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언제까지 분노만 하고 있을 것인가
요 며칠 세상이 시끄럽다. 꽤 예전부터 알음알음 알려졌던 텔레그램 N번방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텔레그램 내에서 심각한 수준의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고 유통했던 ‘박사’ 용의자가 체포되면서부터 포털사이트 검색어는 ‘텔레그램 N번방’으로 장악되었다.
버닝썬 게이트로 인해 물 밖으로 드러난 웹하드와 불법 영상물 공유 사이트, 단체 채팅방 등은 한 차례 썰물로 휩쓸려간 듯 했다. 가해자들을 온전히 뿌리 뽑았는지, 한 명도 남김없이 적절한 처벌을 가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그 찜찜함이 텔레그램 N번방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N번방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N번방과 박사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N번방과 박사방은 텔레그램 안에서 가학적인 음란물을 공유하고 생산한다는 점은 같다. 대상 역시 주로 미성년자 여성이라는 것도 공통된다. N번방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1번방, 2번방, 3번방 등 n개의 방(시초는 총 8개)으로 이루어져 있고, 창시자는 ‘갓갓’으로 알려져 있다. N번방과 비슷한 형태의 방 중 ‘박사방’이 있고, 이 방의 핵심인 ‘박사’가 이번에 검거된 것이다.
판단이 미숙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이들의 신상을 약점으로 잡아 피해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동영상을 촬영하도록 지시했다는 점, 그 악행을 26만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이 사건의 충격적인 지점들이다. 사람들은 이토록 극악무도한 범죄가 어떻게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분노했고, 가해 용의자 ‘박사’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청와대 청원은 170만 명을 돌파한 상황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명확히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인 이수정 교수는 CBS ‘시사자키’ 인터뷰에서 텔레그램 박사와 26만 참여자들에 대한 처벌이 사실상 힘들다고 밝혔다. 현행법상 성착취 범죄를 처벌할 만한 법이 없고, 더더군다나 박사방의 경우 그 영상을 촬영한 사람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또한 온라인상에서 유포된 영상물이기 때문에 이를 명징하게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협박죄, 유포죄, 촬영죄 등을 합해도 징역 7년 정도를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국민청원 1호법이라고 불리우는 일명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N번방과 박사방 가담자를 처벌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죄명이 들어맞는 법안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현재 법안에서는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즉 형량을 가감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현재로서 N번방 가담자들은 그저 ‘음란물을 소유한 사람’ 혹은 ‘음란물을 시청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본질로 돌아와 보자. N번방 및 박사방의 영상은 일반적인 포르노와 같다고 할 수 있나? N번방과 박사방의 중심인 갓갓, 박사의 죄는 협박죄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나? 과연 이러한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자신할 수 있나?
답은 하나다. 법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처벌이 힘들면 처벌할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먼 길이지만 맞는 길이고, 어려운 길이지만 가야할 길이다. 버닝썬과 다크웹이 물 밑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무력감을 다시 느껴서는 안 된다.
현재 주식회사 ‘화난 사람들’에서 ‘디지털 성범죄 처벌 국민의견’을 수렴하는 중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2020년 상반기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국민여론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더욱 다양한 의견을 모으기 위해 법무법인 숭인의 김영미 변호사가 ‘화난 사람들’에서 국민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3월 21일 기준 참여자 수는 3,200여 명에 달한다. 많은 숫자이나 아직 갈 수 있는 길은 더 많이 남아있다.
맞다. 대한민국 2,600만 남성들이 전부 N번방과 박사방에 들락거렸던 것은 아니다. 물론 N번방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지만, N번방 내부에 여성 이용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확언할 근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강력 성범죄 피해자의 86%는 여성이지만, 여성 가해자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가해자의 성별을 알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여성 성범죄 가해자가 존재할 수 있다.
이제 다시 한 번 본질로 돌아와 보자. 지뢰가 깔린 장소에 출입을 왜 통제하는 것일지, 지뢰가 존재하는 면적보다 안전한 면적이 훨씬 넓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지뢰가 있는 구역에 발을 들이밀지 않는 것일지. 확률상으로는 매우 적을지 몰라도 그 대상이 내가 된다면 피해 확률은 100%로 치솟는다. 하물며 강력 범죄 피해자의 약 86%가 여성이라면 이들의 공포와 분노는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일부는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니 괜한 일반화로 죄 없는 남성까지 비난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또 일부는 ‘이 사건은 남녀 관계를 떠나서 매우 엄중한 사안이니 이런 문제에까지 남녀 갈등을 끌고 오지 말라’고 훈계한다. 참으로 중립적이고 도덕적인 바른말이다.
