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본전공 이외의 ‘인문학과 문화산업’이라는 융합전공을 공부 중이다. 이 융합전공을 통해 문화, 사회과학, 미디어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을 폭넓게 배우고,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탐구한다. 또한 문화산업 각 분야 전문가의 특강, 적성검사를 비롯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졸업 후 문화산업에 전문성을 가지고 그간 쌓은 역량을 발휘하도록 돕는 전공이다. 나는 융합전공에 본전공인 사회학 못지않게, 또한 기쁜 마음으로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특히 매주 TV 드라마, 엔터테인먼트, 라디오,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는 시간이 가장 기대된다.
지난 9월 14일의 특강에는 MBC의 드라마 PD이자, 직접 극본도 쓰고 계시는 김지현 PD님이 자리했다. 본인 소개를 하시며 주목공포증으로 인한 눌변을 이해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강의가 아니라 말에 진심을 담뿍 담을 줄 아는 진정한 달변가시라는 것을!
PD님이 제작한 드라마는 PD님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MBC에 입사하여 10여년의 조연출 기간을 마치고 입봉하여 처음으로 기획한 사극 ‘원녀일기(2014)’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PD님은 결혼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있을 당시를 어린 나이에 혼인을 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 원녀로 불리던 콩쥐를 통해 묘사하였다. 외모에 대한 자신이 없는 콩쥐가 춘향의 가면을 쓰고 마을의 사또와 만나다가 마지막에 관아에 가서 자신을 고백하는 ‘원녀일기’의 거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쁜 친엄마를 계모를 여길 정도로 세상 삐뚤게 보고 있었구요. 나보다 더 이쁜 동생과 친구들 땜에 세상 불공평하단 이유로 원만한 성격도 형성하지 못했어요. 고을 남자들 보길 소 갑따귀 보듯 했는데, 그건 마음 먼저 주면 상처 받을까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제가 감히 사또를 좋아했습니다. 스무 해를 이 모양으로 살아온 제가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좋아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혼인이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지금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만 알겠어요. 좋아합니다. 좋아해요."
외모로 인한 낮은 자존감과 그럼에도 지르고 보는 무모함과 용기,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오랫동안 좋아해온 사또 앞에 처음으로 마음을 토해낸다. 나 자신에 대한 용기가 부족하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것도 힘들 수밖에 없다. 사또는 자신이 앉아있던 관아의 상석에서 콩쥐 앞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콩쥐의 진심 어린 고백에 꼭 같은 진심으로 응답한다.
"내 그 날 반했던 사람은 말이다. 콩쥐야. 넌데?"
(중략)
"꽃이 아니라 나비였다. 그네를 타고 시를 읊던 자유로운 니 모습은 꽃이 아니라 나비였어. 가만히 기다리는 바다가 아니라 바다를 향해 노니는 기러기 그 자체였다. 내가 다 숨이 트이더구나. 나는 그냥 니가 좋고, 너도 내가 그냥 좋은 거야, 그치? 혼인이 부담스러우면 연애는 어때?"
PD님은 콩쥐의 모습이 곧 본인의 모습이라고 했다. 짐작하건대, 외모에 대한 자신이 없고 주위 시선에 시달리는 콩쥐가 자존감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PD님 자신의 내면 또한 아픔을 딛고 성장했다고 고백하는 혹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자기표현일 것이다.
‘원녀일기’에 이어 이듬해 연출하신 ‘퐁당퐁당 LOVE(2015)’ 또한 PD님의 고등학교 수험 시절의 고민을 담고 있었다. 고 3 시절은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고 매일 기분 나쁜 스산함을 느꼈다고 한다. 나 또한 수능으로 인한 스산함의 잔상이 남아있던 대학교 1학년 때 이 작품을 보았다. 나는 수능이 다가올수록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버거웠다. 우리나라 고 3이라면 모두 겪는 통과의례인데, 나 홀로 외딴 섬에 갇힌 기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한참 뒤에 이 드라마를 보았음에도 그 시절의 차가웠던 밤들이 생생했다. 시간의 흐름이 외로움의 소멸을 담보해주지는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PD님은 작품을 제작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결국 고 3 시절을 떠올렸던 것을 보며, “내 고민이 그때 이후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마치 수능을 보고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할까 불안했던 것처럼, 한 작품씩 제작할 때마다 ‘이 작품이 재미없어서 다음 작품을 못 하게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PD님이 드라마를 만드시면서, 그리고 내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드라마가 누구나 느끼는 삶의 헛헛함을 매우 잘 표현하고 또 달래주었다는 반증이다.
