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한국에서 초연을 올린 연극 < R&J >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 R&J >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 로미오와 줄리엣 >을 각색한 작품으로, 오직 네 명의 소년이 등장해 원작 속 10여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설정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가톨릭 학교에 재학 중인 네 명의 소년들은 몰래 기숙사를 벗어나 비밀의 장소로 향한다. 그곳에서 붉은 천으로 감싼 금단의 책, < 로미오와 줄리엣 >을 낭독하며 아이들은 점차 작품 속 금지된 사랑, 폭력, 욕망에 이끌리기 시작한다. 하룻밤의 일탈을 통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남학생들의 성장을 담은 연극 < R&J >를 만나보았다.
01 무대
연극 < R&J >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의 무대 구성은 양 끝에 높게 쌓아올린 책상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시키는 길게 난 창 2개가 전부인데, 다소 단조롭게 느껴지는 무대는 여러 빛깔의 조명을 통해 화려하게 수놓아진다. 이는 본 연극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도 일맥상통한다. 극 중 극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본 연극에서는 딱딱하고 지루한, 잿빛의 현실과 학생들의 연극을 통해 생명력을 입는 환상의 공간이 대비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연극을 펼치는 장소는 낡은 폐강의실로 보이는데, 밤의 어둠 속에서 퀴퀴한 교실은 연극이 펼쳐짐과 동시에 새로운 공간, 상상력과 환상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학생들의 일탈은 끝을 전제로 하는 한여름밤의 꿈이다. 조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같은 소년들의 일탈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보기 드물게 무대 위에 또다른 객석을 마련하고, 배우들이 객석 사이를 누비며 연기하기 때문에 관객들과 배우 사이의 거리감을 줄였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사방에서 연극과, 연극 속 연극에 수월하게 몰입하게 된다. 객석 사이에서 배우들이 힘차게 발을 구르는 진동은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돼,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심장 박동마저 같이 느끼는 듯한, 대사를 통해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02 소품
학생들의 연극에서 사용되는 소품은 단 하나, 책을 감싸고 있던 붉은 천이다. 하나의 소품만으로 극 전채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드물다보니 연극을 관람하기 전 필자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도 바로 이 천을 활용한 연출이었다. 사실 이 붉은 천이 활용되는 방식은 때마다 특정한 소품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문학적 상상력을 전제로 하는데, 이를테면 극적 허용인 셈이다. 실제 소품이 아닌 천을 활용함으로써 본 연극은 극 중의 극이 실제가 아니고, 공연의 중심은 연극 속 등장인물이 아닌 학생들임을 관객에게 확인시킨다. 붉은 천은 연극에서 다양한 소품을 대신해 활용되는데, 등장인물들이 칼싸움을 할 때 천은 칼이 되고, 맵 여왕의 망토가 되기도 하며, 독약이나 줄리엣의 신혼 침실이 되다가도, 피 흘리는 시체나 연극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피, 생명력, 활기, 사랑, 열정, 죽음 등 붉은 색이 연상시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고려할 때 해석은 더욱 풍부해지며, 무엇보다도 붉은 천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조명이 내리는 아름다운 무대의 모습은 관객들마저도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03 안무
연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 R&J >는 뮤지컬과 같이 음악과 군무가 활용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학생들이 학교의 억압에 짓눌린 현실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직사각형의 조명으로 표현된 각자의 위치에서 의자를 들고 직선의 동선에 맞춰 움직이는 안무는 그들이 기계적이고 억압적인 체계 속에 길들여져 있음을 대사 한 마디 없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연극 < R&J >는 공간과 인물을 적절히 활용해 극 중 극이라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학생들이 연기하는 무대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각자의 공간이 겹치기도 하고, 자신의 배역이 나오지 않는 장면일 경우 나머지 학생들은 등장인물이 아닌 학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로미오가 추방당해 로렌스 신부의 사제관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무대 한켠에는 줄리엣의 신혼 침실이 마련된다. 대본이 각자의 공간을 번갈아 서술함에 따라 무대 역시 양쪽을 번갈아 가며 비추는데, 로미오가 연기하는 동안 줄리엣은 학생 2로 존재하고, 줄리엣이 연기하는 동안 로미오는 학생 1로 존재하는 식이다. 학생들이 배역을 연기하지 않는 무대 바깥에서조차 배우들은 쉬지 않고 학생을 연기해야 한다. 