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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Oct 02. 2019

그래도 손잡아줄 '언니들이 있다'

그러니 지치지 않기를, 한 발짝 나아가기를

   

이 책은 그 인터뷰 중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이 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골라 담은 것이다. 세상은, 사회는 여자이기에 약자로 취급했고, 소수자로 봤으며, 배제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그들은 ‘다르게 살기’로 맞섰다. 그들이 삶의 우여곡절과 고비, 세상의 유리천장에 어떻게 응수했는지가 담긴 인생 실전이다.

- 10페이지

 

어렸을 적 부모님에게 ‘언니를 낳아 달라’며 떼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여동생도 남동생도 아닌 언니를 요구하던 어린애의 투정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친구들이 언니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게 너무나 부러웠다. 언니랑 싸웠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것조차 부러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언니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저와 비슷한 삶을 공유할 인생 선배가 태어날 적부터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언니가 있다고 해서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처음부터 언니가 없었던 나는 언니에 대한 큰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한 발짝 앞서서 길을 걷는, 친구 같은 선배. 내 안의 언니는 이런 이미지였다.

 

 

 

책 ‘언니들이 있다’는 여성 최초 제일기획 부사장에 오른 언니부터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스포츠 역사에 기록한 언니까지, 현 시대 여성들의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르고 연고도 없지만 성별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의 문장 하나하나가 진심으로 다가온다는 게 말이다. 자기계발서 종류의 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였지만 이 책 속 언니들의 충고와 경험 어린 조언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것 같았다.

 

아직도 입사하고 나서 대학 사은회에 가서 제가 한 말이 생각나요. 일어서서 한마디 하라고 하기에 이렇게 얘기했죠. “회사에서 나를 ‘미스 최’라고 부른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데도 에너지가 들어가니 나를 그냥 미스 최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나를 ‘최인아’라고 불러달라고 하지 않는다. 여성학에서 배운 대로 하면 싸워야 하는데 나는 소수민족이라 내가 함께 일하는 남자들을 적으로 돌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우선 그들이 나를 인정하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고 그 에너지를 모아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삼성그룹 계열사 최초의 공채 출신 여성 임원 언니, 최인아다. 능력과 열정, 그리고 집념으로 최고의 커리어를 쌓은 뒤 이제는 선릉에 책방을 차렸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인생, 소설 같은 삶이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그러나 현실 앞에서 흩어버리고 그냥 ‘평범하게만 살자.’ 하며 고개를 내저었을 꿈이 아닐까 싶다. 분야에서 최고임을 증명하고는 멋지게 매듭짓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나가는 삶. 쉽게 꾸지만 쉽게 이룰 수는 없는 꿈같은 인생이다.


‘돈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라는 질문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이런저런 유혹에 시달릴 때마다 떠올리라던 질문이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데, 자꾸만 부수적인 것들에 휘둘려 ‘나’를 놓치기 십상인 현재에 방향키를 잘 잡아줄 질문이었다. 근래 들어 남들이 세운 기준에 자꾸만 나를 얽매고 결국 스트레스를 잔뜩 받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 시기에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어 참으로 감사했다. ‘이게 중요해, 내가 중요해?’ 앞으로 삶이 흐트러질 때 중심을 잡도록 떠올릴 문장이 하나 늘었다.

   

  

완성된 페미니스트란 존재할 수 없어요. 지향을 하는 것이죠. 저 또한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또 제가 지향하는 페미니스트의 상도 계속 변하고 있죠. (...) 나혜석이, 고애신이 말했잖아요? 우린 꽃이 아니라 불꽃이라고. 한 줌 재가 될지언정 후손 여성이 기억할 거라고. 늦더라도, 새 물결로 또 돌아올 거예요.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나영 언니의 말씀이다. 페미니즘은 물결이기에 반동과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그 운동이 착실히 번져나가는 게 바로 지금이 아닐까. ‘82년생 김지영’이 영화화가 된다는 소식에 주연 여성 배우를 향한 비난성 댓글이 줄줄이 달리면서도, 동시에 여성 아이돌이 ‘져버릴 꽃이 되기는 싫다’는 말과 함께 성별 경계를 무너뜨린 무대를 꾸려 환호를 받는 게 바로 지금, 대한민국이다. 공격과 환희, 비난과 지지가 동시에 피어나고 누군가는 그 열띤 논쟁 속에서 고민하며 페미니즘에 다가선다. 이런 과도기를 지나고 있으니 이나영 교수의 ‘완벽한 페미니스트는 없다’는 말이 와 닿을 수밖에.


완벽함을 기준 삼아 자신을 검열하고 다른 여성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간 오늘의 나를 뿌듯해 하는 게 나에겐 더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약간 더 나아가도록 힘을 내는 것. 이런 연대와 힘이 미래의 여성들에게 꽤 큰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경험도 참 지랄 같은 경험을 쌓고 살고 있지만 힘내시고 우리 애기들 모습 잊지 마시고요. 나도 그 모습 안 잊을라고 대중들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내가 가며는 이한열이 어머니 왔다고 하니까요. 그거 간직하려고 30년 동안 대중 속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너무 마음 아프지마는 간직하면서 애기 얼굴 그려가면서 삽시다잉.”

 

나는 보통 책을 지하철에서 읽는 편이다. 하루에 적게는 한두 시간, 많게는 서너 시간까지 지하철에서 보내기 때문에 나에게 지하철은 독서의 공간이다. 하지만 가끔 참 곤란한 상황이 생기곤 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만원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버릴 때.


1987년, 시위에 나섰던 아들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후, 배은심 언니는 거리로 나섰다.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그 세상을 기어코 이루고 말리라, 하는 다짐에서였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로 살기 위해, 그리고 아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어받기 위해 말이다.


세월호 유족 앞에서 배은심 씨가 했던 연설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 ‘힘내시고, 우리 애기들 모습 잊지 마시고요.’ 이 말을 활자로 다시 보니 문득 한 플래카드가 생각났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고 적혀 있던 천막이 떠올랐다.

 

 

그 원통함과 분노, 애상을 가늠하는 것조차 실례일 것만 같아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어딘가 찝찝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언니가 너무 불쌍해서라거나, 이한열 열사가 너무 안타까워서와 같은 피상적 이유는 아니었다. 그런 커다란 절망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 아스팔트 길로 나섰다는 이야기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고였던 것 같다. 너무 대단해서, 그리고 그 감정을 감히 헤아릴 수 없어서 말이다.




책 말미에 저자 김지은 언니의 인상적이었다.

 

‘언니들의 삶이 그랬구나. 그렇다면 나의 삶은? 나는 어떻게 살았나.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고 말이다. 나아가 이 인터뷰집에 담긴 질문들을 제3자가 되어 나에게 던져보는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혹시 아나.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선물을 선사할지도. 인터뷰는 힘이 세니까.

 

맞다. 300페이지 남짓 되는 인터뷰집이 누군가의 인생에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한숨을 쉬던 나에게 이 책 속 활자들이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만 같았다. 언니들의 이야기,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라는 것을 되새기며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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