.
표기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소설 『햄닛』과 영화 〈햄넷(HAMNET)〉은 모두 여기에서 시작했다.
1569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 셰익스피어가 11세로 사망했다.
햄닛(Hamnet)과 햄릿(Hamlet)은 사실 같은 이름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스트랫퍼드의 기록 문서에서는 보통 혼용되었다.
_스티븐 그린블랫, ‘햄닛의 죽음과 『햄릿』의 탄생’ 〈뉴욕 리뷰 오브 북스〉 (2004년 10월 21일)
자연과 거침없이 어울리는 여성과 풋내기 선생처럼 보이는 남성. 그런 두 사람이 첫눈에 반해 서로에게 빠져들고, 신분 차이를 뛰어넘으며 결국에는 결혼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지켜보기만 한다. 롱 숏 속 주인공들로 그 거리감을 보여주거나 어찌 보면 통속적인 이들의 연애담을 그저 따라가면서.
그럼에도 눈길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녹음이 우거진 곳에서 펼쳐지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일 것이다. 평소와는 달리 말도 더듬지 않고 흡입력 있게 얘기하는 남성에게 깊이 빠져드는 여성. 별도의 시각적 재현 없이 즉석의 대사로 이뤄지는 이 순간은 뒤이어 목격하게 될 '이야기의 힘'을 미리 예견한다.
아녜스 해서웨이의 이름이 먼저 불리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공개됐을 때, 그 힘에 기대하는 바 역시 자연스레 생겨나고.
실제 그의 작품이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한밤중에 펜을 잡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읊는 셰익스피어. 〈십이야〉 속 일란성 쌍둥이 남매처럼 서로인 척 장난을 치는 주디스와 햄넷. 여기에 맏이 수재나까지 세 자녀가 해맑게 웃으며 〈맥베스〉의 세 마녀를 시연하는 모습. 나중에 〈햄릿〉의 한 장면으로 이어지는 어린 아들의 당찬 칼싸움과 포부까지.
그런가 하면, 아녜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신비로운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숲속의 마녀'라는 별명답게 숲과 한 몸이 되거나,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약초의 주문을 외우거나,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볼 때 느껴지는 괴이함과 성스러움이 있다. 그렇게 그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을 상징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생과 사의 현장을 직시하는 목격자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아녜스는 셰익스피어 다시-읽기의 매개체로서 중심이 되는 시점(時點)과 시각을 제공한다.
먼저, 산고의 시간과 그것에 딸려오는 불안. 거대한 나무뿌리를 붙잡고 힘겹게 출산을 시도하는 모습. 내 아이는 자연에서 낳아야 한다며 태풍을 뚫고 뛰쳐나가려는 모습. 넘실거리며 집 안을 침입한 강물을 보고 불길한 상황을 직감하는 모습.
그동안 태아의 신비나 생명의 고귀함을 묘사해 온 건 많았어도, 이렇게 적나라했던 출산 장면은 몇이나 되었던가. 만삭의 몸과 그가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진통, 온 힘을 쥐어짜 내야만 볼 수 있는 아기의 얼굴과 그마저도 생존을 확인해야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한 생명이 얼마나 힘들게 태어나는지가 아녜스의 노력과 조바심을 통해 느껴진다.
이는 엄마로서 앞으로 짊어질 또 다른 삶에 대한 여파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 의무감, 책임감, 두려움, 간절함이 계속해서 제시 버클리의 얼굴에 모두 새겨진다. 감독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며 추후 햄넷의 죽음이 아녜스에게 얼마나 큰 비극일지 예상케 한다.
특히 그가 두 명의 쌍둥이를 어떻게 살리려 했는지 기억한다면. '흑사병'이라는 병마 앞에 위태로워진 자식의 목숨을 두고 떠오르는 건 그동안의 단란한 시간이지만, 이를 압도하는 건 아녜스의 처절함이다. 밤새 간호하며 주술을 시도하고, 온몸을 주무르고, 경련하는 작은 몸통을 수없이 품에 안고. 엄마의 절박함은 자신에게 아이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대변한다.
그럼에도 결국 아들이 떠나버렸을 때의 허탈함은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른 채 울고 있는 순간부터, 활기를 잃어버려 공허해진 일상으로 전해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세계로 건너가 버린 나의 작은 아이. 언젠가 목격했던 나무 밑동의 시커먼 구덩이처럼, 죽음은 순식간에 아직 너무 어린 아들을 집어 삼켜버렸다.
한 삶의 기력을 빼앗으며 탄생했던 생명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거두어질 때도 다시 한번 그 과정을 반복한다. 그 정도의 무게인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다, 이별한다는 것은. 한 삶의 무게라는 것은.
한편, 이러한 상실의 시간을 홀로 소화해야 했던 셰익스피어의 비애는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재능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극본 쓰기에 집중해야 했던 고충이 전면에 등장하진 않지만, 몇몇 장면들로 유추할 수 있다.
가령, <햄릿> 속 유명한 대사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넷을 잃고도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따가운 아내의 시선을 뒤로하고 집을 나와 발버둥 치는 셰익스피어의 절규가 된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이유로 복수를 부탁하는 덴마크 전 국왕의 유령은 아들이 겪은 고초를 분장으로나마 몸소 형상화해 본 흔적이다.
극 후반부에 장렬하게 전사하는 햄릿은 또 어떤가. 레어티스와 용맹하게 싸우다가 칼끝에 묻은 독 때문에 생명이 위독해졌음에도, 결국 숙부를 향한 복수에 성공하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의 의연함에는 햄넷을 향한 눈물 어린 찬양이 담겨있다.
자신 대신 용감하게 가족을 지켜달라는 요청이, 평소 병약했던 주디스를 대신해 희생하는 아들의 용감한 선택으로 이어졌음을 직감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 두려움에 떨었을 아이를 꼭 안아주고, 그 의미를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햄릿은 끝까지 숭고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그만의 애도였던 이 모든 시도는 〈햄릿〉이 무대에 올랐을 때 모두의 애도로 번져 나간다. 굳이 아들의 이름에서 출발한 듯한 공연이 미덥지 않았던 아녜스도, 그저 낯선 연극 한 편을 보러 왔던 군중들도,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에 함께 울고 웃으며 깊이 몰입할 때 말이다.
지금까지 무사했다면 햄넷과 똑 닮았을 햄릿에게 눈을 못 떼다가, 마지막에 손을 뻗는 아녜스의 주변으로 너도나도 뻗는 다른 손들이 있다. 러닝타임 동안 눈물을 흘리기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했을 수많은 관객과도 닮은 풍경이다. 이야기를 통해 극적으로 연결된 '동화'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반드시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감정으로 혹은 개인적인 공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을 이끌어 내곤 한다. 〈햄넷〉은 그 가능성과 가치를 온 힘을 다해 증명해 낸 작품이고, 그래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공명을 일으킨다.
마침내 막이 내리고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불안해하던 햄넷이 비로소 조금은 평안한 표정으로 퇴장할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녜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한 번 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마지막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봤기 때문에 에우리디케가 편히 떠날 수 있던 것이라고. 슬픔과 괴로움을 피하지 않는 회고로 망자의 잔영을 서서히 놔주는 동안, 자유로워지는 것은 산 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깨달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