드라마의 내용에 대해 덧붙이자면,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 ‘퐁당퐁당’이라는 음성상징어가 주는 느낌처럼 앙증맞으면서도 수면의 파동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단비(김슬기 분)와 왕 이도(윤두준 분)의 러브라인이다. 드라마에는 단비가 고 3인 현대와 이도가 조선을 다스리던 시기인 과거 세계가 존재한다. 먼저 단비가 한 번, 마지막에는 다른 모습을 한 이도가 또 한 번, 서로의 세계로 타임 슬립을 한다. 주인공 ‘단비’는 이름의 뜻과는 묘한 아이러니를 이루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늘 비만 내리다 못해 그녀의 마음의 방에는 해가 잘 들지 않았다. 젊은 이도가 조선을 통치하던 시기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다.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야속하게 내리쬐는 해를 맞으며 엄숙하게 제사를 지내던 바로 그 타이밍에 단비가 과거로 타임 슬립하였다. 단비는 조선과 이도에게 반가운 비가 되어주었고, 이도는 단비에게 맑은 하늘이 되어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사랑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제작하신 ‘우주의 별이(2017)’라는 작품은 PD님의 개인적인 고민보다는 가슴 아픈 상황에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PD님은 2014년의 세월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내가 줄곧 말해온 자존감과 자아실현의 문제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당시 드라마 산업 내에서 많은 창작자들이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2014년 방영한 ‘원녀일기’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는 나무에 노란 끈을 맨 장면이 연출되었고, 기다림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우주의 별이’에는 사고로 일찍 이 세상을 떠나 저승사자가 된 학생이 소원 성취를 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내 안의 고민이든, 시대의 고민이든 말해야만 하는 명분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PD님은 개인적으로 WHY에 대한 지점을 분명히 해야 하므로 내 안에 맺힌 것, 뜨거운 것을 꼭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총 3편의 웹드라마를 제작하신 PD님은 ‘웹드라마’가 결코 새로 생긴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고 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드라마 산업이 전문화, 세분화되며, 창작자도 플랫폼의 변화를 염두하고 드라마를 만들고 대중도 메이저 플랫폼을 TV에서 모바일, 웹으로 바꾸어가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 아닌, 드라마를 소비하는 주요 플랫폼의 비중에 변화가 생긴 것일 뿐이다. 웹드라마는 보통 기존의 드라마 문법보다 타이트하고 코미디의 성격이 짙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플랫폼이 스토리(WHAT)보다 우위에 설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플랫폼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영향을 받는 전달방식(HOW)의 하나이다. PD님께서는 스토리가 플랫폼을 함유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PD님의 첫 작품인 ‘원녀일기’는, 극본을 쓰실 때 웹드라마로 방영할 것을 염두에 두신 작품이 아니라고 했다. 기존 드라마보다 타이트한 PD님 극본의 특성을 고려한 네이버가 웹드라마로 방영할 것을 제안하여 웹으로도 소비가 되었던 것이다. 반면, ‘퐁당퐁당 LOVE’는 PD님께서 웹드라마 방영을 계획하신 드라마였다. PD님은 한국의 19살, 20살에게 이 드라마가 전달되기를 바랐고, 그들이 봐주지 않는다면 단지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연령대의 시청자들이 밤 10시, 11시에 TV로 MBC 드라마를 시청하기 어렵기 때문에 네이버와 협력하여 웹드라마로 제작한 것이다. 이 드라마의 소비 비중을 TV와 웹에 각각 20 대 80으로 예측, 계획하고 TV 방영은 홍보를 목적으로 했다고 한다.
앞으로 점차 모바일과 웹으로 드라마를 소비하는 비율이 높아지면 ‘웹드라마’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드라마는 당연히 TV로 정해진 시간에 보는 (TV)드라마를 일컬었던 것처럼, 앞으로는 드라마의 정의가 ‘모바일이나 웹으로 소비하는 짤막한 영상’ 등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강의를 듣던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주어졌다. 스토리와 플랫폼에 대한 설명을 마시친 PD님은 간단한 테스트를 제시했다. 5분을 줄테니, 주인공이 가진 장애물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꾸며내 보라고 했다. 조금은 부끄러운 기대감으로 이야기를 꽤 구체적으로 적었지만 남들 앞에서 발표할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나서지 못하는 나에게 아쉬움이 들던 순간, PD님께서는 “이 과제를 듣는 순간 내 이야기를 만들고, 남들 앞에서 나댈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이 길로 가도 괜찮다. 내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줄 용기가 부족해도 괜찮다.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토리텔러로서의 끼는 충분하다.”고 했다. PD님 특유의 부드러운 강단이 담긴 한 마디에 주책없게도 내 가슴은 더 두근거렸다.
올 여름부터 아트인사이트에 오피니언을 기고하면서, 필연적인 자기반성을 경험하였다. 혼자 끄적거리기를 즐기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글을 쓰는 것은 꽤 다른 문제였다. 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거나 혹은 실없이 들뜨게 하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가볍거나 숨이 찰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형편없는 문장 실력에 답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글을 기고하고 내 두서 없는 글에도 공감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읽어준 이들뿐만 아니라 나도 위로를 받았다. 특히 내 안에 일었던 가장 강력했던 폭풍을 담아낸 글은 읽는 이의 가슴에도 매섭게 와 닿았는지 더욱 뜨거운 반응이었다. 글을 쓸 때만큼 감정의 부침이 심한 시간은 없다. 때문에 이러한 요동을 의미 있다고 말씀해주신 김지현 PD님에게 정말 고마웠다. PD님은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작가들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했다며 기뻐했다.
PD님은 3시간이 넘는 강의를 마치며 ‘트렌드와 플랫폼의 변화를 무색하게 하는 인간사의 무언가가 있다.’고 강조했다. 좋은 스토리 앞에 새롭고 빠르다는 것은 힘을 잃는다. 그래, 맞다. 내 안에도 시간에 휩쓸리지 않을 이야기들이 있다. 강의를 돌이켜 봤을 때, PD님을 단지 웹드라마 PD라고 소개하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행에 편승하려 웹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스토리텔러로서 스토리가 전달될 방식을 고민하며 직업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PD님과의 만남, 아트인사이트와의 인연에 감사하다. 좋아 보이는 것을 탐내지 않고, 잘 모르는 이야기는 함부로 하지 않아야겠다. 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최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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