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콜론같았던 경주의 가을을 회상하며
흐린 날씨를 걱정하던 게 우스워질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일찍이 도착한 공연장은 들뜬 사람들로 북적였고, 관객들은 적당한 소란함으로 기대를 표하고 있었다. 첫 무대를 보기 위해 잔디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맑은 하늘과 잘 어울리는 푸른 잔디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음악을 깎아온 음악가부터,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인디 아티스트, 그리고 이번 무대가 또 다른 기회이기도 한 신인 뮤지션까지. 그린플러그드 경주의 특징 중 하나는 축제를 구성하는 아티스트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올해 역시 작년에 이어 형형색색의 라인업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부분은 패기와 여유를 함께 가지고 있던 신인 아티스트들의 무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린플러그드 경주, 두 번째 날의 MOON 스테이지 시작을 열었던 아티스트는 ADOY였다. 2017년 5월 [CATNIP]을 발매하며 팀 활동을 시작한 ADOY는 현재까지 3장의 앨범을 발매한 신인 밴드이지만,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가장 최근에 발매했던 [LOVE]와 데뷔앨범이 현재까지 K인디차트 상위권에 랭크되며 어마어마한 신인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물론 그 가운데에는 사람들의 귀를 끄는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I Just can’t forget her’, ‘San Francisco’로 시작된 무대는 이내 많은 관객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마주했던 밴드의 인상만큼 신비롭고 편안한 분위기의 곡들이었다. 이어지던 ‘Wonder’, ‘Grace’, ‘Young’, ‘Bike’를 들으면서는 공연을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축제 둘째 날의 시작이라는 것에 새삼 행복했다. (특히‘Bike’를 들으면서는 불어오는 바람이 음악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 같다는 감개무량함까지 느꼈다(!)). 시티 팝 장르를 좋아하던 필자에게 ADOY는 그 자체로 행복했다.
ADOY의 공연이 끝난 후, 재빠르게 WIND 무대로 이동했다. 다른 공간에서 헤이맨의 무대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WIND에 도착했을 때 헤이맨은 Fitz & The Tantrums 의 ‘Handclap’을 커버해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작년 12월 단독공연 후 오랜만에 본 그들의 무대였기에 반가움이 앞섰다. 이전에 느꼈던 에너지와 재기발랄함은 여전했다. 헤이맨은 연이어 ‘불끈불끈’, ‘X-topia’를 불렀다. 많은 관객들은 이미 무대 앞에 서서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돌이켜봤을 때, WIND에서 관객들이 무대 코 앞에 서서 함께 뛰고 즐기던 아티스트는 헤이맨 뿐이었다.) 뜬구름처럼 잔잔하고 평온했던 ADOY의 무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헤이맨은 ‘오일밴드’라는 팀명으로 대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작은 콘테스트에 참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학 밴드였지만, 현재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뮤지션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헤이맨 인터뷰 참고!) 최근 올댓뮤직과 인디스땅스가 함께 주최했던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실력을 톡톡 증명해 보였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아티스트이지만, 본인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무대였다.
오후에는 버스킹 존에서 BaRaMil, Plaything, 청춘버스킹 모노플로, 로썸의 무대가 진행됐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F&B존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물건을 사며, 음악과 함께했다. 뮤지션들에게는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래를 듣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그린플러그드는 기회의 무대였을 것이다. 무대 위 버스커는 즐거워보였다.
ADOY가 ‘내년에 또 오면 좋겠다’고 멘트를 하자 한 관객은 ‘다음에는 헤드라이너로 오라’고 외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었다. 지금은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팀이지만, 시간이 지나 나중에는 정말로 이 신인 밴드들이 페스티벌을 마무리하는 팀이 되길 기대해본다. 물론 머지 않았을 것이다.