본 연극 < R&J >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아닌, 그 너머로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로미오가 절망해 있는 동안 줄리엣은 신혼의 단 꿈에 젖어있지만, 학생 2가 줄리엣을 벗어나 학생 2로 존재하는 동안은 그들의 기구한 운명에 슬퍼하기도 하고 로미오에게 분노하는 유모 역의 학생 4를 제지하기도 한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을 오가면서 학생들은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동일시하기도 하며 점차 그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관객들 역시 연극이 절정을 향해 감에 따라, 오직 < 로미오와 줄리엣 >의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는 연극의 텍스트를 넘어 그 바깥에서 존재하는 현실의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학생 1은 극의 시작을 이끄는 인물이다. 어떤 일이든지 한 번 시작하고 나면 그 이후의 몰입은 비교적 쉽지만, 시작하는 데는 늘 망설이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그 일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행위라면, 그를 시작하는 데는 더더욱 강한 신념이나 욕망이 바탕이 될 것이다. 다른 학생들이 학교의 규칙에 따라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는 동안, 학생 1은 몰래 빠져 나와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를 쓴다. 내 사랑에게, 로 시작하는 이 편지는 물리적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는 강압적인 학교의 분위기와 상반된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고, 사랑을 거부하라는 이성의 명령을 듣지 않아 더더욱 열병 같은 사랑으로 불타고 있다는 그의 고백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학생 1이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규율 속에서도 짓누를 수 없는 문학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의 남다른 자질이 결국 연극이라는 금기를 감히 건드리는 힘으로 작용할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앞으로 그를 포함한 네 명의 학생들이 <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는 연극에서 경험할, 사랑이라는 감각에 대해 학생 1은 이미 예민하게 트여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학생 1은 연극을 시작하는 중요한 역할에 어울리는, ‘선택받은’ 인물로도 볼 수 있다. 극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엄격한 청교도의 교리를 따르는 기독교 학교이며, 교육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하는 비윤리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 그리고 학생 1이 나머지 학생들을 이끌어 비틀린 교리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게 한다는 점, 그의 결말이 죽음 혹은 억압적 현실(박해)로부터의 탈출을 암시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연극 < R&J >를 무대 위에 펼쳐지는 성경으로, 학생 1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짓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학생 2는 줄리엣과 벤볼리오, 존 수사의 역할을 맡는다. 연극의 시작을 이끄는 학생 1과 더불어, 학생 2는 가장 열성적으로 연극에 임한다. 학생 3, 4가 장난스럽게 연극을 즐기는 모습과 상반되게, 학생 2는 학생 1이 가지는 진지한 태도를 따라 매우 빠르게 연극에 몰입한다. 하지만 학생 1과는 조금 다르다. 학생 1이 타고난 문학적 감수성과 예민함, 또는 학교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통해 금기시되는 연극에 빠져든다면, 학생 2는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그동안 느끼던 감정의 결핍을 채우려는 듯이 연극 속으로 들어간다. 학생 3이 예상치 못하게 폭력을 휘둘렀을 때나 학교의 개입으로 연극이 중단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학생 2는 연극을 계속해서 이어가며 심지 굳은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 2가 연극을 대하는 태도는 그가 줄리엣으로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학생 3과 4가 우스꽝스럽게 여성을 연기하는 동안, 줄리엣으로 분한 학생 2는 장난스러운 기색 없이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작의 지문에도 명시되어 있듯, 그에게 연극은 게임 그 이상의 것이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 사랑에 빠져들던 학생 2의 모습은 마치 그가 이전부터 감정적 결핍을 느끼고 이를 해소할 기회를 갈구해왔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줄리엣의 죽음과 함께 날이 밝고, 새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학교의 종소리가 울리자 학생 2는 누구보다 빨리 극 속에서 벗어난다. 자신이 연기하는 로미오의 죽음 이후에도 연극을 이어나갈 의지를 보이는 학생 1과 달리, 학생 2는 텍스트에 적힌 줄리엣의 운명을 순순히 따르고, 로미오에서 벗어나지 못한 학생 1의 입맞춤을 거부하며 외려 그를 위로한다.
“만약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이렇게 생각해.
어떤 환상을 보는 동안 잠들었던 거라고.
