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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Sep 12. 2019

한국 힙합, 반성 없는 혐오 어디까지

배제와 종속으로 만들어진 '국힙' 카르텔

 

지난 8월 공개된 힙합 아티스트 사이먼 도미닉의 ‘make her dance’ 뮤직비디오가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한다는 이유로 도마 위에 올랐다. 해당 뮤직비디오는 남성 래퍼가 자신의 재력과 여성 편력을 과시하며 여성의 몸을 소유물처럼 전시하고 자랑하는, 국내 힙합 신에서 이미 수없이 연출된 장면을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한다. 해당 곡이 수록된 앨범 아트 역시 빼입은 아티스트 뒤로 여성들의 다리가 진열된 듯 배치되어 있다. 뮤직비디오에서도, 앨범 아트에서도, 심지어 흘러나오는 노랫말에서도 여성은 남성이라는 전경을 위한 배경으로만 위치된다.


해당 곡에 담긴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이 일자 프로듀서는 자신의 SNS에 ‘조선 시대에서 음악 하기 힘드네’라는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곡에 참여한 아티스트가 무려 네 명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유일한 피드백이었다는 사실은 유명 아티스트인 이들이 힙합 신에서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해봤을 때 문제의식에 대한 무지가 개인이 아닌 커뮤니티 전체의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조선 시대’가 솔직한 성적 암시와 자기 자랑을 소재로 한 예술적 파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뒤떨어진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든, 엄격한 유교적 질서 하에 자유를 통제하는 고지식한 사회를 지적하는 것이든 이는 적절하지 않은 비유다. 이미 힙합 신에 숱하게 등장한 바 있는 관습화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기존의 격식이 깨짐을 뜻하는 파격과는 거리가 멀며, 유능한 남성과 그의 성적 대상이자 소유물로 도구화되는 여성을 이분하는 것이야말로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유교적 질서와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조선 시대를 사는 것인가.


물론 이 아티스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후진적인 젠더 의식은 유독 한국 힙합 신에서 끊임없이, 직접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4~5년 전 문화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 걸쳐 페미니즘이 재부상하며 이제는 주류 예술이 된 힙합 음악에 대해서도 여태껏 인식하지 못했던 혐오에 대한 지각이 시작되었으나, 힙합 내 여성혐오는 놀랍도록 그대로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내로라하는 래퍼들, 그들을 ‘리스펙’하는 신예 래퍼들, 무명 래퍼들의 등용문으로 시작되어 현재는 힙합 신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힙합 서바이벌 ‘쇼미더머니’까지. 모두가 여과 없이 혐오 표현을 뱉어내고 있다.


남성 아티스트들의 명예와 재력에 대한 과시의 수단이 되는 동시에 명예와 재력을 빼앗아가는 천적으로 위치되는 여성들은 이제 모순으로 점철된 혐오의 프레임을 벗어나 주체로서의 목소리를 외친다. 아티스트도, 아티스트의 팬도 여성으로서 힙합 내 혐오 표현에 느끼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돌아오는 피드백은 'Motherfucker만 써도 이젠 혐이라 하는 시대’라는 불평뿐이다.


지금의 힙합은 반성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반성은 힙합이라는 장르적 속성을 방패 삼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거부되기도 하며, 힙합을 둘러싼 음악 외적 상황에 의해 거부되기도 한다. 두 가지 요인은 힙합 신 내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화를 정체시키고 더 나아가서 퇴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힙합 내 혐오 표현은 힙합의 본토인 미국의 그것에서 맥락을 지우고 표현만을 가져온 것에서 시작된다. 미국의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된 힙합은 자신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열악한 생활환경에 대한 불만,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랩을 통해 전방위로 뱉어내는 과정에서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공격한 것이라면, 그 맥락과 무관한 한국의 힙합은 오히려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다는 확실한 인식과 함께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기능으로서의 혐오를 작동한다. 주로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무능한 여성을 비난함으로써, 또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남성 래퍼들의 여성혐오는 경제적인 영역과 보편적인 성 인식에 관련해 실제적인 불평등을 경험하는 여성에 대한 기득권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