발매 3년 만에 많은 이들의 ‘설렘송’이 된 마크툽의 ‘marry me’부터 프로듀스 101이 촉매가 되었던 뉴이스트의 ‘여보세요’, 데뷔 28년 만에 처음으로 음악방송에서 1위를 안겨줬던 윤종신의 ‘좋니’까지. 유독 작년은 음원차트를 역주행했던 보석 같은 곡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역주행 신화’에 이 두 팀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거다. ‘오↘빠↗야→’ 작년 우리는 애교 넘치는 이 사투리 첫 마디에 참 열광했다. 아이돌들은 이 곡에 맞춰 애교를 부렸고, 많은 버스커들과 유튜버들은 각자의 버전으로 곡을 커버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노래로 듣던 이야기처럼, 신현희와 김루트는 에너지와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현희의 애교와 김루트의 천연덕스러움이 단짠단짠 급으로 조화로웠다. 그들은 간단한 율동을 알려주고 재치 있는 멘트를 하며 관객들의 호흡을 익숙하게 이끌어냈다. ‘두근두근’, ‘다이하드’, ‘넌 짜장 넌 짬뽕’등 유쾌한 선곡을 이어가던 그들은 ‘바람’과 ‘나쁜 여자 프로젝트’를 부르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다. 신나는 곡도 잘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신현희와 김루트는 무대로 관객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신루트의 깃발이 예쁘게 흔들렸다.
그리고 또 하나, ‘역주행’하면 빼놓을 수 없는 팀이 바로 멜로망스 아닐까. 반짝였던 그들의 곡은 그야말로 많은 이들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태연하게 고음을 지르는 보컬의 모습은 금세 sns를 타고 번져갔고, 음원 차트 1위라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연말 시상식에서 다수의 아이돌이 그들의 곡을 따라 불렀고, 슈가맨에서 그들이 커버했던 곡 ‘YOU’는 ‘늘 그랬던 것처럼’ 1위를 차지했으며, 얼마 전에는 SM STATION의 일환으로 태연과의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이며 ‘슈스’의 행보를 걷고 있다.
공연장에서도 멜로망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대기가 시작되자 인파에 의해 파도처럼 몸이 밀렸기 때문이다. 스탠딩 존은 일찍이 객석들로 차있었다. 길게 느껴졌던 리허설이 끝나자 멜로망스는 ‘동화’를 부르며 시작을 알렸다. 관객들은 그들의 몸짓과 손짓 하나에 환호했다. 이어 ‘YOU’, ‘선물’등의 곡을 들으며 파란 하늘과 푸른 잔디와 참 잘 어울리는 청량함이라고 느꼈다.
누군가가 쏟아 부은 노력은 결과로 드러나고, 좋은 음악은 언젠가 흥하기 마련이다. 역주행을 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던 팀들의 공연이었다.
프롬의 무대가 펼쳐지던 WIND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관객들로 계단까지 꽉 차있었다. 이전 공연으로 무대에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프롬과의 첫 대면은 ‘반짝이던 안녕’ 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노래였기에, 반가움이 컸다. 늘 이어폰을 통해 전해오던 ‘내일 그대와-‘를 들으면서는 정말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꽉 찬 객석과 열띤 호응에 프롬은 꾸준한 감사를 표하면서 ‘(본인이) 이 정도였냐’는 농담을 던지며 놀라워했다. (당연한 소리를!) ‘밀란 블루’와 ‘서로의 조각’을 부르던 그녀에게서 우아함을 느꼈다. 떼창을 할 분위기의 곡은 아니었지만 관객들은 익숙하다는 듯 그녀에게 동요했고, 뮤지션 역시 행복해 보였다. 어우러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선연하게 울려 퍼졌다.
‘프롬’하면 내게 있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는 ‘달’이다. 신비롭고 말간 음색도 그렇고, 달을 이야기한 동화 같은 노래가 많기 때문이다. 멘트를 마치고 다음 곡을 소개할 때에 프롬은, 이제부터 뉴요커처럼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리듬을 타달라고 했다. 드디어 그 곡이구나! 나는 ‘달의 뒤편으로 와요’라는 곡 때문에 달의 기원 같은 것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혹시나 정말 달의 뒤편에 남는 공간 같은 게 있을까, 싶어서. (한낱 희망이었다.) 다소 흐려진 날씨 아래 열광하며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니 그녀는 세기 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농담을 던졌다. 달의 너머로 오라는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몸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리고, ‘이 밤은 댄싱 댄싱 댄싱 야이야-아-‘ 퍼지는 마지막 곡에 사람들은 한낮의 댄싱 파티를 벌였다.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자고로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 한 입을 먹었을 때는 그 단 맛과 단 맛이 주는 아쉬움을 얼마 동안은 안고 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저 너머에서 짙은의 무대가 진행되고 있으니,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도착한 MOON 무대에서는 이제 막 ‘Feel alright’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이스 타이밍!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나는 천천히 짙게 잠식당했다. ‘쏘카’를 타고 경주에 와서 반납 시간 때문에 여행을 할 수 없어 아쉽다며 농담을 던지다가도, 음악이 시작되면 한없이 푸르러지는 목소리에,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나는. 천국일까? 잠시 생각했다. ‘sos’, ‘고래’, ‘백야’처럼 그의 스테디셀러 같은 곡은 물론, 발매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신곡도 들어볼 수 있던 기회였다.