그럼 괜찮을 거야.
그리고 끝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꿈처럼 헛된 일이라고 절망하지는 마.”
이 장면에서, 욕망을 마주하는 일도, 그리고 욕망을 포기하는 일도 학생 2에게는 처음이 아닌 아주 익숙한 일처럼 보인다. 죽음의 공포마저도 이겨내는 줄리엣의 절절한 사랑을 경험했으면서도 그 속에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상실감이 어떻게 작을 수 있을까. 그 깊은 상실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까지 학생 2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원하고 포기했을지, ‘끝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헛된 일은 아닐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던 시간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언제나 이 장면에서 텍스트 바깥의 학생 2가 그려지는 것만 같다. 이런 이유로, 필자에게는 누구보다 학생 2가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다가온다.
학생 3, 4는 금기를 깨는 일에 대해 학생 1, 2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금기를 깨뜨리는 행위는 개인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금기를 통해 유지되던 공동체의 파멸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오는 두려움은 공동체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클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일탈에 대해 두렵고 조심스러운 마음은 두 학생 모두 같지만, 공동체가 학생 3, 4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학생 3은 폭력에 가장 취약한 인물이다. 극 초반 학생 3이 (아마도 선생에게) 매를 맞는 장면,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며 다가오는 친구들을 제지하고 익숙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모습은 그가 이전에도 이런 종류의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개인의 도덕성과는 관계없이,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은 어느 순간 폭력이 사용되는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학생 3 역시 그렇다. 장난스럽게 연극을 즐기던 학생 3과 4는 학생 1과 학생 2가 장난의 수준을 넘어선 깊은 사랑에 빠지며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학교의 가르침을 벗어나자 이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금기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던 학생 3은 격렬한 갈등 속에서 학생 1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연극은 중단된다.
학생 3이 연극에 진지하게 몰입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바로 이때로 보인다. 스스로 폭력을 휘둘렀다는 충격과 죄책감으로 얼어붙은 학생 3에게, 나머지 학생들이 다가가 보여준 사랑과 관용으로 연극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그러나 무의식 중에 되물림 되는 폭력의 굴레는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로미오의 추방 이후, 줄리엣이 페리스 백작과 결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줄리엣의 아버지 역을 맡은 학생 3, 4는 학생 2를 붙잡고 체벌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학생 3은 격앙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학생 2를 의자로 내리치려고까지 한다. 대본에 존재하지 않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다시 연극은 중단되고, 학생 3은 또다시 폭력적인 자신을 마주한 충격과 자기혐오를 이기지 못한다. 학생 3이 이토록 유달리 폭력이 벌어지는 상황에 취약한 것은 학교를 넘어 그의 가정환경에서 역시 비슷한 상황이 수차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학생 2가 연극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하며 그를 ‘어머니’라고 부르자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양 두려워하는 학생 3의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렇다.
학생 3이 물리적 폭력에 익숙하다면 학생 4는 정신적 폭력에 길들여진 인물로 보인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학생들이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갈 때부터 학생 4는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한다. 학교의 세뇌 교육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그로서는 그런 가벼운 일탈마저도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학생 4가 금기로서의 연극에 가까워지는 시점 역시 (학생 3과 마찬가지로) 줄리엣의 체벌 씬으로 생각되는데, 이때까지의 학생 4가 학생들의 공포를 이용해 군림하는 학교의 방침에 약자로서 순응했다면, 줄리엣을 체벌하는 장면에서 그는 폭력을 휘두를 자격을 갖춘 강자로 변모한다. 자신들을 옥죄는 강자의 부조리함을 몸소 체험하고 깨달으면서, 학생 4 역시 비로소 가벼운 일탈을 넘어 현실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의 연극에 동참하게 된다.