흥미롭게도 단 두 문장에서조차 우리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읽을 수 있다. 미성년자 여성들이 잔혹하게 성 착취를 당하고, 그 과정을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망했다는 사실보다 ‘남성들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참여자가 26만이 아니라 1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참여자 수가 단 한 명이었다고 해도 이 사건은 재판에 올라 마땅한 범죄다.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고, 자신이 텔레그램 N번방 이용자가 아니라면 여성들과 함께 분노하면 그만이다. 청원에 참여하고, 처벌기준 마련에 힘을 쏟으면 된다. 사람으로서 할 일은 그것뿐이다.
남녀관계, 남녀문제, 라는 말 역시 흥미롭다. 성별갈등이라는 말을 놔두고 꼭 ‘남녀’갈등이라는 언어를 선택하는 무의식이 바로 여성혐오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여성에게 가해진 성범죄’와 같은 강한 워딩보다 ‘갈등’, ‘관계’와 같은 나이브한 워딩을 택하는 것 역시 이 사건에서 한 발 물러나고자 하는 비겁한 중립이 아닐까.
이 문장은 어딘가 슬프다. 나 역시 성범죄 관련 청원을 할 때나, 성범죄 기사를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드는 생각이 ‘또 안 되겠지’이다. 성공보다 실패를, 해결보다 미해결을 많이 봐 온 탓에 나도 모르게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버닝썬 게이트를 지나오며 굉장히 큰 분노와 무기력을 느꼈다. 분명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지나치게 차분했고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 여성이 가해자인 사건은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고 굉장히 강력한 처벌이 내려지는 동안, 수많은 남성 가해자들은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가하고, 이를 영상으로 지켜본 사람들조차 벌금 100만 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정도의 처벌만 받았을 뿐이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 다른 나라들의 성범죄 처벌과 우리나라의 성범죄 처벌 수위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문제제기는 언제나 존재했다. 실제로 법안도 여러 번 개정되었다. 그리고 법과 제도는 사회적 약속이기도 하므로 단시간에 파격적으로 개정하는 것은 수십 년 간 국가와 국민 간 쌓아 온 신뢰와 약속을 단번에 뒤엎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동안 N번방이 자랐다. 버닝썬은 사라졌고 ‘10개월 아기가 성폭행 당했습니다’와 같은 제목의 청원이 수십 건 올라온다. ‘박사’는 박사방 사람들과 ‘강간하자’, ‘그루밍해주자’며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N번방이 자라는 과정에서, 버닝썬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박사방이 커가는 과정에서 과연 우리의 무관심과 무기력의 책임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 ‘이번에도 안 될 거야’라며 넘어간 사람의 수가 오천만이라면, 그 사건은 사라지게 된다.
N번방과 박사방이 또 흐지부지 사라진다면, 이것은 허용의 시그널로 남을 것이다. 벌써부터 N번방 연관 검색어에는 ‘텔레그램 탈퇴’, ‘N번방 영상’, ‘N번방 연예인’ 등 낯부끄러운 단어가 상당하다. 만약 N번방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사건은 제2의 N번방을 독려하는 광고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할 일은 간명하다. 법안이 없으니 만들어야 하고, 성별갈등이 아닌 여성 대상 성범죄라는 사실을 공고히 하고, 무기력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간단하지만 절대 쉬운 길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으니 노력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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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경찰청 범죄 통계
국민일보, '국회 청원 1호 ‘N번방 방지법’은 왜 졸속 논란에 휘말렸나 [정리뉴스]'
국민일보, '[n번방 추적기]' 특집 기사
노컷뉴스, '이수정 "텔레그램 박사, 엄중 처벌 어려워…죄명이 없다"'
한겨레, '[단독] 앞에선 학보사 기자…n번방 ‘박사’ 두 얼굴 공범들도 몰랐다'
주식회사 '화난 사람들'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