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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May 11. 2018

왜 궁금해, 내가 페미니스트인지?

 

 

 

 

누군가는 인류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성차별일 것이라 했다. 그럴 듯하다. 온세상엔 수많은 차별과 이로 인한 갈등이 있는데 무엇이 마지막에 남을지 골라야 한다면? 글쎄, 이건 꽤나 암울하고 슬픈 도박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차별은 없다. 돈이 부르는 차별, 인종간의 차별, 종교나 사상이 부른 차별, 남성과 여성간의 차별, 온갖 차별. 왜 평등한 건 잘 생각이 안나는데 차별은 부르는 대로 나오는걸까. 그러나 이 모든 건 결국 힘이 부르는 것이 아니었던가. 역사가 강자를 위주로 서술되듯이 차별은 힘을 먹고 자랐다. 여기서까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건 어떤 경쟁의 심보인가. 약자가 되는 것도 서러운데 약자 중에도 순위라도 매겨야 하는가.


그런 나를 맥 빠지게 하는 질문이 하나 생겼다. 뜬금없이 내게 묻는다.

“너 페미니스트야?”

나는 답한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졌는데? 나한테 그런 거 궁금해한 적 없었잖아.”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는 아니지?” 재차 묻는다. 내 질문에 답은 해주지 않고.

“너한테 페미니스트는 뭔데?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는 뭐고, 나는 어때 보이는데?” 답한다.


극단적이란 것도 사람마다 기준에 다른 거 아닌가. 친절하게 대답해주고 싶어지지 않는 질문이다. 저의가 궁금해진다. 사실 저의는 느껴진다. 당신에겐 페미니스트는 부정적인 의미다. 나는 순식간에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페미니스트’로 분류된다. 우리가 알았던 시간들, 우리 사이라는 건 사라져버린다. 나와 너는 없어지고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스트가 불편한 존재가 남는다. 나는 너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무슨 표현이 적당할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남성주의자? 아무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우리 사이에 성별의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남북분단보다 오래된 성별이라는 고루한 분단의 역사를 우리까지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나름 남녀간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말할수록 충격은 크다.  그거 알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그 이미지가 다 깨졌다.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뉘앙스의 문제였다. 그건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의견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아니라고 해, 아니라고 해라. 이건 마치 '4885, 너지?' 같은 뉘앙스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동전의 앞뒷면 사이에 놓여있었다.


큰 아들이 대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 큰 맘 먹고 낳은 셋째는 딸이었다. 아들이 아니어서 느껴야 했던 감정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 좋게 말하면 얼굴도 안보고 데려가는 셋째딸이지만 실은 ‘아들 낳으려다 어쩌다 낳은 딸’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술을 마시느라 100일이 넘도록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 있었지만 그들의 세상엔 없었다.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 때부터 성별과 상관없이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미안하게 해주겠다고. 물론 부족한 점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수군거리는 일가 친척에게, 아들이 아니라고 낙태를 하고, 딸이 태어나면 쳐다보지도 않는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 같은 딸, 아들보다 나은 딸이 될 심산이었다. 야속했다.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화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장남의 의무로 아들을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건 다른 시대에 태어난 내가 품고 가야하는 숙제다.  그런 이유로 아들과 딸, 남자와 여자라서 서로를 편가르고 내가 안좋은 기억이 있다고 일반화해서 미워하면 모든 게 반복되기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릴 적 생각과 달라졌다. 애초에 아들같은 딸이 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자식인 건 변하지 않는다. 성별과 상관없이 나에겐 좋은 자식,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선택지가 있었다. 그 생각이 더 편하게 와닿는다.


어린 시절엔 평등하지 않은 모습이 평등한 것처럼, 당연하지 않는 모습이 당연하게 펼쳐졌다. 제사를 할 때면 설거지며 요리는 여자들이 모여 앉아 하는데 남자들은 방 안에서 TV만 보고 있었다. 우리가 방에 서 쉴 수 있는 땐 원하지 않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제삿상에서 우리는 여자라는 이유로 절하지 못했다. 여자애를 무슨 공부를 시키냐며, 아들만 편애하는 삼촌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거 정말 불평등한 말씀입니다. 저희가 아들이나 딸인 걸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걸요. 삼촌도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었잖아요. 남자가 늘 잘한다는 보장은 있나요? 반대로 여자라고 못한다는 근거가 있나요? 다 소중한 삼촌 자식아니냐며 말을 했더니 삼촌은 다음부터 내 앞에서는 말을 아꼈다. 원, 애가 무섭다면서. 여자면 시집이나 잘 가는게 장땡이라는 말에 왜 우리 스스로 빛나지 못하고 누군가의 아내 같은 별명으로 살아야 하냐고 따졌다. 무슨 소유물이나 장식품이냐고 말이다. 버르장머리 없어보이는 건 백번 인정한다. 하지만 못 할 말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할 말을 잃은 건 나의 못된 버르장머리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둘 중에 누가 잘났다고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싸움을 걸고 싶은 게 아니다.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궁지에 몰고 싶지 않다. 여자라고 약하고 차별받았으니 남자는 입도 뻥끗하지 말고 무조건 대우를 해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남자라고 힘들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우리 모두 서로 다르게 강요된 삶을 살았으니까. 남자만 물건을 옮기는 등 힘쓰는 일에 당연히 투입되고, 소개팅이니 결혼을 할 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눈물 흘리지 않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하늘에서 돈이 쏟아지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나? 그들은 화수분처럼 채워지는 지갑도 아니고 지게차도 아니다. 군대에서 감옥처럼 갇혀있는 삶. 출산 후의 내가 없는, 또 다른 갇혀 있는 삶. 두 삶을 비교하며 피터지게 싸우는 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게 정말 남자와 여자 서로간의 잘못인가. 남자들의 청춘을 강제로 맡기게 만드는 시스템, 출산을 하고 자신의 꿈과 가족을 양립하지 못하게 해서 대체로 꿈을 포기하게 하는 사회구조가 문제 아닌가.