수직적인 권력구조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개개인의 인간성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다. 엄격한 규율과 더불어 틀을 벗어난 개인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처벌을 통해 개인은 구조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억압을 넘어선 정신적인 세뇌를 통해 피지배계층이 반발할 가능성의 싹조차 잘라버려야 한다. 욕망하는 자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주체성을 획득한 사람은 더 이상 길들여지지 않는다. 때문에 학생들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반복적인 세뇌교육을 통해,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솔직하게 들여다 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학교는 억압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교육의 공간으로도 존재한다. 여기서의 교육은 학문의 탐구보다는 정해진 것을 암기하는 주입식 교육에 가까우며,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 중심의 수직적인 체계를 받아들이고 유지할, 수동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데 목적을 둔다. 학교에서 학생 1, 2, 3, 4는 지배당하는 개인인 동시에,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으로서의 마초적인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여성, 혹은 ‘여성성’은 금기시된다. 이는 흔히 여성의 특성이라 여겨지는 것들과 더불어 여성을 통해 자극받을 수 있는 성적인 욕망까지도 포함한다. 학생들에게 이러한 ‘여성’의 요소들은 지배해야 할 대상이자 동시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존재하는 금단의 영역인데, 이는 머큐시오 역의 학생 3이 들려주는 맵 여왕의 이야기에서, 불현 듯 들려오는 맵 여왕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단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학생 3, 4가 캐퓰렛 부인과 줄리엣의 유모로 분하는 동안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모습에서 역시 이들이 진짜 여성이 아닌, 남성의 시선에서 재단된 여성상만을 교육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극 초반, 학생 2, 3, 4는 로미오로 분한 학생 1의 연애편지를 읽으며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웃음을 터뜨린다. 이들에게는 사랑 역시 남성이 지배해야 할, 여성의 영역에 속해있는 낯간지러운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가장 근본적인 욕구, 생존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되며, 번식을 통해 무리의 생존을 도모하려는 성적 욕망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낳는다. 결국은 기본적으로 이성을 통해 유발되는 성적 욕망에서 기인하는 감정이 사랑이므로 이 역시 금기의 대상인 것이다. 이는 학생 1과 학생 2가 진지하게 사랑을 경험하며 서로에게 빠져드는 동안, 학생 3과 4가 두려운 기색으로 바깥을 살피며 그들을 제지하고 위협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연극 < R&J >에서 사랑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 로미오와 줄리엣 > 속에서 연인 간의 사랑을 경험하며, 학생들은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성적 욕망의 해방을 이루게 된다. 또한 번식 욕구에서 출발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성애적 관점에서의 좁은 범위를 벗어나 이타심, 우정, 연민, 동정, 의리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는데, 연극을 통해 학생들은 여러 가지 결로 존재하는 사랑과, 그 속의 환희, 증오, 슬픔, 고통 등의 살아있는 강렬한 감정들을 몸소 느끼게 된다. 이 시점에서 사랑은 더 이상 학생들에게 우습거나 가벼운 환상이 아니게 된다. 학생들의 연극은 그들의 규율을 일깨우는 학교 종소리에 의해 중단될 위기에 처하는데, 이때 연극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려는 학생 2, 3, 4를 향해 학생 1은 ‘사랑하다’의 라틴어 동사변화(Amo, Amas, Amat, Amamus, Amatis, Amant)를 외친다.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에 응답해, 그들을 억압하는 학교의 상징인 교복을 벗어던지며 다시 연극으로 돌아오기를 선택한다.
이 라틴어 동사변화 문구는 연극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외우던 내용 중 하나이다. 그들이 연극을 통해 사랑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 문구는 그저 문법 암기 위주의 교육으로, 의미도 모르는 채 주어진 정보만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 사랑하다 >라는 언어는 기표로만 전달되며 학생들에게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연극을 통해, 학생들이 사랑을 비롯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생동적이고 강렬한 욕망에 눈뜨는 순간 < 사랑하다 >는 비로소 기표와 기의의 합일을 이루게 된다.
Amo, 나는 사랑한다.
Amas, 너는 사랑한다.
Amat, 그(그녀)는 사랑한다.
Amamus, 우리는 사랑한다.
Amatis, 너희는 사랑한다.
Amant, 그들은 사랑한다.