미국 힙합의 여성혐오가 인종차별과 빈부격차가 복잡하게 교차된 사회적 배경과 그로 인한 패배감을 바탕으로 한 수평폭력에 가깝다면, 한국 힙합의 여성혐오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단일한 구도 내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수직폭력에 가깝다. 한국의 남성 래퍼들은 흑인 빈민과 다르게 개인적·상황적 약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유일한 어려움인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밑바닥 생활’은 정체가 요원하고 빈곤과 차별로 인한 실제적인 어려움에는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한국 여성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처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성은 물론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이 겪는 실제적인 문제와도 지극히 유리되어 있다.

 

 

힙합의 반성 없는 혐오는 힙합을 둘러싼 음악 외적 상황에 의해서도 가속된다. 힙합의 대중화를 이끌며 현재는 국내 힙합 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쇼미더머니’에서는 혐오 표현이 경쟁 속 자신의 공격력을 강화하는 무기의 역할로서 정당화되는데, ‘삐’ 소리가 난무하는 랩이 끝나면 당락을 결정하는 (대부분이 남성인) 프로듀서에게 90도로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래퍼들의 모습이 그들의 혐오가 갖는 모순을 실감케 한다. 힙합에는 위아래가 없다는 것처럼 솔직한 (혐오)표현을 하면서도 선택하는 자와 선택받는 자 간 상하 관계는 절대적인 것처럼 유지되고 심지어는 거기에 스스로 종속된다. 배척과 종속의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카르텔의 형성이다.


한국의 ‘형·동생’ 문화와 미묘하게 혼합된 ‘크루’ 문화가 남성 카르텔을 이루는 동안 방송사는 여성 래퍼를 성실하게 배제했다. ‘쇼미더머니’의 남성 프로듀서는 여성 래퍼에게 ‘외모에 신경 좀 쓰지 마시고 래퍼면 랩부터 하세요’라는 조언을 건넸고, 제작진은 ‘디스전’을 벌인 적이 있는 두 여성 래퍼를 그들의 커리어와 실력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살벌한 기 싸움의 주인공으로만 비췄으며, ‘고등래퍼’는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두 래퍼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듯한 연출을 의도적으로 반복하여 내보냈다. ‘언프리티 랩스타’는 수많은 여성 래퍼를 단순히 기 싸움을 위한 캐릭터로 도구화했고 그들의 랩을 남성 프로듀서들에게 평가받게 했다.

   

 

현재 힙합 신은 내부적인 반성도 부재한 데다 마찬가지로 반성하지 않는 방송사라는 거대 자본의 비호와 함께 기득권적 카르텔을 구축하고 있는, 그야말로 ‘고인 물’ 상태다. 본토 힙합의 거친 표현과 솔직한 자랑이 문화로서 참작되었던 이유는 그것이 체제에 대한 균열로 기능한 맥락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 힙합의 남성 카르텔은 체제가 무너지지 않게 똘똘 뭉쳐 오히려 이에 균열을 내려는 자를 걷어내고 있는 형국이다.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한 프로듀서는 새롭지 않으면 누구든 쫓아낼 수 있는 것이 힙합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쇼미더머니 8’에서 남성 래퍼가 여성 래퍼를 ‘디스’하기 위해 가발을 쓰고 우스꽝스럽게 걸어와 ‘디제이 오빠’라고 말한 것이 4년 전 ‘쇼미더머니 4’에 나온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가사보다 얼마나 더 새로운 것인지 모르겠다. 이미 쫓겨나 있는 대상을 밟고 올라 카르텔을 이루는 자들의 근거 없는 ‘힙부심’에 동의하기 어렵다. 장르 불문, 반성 없는 문화는 퇴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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