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인사이트 Sep 24. 2018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Episode 5.

말들은 자꾸 사라지지만



 

 

새벽 시간만 되면 찾는 친구가 있다. 새벽 시간, 새벽 시간은 어떤 시간이냐면. 하루의 실수를 되짚어보거나, 헤어진 사람의 SNS 계정을 염탐하거나,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들을 고민하는 시간. 마음의 가장 밑바닥을 짚어 내려가다가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치고 돌아오는 시간. 같은 노래를 백 번쯤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시간. 그런 일들을 되풀이하는 시간이다. 그런 허무를 반복하다 보면 잠은 달아나고 어리둥절해진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두 시간쯤 하거나, ‘나 지금 청승맞은가?’ 하는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잠시 가지다 보면, 이 허무와 막막함, 그리고 처량함이 똘똘 뭉쳐 더 이상 태연할 수 없기에 이른다. 그리고 나의 새벽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애를 초대한다. 웰 컴. 그 애에게 전화하기, 전화해서 세 시간 동안 아무 말 하기, 그 애의 엉성한 위로, ‘하지만’이라는 문법으로 매번 내 편을 들어주던 그 애의 이야기를 따라 물으며 정말 그런가 곱씹기, 그러다가 스르르 잠들기. 다음 날 아침 개운하게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고 또 다시 어떤 새벽을 맞이하기.

 

무던한 하루 끝, 매일의 사이사이 그 애를 초대했고 그 애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면서도 더없이 결정적이고 필연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던 그 애가 군대에 간다고 했을 때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애를 군대에서 빼돌리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나에게는 어떤 수도 없었다. 그 애가 군대에 간다는 이유로 그 애 앞에서 운 사람은 딱 두 명, 그 애의 엄마와 나였다. 가지 말라고 엉엉 울어 젖힌 게 창피해서 한동안은 먼저 전화하기가 민망스러웠다. 그리고 정말 그 애가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간 친구에게는 새벽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멍청이가 되어도 그 애에게 나 멍청하냐고 물어볼 수 없었고 그 애의 괜찮다는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꼭 그 애를 향해서만 준비되었던 말들은 갈 길을 잃었다. 그 애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 말 않고 꾹 참는 연습을 했다. 내가 나를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때때로 일기장 끝자락에 우는소리를 했지만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도리가 없을 때는 편지를 썼다. 편지의 관례는 안부 묻기로 시작하는 법이어서, 막상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 우는소리는 집어넣고 그 애의 안부부터 물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 애의 사소한 것들을 궁금해하는 시간이 좋았다. 밥은 잘 먹는지, 생활하는 사람들은 괜찮은지, 초가을 모기가 극성을 부리지는 않는지. 그런 것들을 묻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나도 잘 모르겠는 막막한 감정들을 덕지덕지 칠하고 그 애에게 전화를 하는 일과 참고 누르고 한 움큼 덜어낸 감정으로 편지를 쓰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는 몰라도 그 애라면 이도 저도 다 좋다고 해줄 거 같아서 걱정은 없었다. 말들이 사라진 데에는 대신 다른 것들이 생겨났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이면 편지지 한바닥이 얼추 채워졌다. 시간도 훌쩍 지나있었다. 그 애는 여전히 너무나 필요했지만, 그 애를 향한 말들이 언제나 넘쳐났지만,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았다.

 

말들은 자꾸 사라졌다. 보고 싶은 사람이 늘어났고 해소할 수 없는 것들도 늘어갔다. 말들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이 말들의 주인, 이 말들의 도착지가 따로 정해져있었다. 꼭 너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너의 곁을 더듬어 찾을 수 없을 때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혼자서 해결하고 싶었다. 사라지는 게 퍽 아쉬웠던 말들이 어느새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면 당황스러웠지만 다행이었다. 사라져버려라. 사라져버려라. 말들은 자꾸 사라졌지만 나는 괜찮아, 했다. 보내지 않을 편지가 싸여갔지만, 괜찮아했다.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것들이 생겨났다. 그 애가 보고 싶어 편지지를 꺼내 보고 싶다는 말만 한가득 써 내려가던 날, 여전히 멍청이가 되는 나지만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멍청이가 되지 않아볼게.’ 하고 썼다. 말들은 자꾸 사라지지만, 보고 싶은 너와의 약속들이, 혼자 덜컥 걸어버린 것들이 다행히도 괜찮았다.



*사토 카렌의 사진입니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양나래

 

 

ART insight

Art, Culture, Education - NEWS

http://www.artinsight.co.kr

 

 

작가의 이전글 그린플러그드 경주 2018 (9/16) Review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