각자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원하지 않게 보내고 있다. 내가 더 아프고 힘들다며 경쟁하고 남의 고통은 별 것 아니라 깎아내리는 것이 정말 바라던 일인가. 사실은 우리 다 정말 힘든데 정말 잘 살고 싶었던 것 아닌가. 시스템은 그대로 있는데 정말 우리만 치고 박고 싸워서 남는 건 무엇인가. 우리가 조목조목 짚어 비판할 부분은 성별 그 자체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연막처럼 공격의 화살을 자신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돌려놓았다.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동안 안전하니까. 시간이 충분히 흘러버려서 지금까지 왔으니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남녀 상관없이 누군가 짐이 있다면 무거운 것은 함께 옮기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하는 삶을 산다면 비용도 나누자고. 남자의 눈물이 여전히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라는 말에 울 땐 울 줄 아는 게 좋다고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담아두면 다 스트레스고 병이 된다고.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내가 ‘보통 여자’와 다르다고 했다. 전 ‘보통 여자’도 무엇도 아닌 그냥 저에요.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내게 참 독특하다.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먼저 묻거나 부른다. 막상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여전히 혼란스럽다. 명확하고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할 수도, 맞다며 그 이름표를 붙이고 다닐 수도 없다. 게다가 나 역시 부족하다. 완전한 성평등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나도 모르게 툭 나오는 말은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말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이름표를 붙여 나의 일거수일투족으로 모든 페미니스트에 대한 인식이 좌우되길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도 페미니스트란 단어는 좀 혼란스러워보인다. 다양한 뜻이 있어서 같은 말인가 싶기도 하다. 남자들에게 화가 나 있어 두 말 할 것 없이 제껴야 되는 존재, 말 많고 자기 주장 세서 남자들 설 자리를 좁게 하는 어떤 부류들(대체로 여자), 남녀평등을 지향하자는 의견의 소유자 등등.


나에게 던져진 질문은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 아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이뤄지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관심이 생겨서, 의미를 두어서 좋다. 그러나 알아간다기보다 피해가려는 느낌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과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스트라고 분류당하고 싶지도 스스로를 분류하고 싶지도 않다. 무의미해서가 아니다. 의미가 있어서 조심스럽다. 라벨은 사람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한 편을 정하면 다른 이의 적처럼 여겨지기 쉽다. 남녀평등, 성평등은 별 문제 없는 말 같은데,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는 굶주린 쌈닭같다거나 더 어색하고 과격하게 느껴지는가? 크게 다르지 않은 이 개념들이 다르게 느껴진다면 개념표현은 잠시 내려두어도 늦지 않다. 한 단어로 된 이론적인 개념보다 그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더 와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문을 써도 같은 단어의 개념이 천차만별이다. 익숙하지 않은 이 개념 앞에서 적어도 지금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먼저 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오는 게 제일 좋으니까. 그 때가 좀 더 가까워지도록 당연스러운 듯이 여자를 남자와 분리하는 말과 시선에 말을 걸 뿐이다. 남성적, 여성적,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말이 어느새 말이 되지 않은 날이 올 수 있도록. 남녀를 나누지 말고 사람을 보아달라고. 그리고 사람이라면 동등한 눈높이에서 바라봐달라고. 피곤할 것이다. 쉽지 않을 걸 안다.  쉬웠으면 인류 최후의 차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피곤하지 않은가? 남자여서, 여자여서 당연시되는 것들. 남자는 화장품 근처에 가도 이상하고, 여자는 화장을 안하면 예의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남자는 늘 여자를 지키고 여자는 남자에게 보호받아야 하고. 더 하자면 이 글 안 끝난다. 그런 이야기들, 일상이긴 한데 지겹다.


물론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질문은 계속된다. 종종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을 받는다. 남자에겐 받지만 여자에겐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 것도 참 신기하네. 그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질문 속엔 낯선 경계심이 있다. 현재로선 질문을 받으면 반문을 하거나 내 생각은 이래, 하면서 답한다. 어떤 분은 어느 여자분에게 카키색은 남자색인데 왜 칙칙하게 입었냐고, 여자라면 빨강색이나 분홍색을 입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나는 답했다.


“색깔에 남자색, 여자색이 어디있나요? 그렇게 따지면 남자분이 ‘여자색’인 빨강색, 분홍색 셔츠를 입으시면 안될 것 같은데. 근데 오늘 핑크색 셔츠 입으신 거 아니에요?”

그러자 그 분은 대뜸 나에게 말했다. 이젠 처음 들을 때만큼 놀랍진 않다.

“요즘 말하는 소위 ‘페미니스트’요?”

나는 답한다.

“색깔에 성별이 없다고 말하는 걸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저는 페미니스트가 맞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페미니스트로 규정짓기보다 저는 그저 제 생각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래서 페미니스트면 그럼 색깔에 성별을 나누는 사람은 뭐라고 불러드려야 될까요?”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장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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