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by 아트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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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약과 같다.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의학은 믿으면서 예술은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늘 놀랍다.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지 않은 채 말이다." - 데이미언 허스트 Damien Hirst


데이미언 허스트의 전시를 보며 내가 오래 들여다본 것은 유리관 속의 죽음이 아니다.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였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닥친다. 그런데도 인간은 늘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문제처럼 다룬다. 허스트의 작업이 끝내 드러내는 것은 죽음보다도, 그 죽음을 다루려는 인간의 습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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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대하는 인간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간다. 몸을 점검하고, 수치를 확인하고, 더 정확한 정보를 찾는다. 한때 인간이 신에게 구원을 구했다면, 이제는 의학과 데이터에 깊이 의탁한다. 초월적 존재 대신 측정 가능한 수치가 불안을 관리하는 자리에 들어섰을 뿐이다. 물론 의학은 실제로 생명을 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붙드는 방식은 종종 치료보다 신앙에 가깝다. 정렬된 약상자와 알약들은 도구이기 전에 현대인의 제단처럼 보인다. 죽음을 제거하기보다는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확보해 불안에서 안전해지고자 하는 것.


건강검진과 식단 관리는 삶에 유리한 선택이지만, 그것이 죽음을 면하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죽음이 불가항력적이라는 공포를 잠시 마취할 뿐이다. 인간이 정말로 다루고 싶은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소멸이라기보다 환원에 가깝다. 생명은 순환하고 죽음은 그 순환의 일부다. 그런데도 인간은 죽음을 유난히 불결하고 불쾌한 것으로 분리해 낸다. 자연의 질서 안에 포함된 현상이면서도, 인간의 의식 속에서는 끝내 추방되어야 할 사건으로 남는다. 생은 죽음을 품고 움직이는데, 인간만은 그것을 외부의 침입처럼 받아들인다. 죽음이 낯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유한성을 견디지 못하는 쪽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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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되는 죽음


["허스트는 거대한 유리로 만든 폐쇄적인 구조를 자주 사용했는데, 관객이 그 안의 내용물을 볼 수는 있지만 개입할 수는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죽음이라는 예정된 결과를 앞둔 채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연상시킨다."]


허스트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을 전시장 한가운데에 고정한다. 사체를 방부액에 담가 죽음을 유리 안에 박제하고, 사람들은 그 앞을 맴돈다. 압도되었다거나 잔혹하다는 감상을 내뱉고, 사진을 찍고, 잠시 침묵한다. 그러다 전시장을 빠져나와 굿즈샵에서 기념품을 고른다. 죽음은 잠깐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가 곧 소비 가능한 경험으로 정리된다. 이 장면은 우습지만 부정하기 어렵다. 허스트의 전시에서 죽음은 숭고한 비극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가격이 매겨지고, 이미지가 되고, 기념품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현대적 물신에 더 가깝다. 인간은 죽음을 오래 응시하는 척하지만, 결국 견딜 수 있는 크기로 축소한 뒤 일상과 소비의 리듬 속으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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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불안 버티기


어쩌면 삶이란 죽음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죽음을 견디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약을 먹고,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운동에 집착한다. 망각, 도피, 직면.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비슷하다. 인간은 저마다 손에 맞는 도구를 하나씩 쥔 채 불확실성을 버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쥔 도구가 더 옳다고 믿으며 타인의 방식을 집요하게 판단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먼저 죽음에 닿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과 죽음은 자주 관리의 결과처럼 포장되지만, 끝내 우연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허스트의 작업에서 이따금 비치는 사랑 역시 죽음의 반대편에 놓인 구원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도 끝내 무언가를 붙들려는 인간의 집착에 더 가까워 보인다. 사랑은 여기서 다정함이나 위안의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사라질 것을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붙잡고,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 위에 의미와 장식과 믿음을 덧씌우려는 충동에 가깝다. 인간은 죽음을 없애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믿고, 아름답게 만들고, 보존하려 한다. 허스트가 죽음 곁에 아름다움과 장식, 때로는 황홀에 가까운 이미지를 함께 놓는 이유도 아마 그 지점에 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조차 사랑은 숭고한 감정보다 집착의 형식으로 오래 남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을 대하는 각자의 모양이다. 끝이 예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현재를 불안과 공포로 채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섣불리 낭비라고 부를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 불안은 극복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삶이 세계와 맞닿는 방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삶의 한 상태이듯 공포와 불안 역시 삶을 이루는 성질이다. 누군가는 평온함으로, 누군가는 지독한 불안으로 자기 생의 문장을 채워 나간다. 그 차이 또한 각자의 삶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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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마침표


죽음은 주체가 아니다. 주체는 살아 있는 동안의 인간이고, 죽음은 마지막에 찍히는 부호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그 부호를 어떻게 맞이하느냐보다, 그 앞의 문장을 어떤 리듬과 어떤 태도로 채워왔는가 하는 문제다.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망치고, 다듬고, 버틴다. 죽음을 피해 보겠다는 강박이나 죽음을 전시해 두고 기념품을 사는 태도까지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삶은 본래 그런 식으로만 굴러간다. 거대한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각자 손에 쥔 도구로 불안을 관리하며 하루씩 소모하는 방식으로.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의 끝에 거창한 깨달음 같은 것은 없다. 죽음은 이미 충분히 확정되어 있고, 그 확정된 마침표는 인간의 어떤 태도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리관 속에 박제된 사체처럼, 혹은 약국 선반 위에 정렬된 알약들처럼 그저 그 자리에 무심히 놓여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감상을 말하고, 확률을 계산하고, 기념품을 고른다. 허스트가 전시한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서 반복되는 이 익숙한 인간의 반응이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전시는 6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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