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희화화되고 조롱 당하는 소수자들
“우리 오늘은 조금 색다른 거 해보자.”
약속을 잡던 중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할 것 많다는 서울까지 와서 내가 가는 코스는 늘 식사-카페였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대학로 연극이었다. 친구는 내 제안에 금방 응했고 우리는 별 고민 없이 인기 순위 1위의 작품을 선택했다. 예매 창엔 가볍게 웃기 좋다는 평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해당 연극을 보면서 나는 가볍게 웃지 못했다. 오히려 연극이 가벼워지려고, 웃기려고 노력할수록 더 무거운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내가 원한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잠시 벗어나게 해줄, 지나고 나면 잊어도 되는 그런 가벼운 웃음이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연극에서 충분히 기대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성 소수자 캐릭터가 들어가니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연극의 핵심은 ‘앙숙으로 시작한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어떻게 연인 사이로 발전하느냐’였다. 조연들은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잠시 그 핵심에서 벗어나 웃음을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조연 중에는 여주인공의 친구인 게이 캐릭터도 있었다. 성 소수자 인물이 포함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들을 소비하는 작품의 방식이었다. 관람하는 내내 성 소수자 캐릭터를 동성 인물에게 무례하게 추파를 던지고, 과장된 말투와 몸짓으로 희화화하는 연극의 묘사방식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나 역시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어떤 묘사가 옳은지 그른지 함부로 결론지을 수 없다. 그래서 연극이 끝날 때까지도 마음속만 찝찝할 뿐,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했다. 관람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성 소수자 인물을 고유한 인격을 지닌 인간이 아닌, 이성애자들의 진지한 사랑 얘기 속 웃음거리로 대하는 작품의 태도에서 나의 불쾌함이 기인했음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 성 소수자도 이성애자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사람의 특성은 성 지향성이 아니라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구분된다. 많은 사람이 이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망각은 철저히 이성애자의 시각에서 나타난다. 그 연극이 불쾌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 묘사된 성 소수자 캐릭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이성애자가 있다고 하자. 그들이 좋아하는 대상이 모두 이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사람이라고 치부해도 되는가.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대상이 성 소수자로 바뀌면 같은 잘못을 범하는 걸까?
연극을 보는 내내 게이 캐릭터를 여자주인공의 액세서리 취급할 것이라면 차라리 등장시키지 말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작품에서 성 소수자는 묘사됨으로써 오히려 더 배제된다. 결코 이성애자 인물들과 같은 범주 안에서 평가될 수 없는, 주변적이고 대상화된 존재가 되고 만다.
생각해보니 그러한 배제가 꼭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학창 시절 내내 몸 담았던 교실에서도 매일 같이 이루어졌던 일이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거나, 여학생들과 자주 어울리는 남자애에게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게이 같다’는 말을 통해서 말이다. 학년이 바뀌어도, 상급 학교로 진학해도 그 말은 언제나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은 정말이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특정 성 지향성을 놀림거리로 삼는 것부터 시작해 그 근거도 터무니없었다. 근거는 항상 똑같았다. 남자답지 않다는 것이다. ‘남자다움’을 판단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저 좋아하는 대상이 동성일 뿐인 게이가 ‘여자 같다’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우리들은 그렇게 고정된 성 역할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지배된 교실에서 배우고 성장했다.
그 옆에 있던 나는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방관하기만 했다. 놀리는 애는 물론이고, 놀림 받는 애에게도 그 말은 단순히 장난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놀림에 온갖 폭력적인 시선이 담긴 것도 모르고.
나의 그런 생각은 한 아이의 울음을 보자 혼란을 맞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사회가 정한 남자의 틀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많아 특히나 ‘여자 같다’는 말을 많이 듣던 아이였다. 교복 입을 나이가 되어도 아이들은 ‘여자’를 ‘게이’로만 바꿀 뿐, 똑같은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집요한 조롱에 참다못한 그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고, 진짜 기분 나쁘다고,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놀리던 아이는 물론이고,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웃던 나도 당황했다. 하지만 그 당황은 결코 소수자를 조롱했다는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저 장난의 정도가 심했다는 조금의 반성일 뿐이었다.
10대 시절,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자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은 우리가 게이 캐릭터를 웃음거리로 묘사한 연극 제작진과 얼마나 다를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양상만 달랐을 뿐,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조롱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함이다. 교실 속 아이들은 놀릴 때 부차적인 설명을 더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맥락 없이 그 단어만 입에 올렸을 뿐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모욕적이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한 일이 잘못인지 아닌지는 ‘그 자리에 정말 성 소수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만 세우면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있었다고 가정하자 곧바로 아찔해졌다. 상상 속의 아이가 느꼈을 치욕과 비참함을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없었을까? 성소수자는 상상 속 동물이 아니다. 이 땅 위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다. 없을 수도 있지만, 충분히 있을 수도 있었다.
특정 대상을 조롱의 도구로 삼는 행위는 그 대상이 우리 곁에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야 나올 수 있다. 우리 역시 연극처럼 그들을 언급함으로써 오히려 배제했다.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건 알지만 내 옆에는 당연히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놀림 받던 애가 불쾌하다고 울 때에도 그 말에 상처받을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았겠지.
세상에 정말 다양한 성 소수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는 특히 게이만 언급되었다. 이는 내 제한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썼기 때문이다. '게이 같다'와 같은 맥락으로 여자답지 못한 (주로 머리가 짧은) 여자에게 '레즈 같다'는 말이 붙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안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을 뿐,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조롱은 언제나 이 사회에 도사리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일은 대부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어렸던 우리는 특권을 누리듯이 마음껏 철없었고 무지했다. 그리고 그 무지를 순수함과 착각했다. 상처 받은 피해자의 존재는 착각 속에서 손쉽게 지워졌다. 이제는 안다. 타인을 편견에 가두고, 소수자를 조롱했던 우리의 무지는 절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학창 시절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이 당연한 사실을 지금의 아이들은 인식하고 있을까? 폭력으로 점철된 학교를 12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다니다 졸업한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질 자격이 있기는 한가?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진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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