바로 이 때, 반복적으로 외치는 < 사랑하다 >는 그들을 억압하고 인간성을 지워 그저 거대한 구조의 부속품으로만 존재하게 하는 현실에 대항할 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능동적인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힘을 주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연극 < 로미오와 줄리엣 > 속에서 네 명의 남학생들은 성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다양한 인물을 연기한다. 이를 통해, 개성을 억누르는 주입식 교육 속에서 자란 학생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편협한 세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특히 남초 사회에서 정의하는 여성과 여성의 특성을 벗어나 스스로 여성 그 자체가 되는 경험은 학생들이 그동안 강요당해왔던 남성 중심의 획일적인 가치관이 허상임을 체득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이 자신들의 배역에 몰입할수록, 바깥 세계의 규칙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의 학생들, 특히 학생 3과 학생 4는 배역에 진지하게 몰입하기보다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각각 캐퓰렛 부인과 줄리엣의 유모 역을 맡은 이들은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높이고, 왜곡되고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한다. 그들에게 여성이 되는 경험은 아직 어색하고 이상한, 장난에 지나지 않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 2가 줄리엣의 역할을 맡아 극을 이끌고, 학생 3, 4가 자신의 배역에 깊이 몰입하면 할수록, 이들은 사회에서 전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모사하며 사회적 통념을 따르기보다, 성별의 프레임 자체를 벗어나 캐릭터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지는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주인공 줄리엣 역을 맡은 학생 2가 < 여성스러움 >을 연기하려 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두 가지의 이유로 인상적인데, 첫째로는 학생들의 연극이 가지는 목적을 분명히 한다는 점이다. 연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안에서 새로운 인물을 발견하고 느끼며 표현하는 작업이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내가 아닌 인물과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지분을 넓혀가는, 요컨대 ‘나’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학생들이 하는 연극은 획일적인 모습만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다양한 감정과 욕망을 만나고, 그로써 자신 안의 또 다른 ‘욕망하는 나’를 발견하게 하는 장치이다. 그러므로 연극 속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학생 2가 ‘여성’으로서의 줄리엣의 외적인 모습을 얼마나 잘 흉내 내느냐가 아닌, 인간 줄리엣의 감정을 만나고 따라가며 빠져드는 과정인 것이다. 이는 < 로미오와 줄리엣 >의 대사가 90퍼센트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셰익스피어의 원작 속 등장인물이 아닌 학생들을 만나게 하며, 이 연극의 주인공이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학생들이라는 점을 똑똑히 보여준다.
둘째로는 < 여성성 >이라는 사회적 통념 자체를 타파한다는 데 있다. 학생 2가 굳이 여성이 될 필요도 없지만, 여성 캐릭터에 몰입하는 남성이 아니라 줄리엣이 된 순간만큼은 스스로를 여성 그 자체로 여길지라도 사회가 제시하는 여성성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성의 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여성성을 모사하는 것은 기존의 성차별적인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점에서, 그가 여성스러움을 연기하지 않는 것은 외려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지우며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끝에 학생들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제시하는 교과서를 찢고 내던진다. 이 행위를 통해 그들은 궁극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어오던 남성 권력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이로써 (그로 인해 거세되었던) 자신들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연극은 결국 줄리엣의 죽음과 함께 새벽녘 동이 트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된다. 깊은 밤에 무엇을 보고 들었든, 아침이 밝으면 모두 사라질 꿈인 것처럼 학생 2, 3, 4는 그들이 벗어 던졌던 교복을 다시 주워 입고 환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곳을 떠난다. 학생 1은 학교의 규칙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친구들을 막아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대부분의 극 중 극이 그렇듯, 꿈처럼 다가온 기이한 간밤의 경험은 역시 꿈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그 환상의 끝자락을 잡고 일어나 현실에 대항하기에는 학생들은 너무나 어리고, 현실의 벽은 너무나 크고 높은 것이다. 혼자 남은 학생 1은 환상을 가로막은 현실에 좌절하여, 또 분노하며 되뇐다. 나, 꿈을 꿨어. 어젯밤에, 꿈을 꿨어. 꿈을, 꿨어! 그에게는 연극이야말로 환상이나 꿈 이상의, 현실에 맞설 힘과 용기를 주는 탈출구이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에게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꿈처럼 덧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자는 듯이, 그렇다면 꿈은 위험한 것이 아니니 제발 한 번만 다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듯이 학생 1은 외친다.
이때 절망하며 쓰러져 있는 학생 1을 향해, 마치 꿈처럼 어디선가 학생 2, 3, 4가 < 로미오와 줄리엣 >의 대사를 읊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대 뒤편에서 등장한 학생 2, 3, 4를 발견하고 학생 1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학생 1이 테이블과 의자 위에 올라서서 붉은 천을 공중으로 내던지고, “어젯밤에, 꿈을 꿨어!”라는 외침과 함께 극은 막을 내린다.
