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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Sep 11. 2019

교실에 울려 퍼졌던 '장애'라는 말

쉽게 희화화되고 조롱당하는 소수자들

 

지적 장애 캐릭터 기봉이를 희화화하여 논란이 된mbc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의 한 장면

 

 

학창시절의 교실에서 ‘놀림’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근거도 없고, 맥락도 없다. 그저 상대방에게 불쾌함만 선사하면 되는 일이다. 불쾌함을 느끼는 지점은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일상의 대부분을 한 공간에서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했던 우리는 모든 게 일치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가치판단도. 그렇기에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파악하는 수고 없이 공통적으로 기분 나빠할 만한 말을 던지는 건 몹시 쉬운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장애’였다.

 

초등학교 1학년, 나와 같은 교실에 있었던 그 아이가 문득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의 아이들이란 원래 산만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지만 그 아이는 유독 남달랐다. 문장 하나를 제대로 완성하는 걸 본 적이 없었고, 항상 뛰어다녔으며, 결정적으로 선생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혼자 해낼 수 없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을 때이지만 그 아이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만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호칭은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나타내는 지표다. 그런 의미에서 반 친구들이 그 아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호칭은 결국 장애였다.

 

그 아이는 개인 사정으로 교실을 떠났고, 학교에는 보통이라고 여겨지는 아이들만 남았다. 하지만 ‘장애’라는 말은 여전히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장애’는 공식적인 인증이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단어였다. 그렇기에 나는 ‘장애’, ‘병신’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왔다.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이 이루어진 교실 속에서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성장했다. 놀림의 대상이 내가 될 땐 불쾌했지만, 그게 아닌 경우엔 외면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아주 간편하게 실제 누군가가 느낄 치욕감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런 나의 이기주의는 중학생이 된 어느 날, 한 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 답변으로 나는 누군가의 이름은 대야 했다. 그런데 순간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고, 나는 이름 대신 ‘장애인’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내가 언급했던 아이는 초등학교부터 알았던 후배로 제대로 걷지 못해 항상 휠체어를 타고 다녔었고 말도 어눌하게 했다. 그래서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면 꽤 높은 집중력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체적인 한계일 뿐, 그 아이의 한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장애인이라는 말로 그 아이의 정체성을 규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내 대답에 상대방은 너무하다는 말과 함께 이름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같이 초등학교도 나온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며 나를 꾸짖었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한 번에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어설프게 변명을 시도해보았지만 상대방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내 말을 무시하고 갈 길을 갔다. 그 순간에도 나는 언급된 아이에 대한 미안함보다 내가 나쁜 아이로 인식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장애인에 대해 무례한 언행을 하는 사람이 교실 안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교실 밖, 텔레비전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화 <말아톤>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을 때,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이 캐릭터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는 국민 유행어였다. 누군가가 초원이를 따라 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브라운관을 통해 그들을 지켜보는 나도 크게 웃었다.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는 애초에 웃기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니까.


초원이 캐릭터가 실존 인물을 모델로 두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모델은 마라토너 배형진으로 영화 속 초원처럼 자폐증을 진단받은 사람이다. 초원이 특유의 행동이 발달장애의 한 증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능에서 따라 할 때만큼은 그 사실을 잊은 채 희화화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장애인처럼 포즈를 취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배우 조승우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일화를 들으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얼마나 무례하게 대하는지 한 번에 알 수 있다. 초원이 성대모사를 따라 하던 사람이나 그것을 보고 웃던 나 역시도 똑같았을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비장애인의 다른 말은 예비 장애인일지도 모른다. 선천적인 장애도 있지만,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장애를 안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비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몇몇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로 인식된다. 나와는 다른 사람, 나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사람. 그러니 마음껏 조롱해도 되는 사람.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러한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다.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랬다며 오래전에 저지른 실수를 합리화해봐도 내 인식의 한계는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최근에도 그런 잘못을 범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몇 개월 전, 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눈에 띄게 키가 아주 작은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에게 걸쳐진 과잠이 그 사람이 우리 학교 학우라는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그때 나는 거기에 시선을 집중한 상태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런 사람도 우리 학교에 다니는구나.’ 그 사람은 내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무렇게 제 갈 길을 걸었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홀로 남겨지자 오래전 느꼈던 부끄러움이 다시 밀려왔다.

 

학교 앞에서 과잠을 입은 사람이 신기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내 시선의 이유는 잔인할 만큼 명확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고 나 자신이 놀라웠다. ‘대체 어떻게 이런 무례한 생각을 할 수 있지?’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해 탑승하면서 계속 그렇게 자문해보았지만,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이름 대신 장애인이라고 지칭했던 중학생 시절에서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식 수준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나는 그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삶의 가능성까지 멋대로 차단해버린 나의 편협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린 소수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 얼마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 채로 살아간다. 희화화와 조롱으로써 약자를 타자화하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도 잊어버린 채 말이다. 초·중·고를 통틀어 ‘장애’나 ‘병신’이란 말을 듣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똑같이 행동한 적은 없지만, 귓가를 울렸던 그 말은 내 안에서 자라 폭력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교실에서 울려 퍼졌던 놀림의 무게를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진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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