내가 그를 이렇게 좋아하게 된 데는 처음 그의 무대를 봤을 때의 기억이 참 좋게 남았기 때문이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면 볼수록 더 좋은 기억으로 덮이는 것 같아. Hold me now, 그의 신곡 제목처럼 나는 앞으로도 그를 쉽게 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짧지만은 않은 기간 동안 오롯이 본인의 음악을 지향해 온 꾸준함 때문일까. 두 뮤지션에게는 특유의 아우라 같은 것이 어슴푸레 비쳤다. 타임 테이블이 겹쳤지만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고, 결론적으로는 아- 정말로 너무 좋았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었고, 후반부로 향해갈수록 분위기도 한껏 달뜨고 있었다. 맥주로 목을 축인 후 잔나비의 공연을 보기 위해 실내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처음 들어섰을 때 느껴지던 선듯한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잔나비의 공연 시간에 가까워지자 한산했던 공간은 금세 북적이고 있었다. (공연장에 일찍 도착해서 망정이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잔나비가 가장 기대되는 무대 중 하나였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감정의 폭이 다채롭기 때문이었다. 지난 날들에 아파하고 그 시간을 억지로 붙잡고 싶어하던 어제를 지나, 오늘이 오면 먼지를 털 듯 툭툭 털어내고, 어느 시점이 되면 활기찬 내일을 또 다시 기약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she’와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으로 시작했던 잔나비의 무대는 한 편의 연극같았다. 공연의 기-승-전-결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시작했던(그러나 관객들은 떼창을 했다) 공연은 ‘알록달록’, ‘정글’ 등을 지나 절정을 향해 있었다. ‘누가 내 가슴에다 불을 질렀나’는 가사에 관객들은 ‘잔나비!’라고 했고, ‘누가 내 심장에다 못을 박았나’는 가사에 역시나 ‘잔나비!’라고 화답했다. 최정훈은 팔을 움직이며 더 큰 호응을 유도했다. 그 현장을.. 교주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앙심에 빗댈 수 있을까(!). 음향사고로 중간에 음악이 끊기기도 했지만, 사실 그건 관객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관객들은 앉았다가 그들의 호응에 일제히 점프를 하기도 했고, 일말의 동심을 꺼내서 ‘꿈나라 별나라’를 합창했다. ‘MONKEY HOTEL’로 마무리된 그들의 공연은, 끝까지 완벽했다. 선선했던 공연장은 금세 더워졌고, 공연을 함께 봤던 지인은 연말 콘서트는 무조건 잔나비라며 다른 관객들과 입을 모았다.
실가지처럼 내리던 비는 헤드라이너의 무대가 가까워지자 조금씩 그쳐갔다. 넬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린플러그드 경주의 헤드라이너를 차지했다. 무대를 기다리며 앞에 쓰인 ‘NELL’이라는 글자만 봐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고, 기다리는 동안 몸이 아픈지도 몰랐다.
음향장비를 조절하며 노래를 시작한 넬은, 넬 자체였다. 마이크를 잡고 악기를 연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오랜 동안 음악에게 애정을 쏟은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장엄함 같은 게 느껴졌다. 터지는 폭죽도, 무대 영상도, 환호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이 팀도 다 좋았다. 정말 함께할 수 있어 좋은 느낌. 그 노래 가사처럼, 아직도 그의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피로와 실패의 기시감과 부딪힐 때면 항상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위안을 받았다. 뭐랄까,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하는, 이런 초라한 감정은 다른 사람도 거치는 과정이고, 나 역시 별 다를 것 없이 살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여행을 다녀온 후 남는 여독처럼, 모든 기억은 각자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린플러그드는 내게 세미콜론과도 같았다. 세미콜론(;, 쌍반점)은 문장을 잠시 끊었다가 이어서 설명을 계속할 때 쓰는 문장부호다. 다소 뜬금없지만 페스티벌에서 좋은 음악과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조금 쉬어가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하다 보면 나도 나만의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교훈 같은 것이 은연중에 남았던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무대가 곧 영업이 되는 뮤지션들을 보면서 더없이 행복했다. 정말이지, 유구하게 남을 예쁜 추억이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나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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