연극은 모두 꿈이었을까? 학생 2, 3, 4는 학생 1에게로 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이마저도 학생 1의 환상일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뒤섞으면서, 극은 비극과 희극 사이의 경계 또한 헤쳐 놓는다. 이런 식의 열린 결말은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보는 재미가 있는데, 관객의 해석뿐만 아니라 배우의 해석에 따른 노선도 각자 달라 어느 날은 비극적인 결말로, 어느 날은 희망찬 결말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게 바로 공연 예술만이 가지는 묘미가 아닌가 한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원하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다시 반복할 수도 없는, 그 찰나의 순간 느껴지는 감정과 공기로 펼쳐지는 이야기. 그래서 더 오래 곱씹게 되고, 더 진한 인상을 갖게 되는 게 아닐까.
혼자 남은 학생 1을 둘러싸며 환청처럼 들려오는 연극 속 대사들은 꼭 그가 연극 속에 갇힌 듯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학생 1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극 초반부터 남의 눈을 피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읊을 정도로 문학 속의 세계에 푹 빠져있던 학생 1의 여린 감수성이 현실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꿈이라는 환상의 세계를 도피처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결말은 확실히 비극적이다. 줄리엣의 죽음까지 목격하고 나서 홀로 꿈에서 깬 학생 1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굳건한 현실에 절망하며 스스로 연극 속에 갇히기를 선택한다. 책상과 의자를 쌓아올린 위로 붉은 천을 내던지는 장면은 얼핏 그가 목을 매 자살하는 것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로미오의 대사 중, “사람이 죽기 전에 즐거워지기도 한다던데, 그걸 죽음의 섬광이라고 부른다지.”라는 대사는 학생 1이 붉은 천을 던지기 직전 보이는 밝은 미소와 연결되기도 한다.
결말의 노선은 볼 때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만큼의 비극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학생 2, 3, 4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아침 햇살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명령하는 학교의 종소리에 따라 연극을 벗어나 현실 세계로 복귀했다면, 학생 1은 강제로 끝맺어진 연극의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으로만 남아야 한다. 환상 속의 세계는 현실로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며, 학생들에게는 현실을 뒤집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경험한 연극은 수동적이고 미성숙한 아이에서,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욕망에 따라 움직일 줄 아는 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성장의 시간이었지만, 욕망을 인지하고 진솔한 자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아이는 성장하지 않는다. 한 뼘 더 자라기 위해서는 사랑의 열병뿐만 아니라 상실의 고통 역시 겪어야만 한다. 학생 1은 학생 2, 3, 4가 떠난 빈 자리에 홀로 남아 이별을 견뎌내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한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극의 대사들 속에서 연극의 상징이었던 붉은 천을 하늘 높이 던지며 사춘기의 열병을 떠나보낸다.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스스로 연극의 끝을 선언하면서 학생 1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그 곳은 죽음일 수도, 학교를 벗어난 새로운 세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 1이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 끝이 죽음이라 해도 비극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머지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다. 추락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 올라야 하고,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날개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날개가 있는 한, 추락한다 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학생 2, 3, 4의 미래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그들의 연극은 강제로 끝맺어졌고, 교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은 다시 학교의 억압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연극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경험한 기억을 잃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에서 네 학생들은 다시 한데 모여 학교의 인장이 새겨진 자켓을 벗고,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며 환호한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풍경 아래서 손을 흔들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퇴장한다. 어린 시절의 열병을 함께 앓았어도 이들이 언제까지고 함께 할 수는 없다.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학교 속에서 일상을 함께 하며 의지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성장해 독립한다. 서로가 없어도 버틸 수 있고,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엔딩이 비극이 아닌 희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헤어지는 네 학생들의 모습은 150분의 긴 러닝 타임 중에서도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다.
이 밖에도, 한국어 발음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면서 셰익스피어의 길고 복잡한 문어체 문장들을 훌륭하게 번역해낸 점, 아름다운 음악, 창의적인 연출, 짜임새있는 구성과 입체적인 인물 등, 연극 < R&J >는 기존의 우려를 뒤집고 초연임에도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호평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빠른 시일 내로 재연의 막이 올라오길 기대하며 이만 긴 글을 마친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이채령
ART insight
Art, Culture, Education -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