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사람들은 인간적이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80이 넘은 나이로 영국에서 가장 좌파적인 영화감독으로 알려져있는 켄 로치의 눈빛을 본 순간 오래전 읽었던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노르웨이의 소설가인 칼 오베 크네우스고르(Karl Ove Knausgård)는 자전적 소설인 《나의 투쟁》에서 사람의 눈빛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있다.
얼굴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눈밖에 없다. 눈은 우리가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한결같이 빛을 머금고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눈동자 속의 핏줄은 더욱 굵어지고 선명해질 것이며 점막은 힘을 잃고 시들시들해지겠지만, 눈빛은 변하지 않는다.
켄 로치는 아일랜드의 독립과 내전의 역사와 아픔을 담은 보리밭은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2016년에는 영국의 복지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로 두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계급문제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파고들며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낸 그는 끊임없이 국영방송 및 보수언론, 정부와 부딪혀야 했다.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려 상업광고를 찍기도 했었는데, 특히 맥도날드 광고를 찍은 게 노동자들을 배신하는 일이었다며 아직도 후회한다고 한다.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2019) 는 켄 로치 감독의 가장 최근작으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만으로 가족들과의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음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강도높은 노동활동으로 잃게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리키(Ricky)는 택배기사 일을 시작한다. 아내인 애비(Abbie)의 차를 팔아 밴을 사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리키는 화장실 갈 시간도 확보되지 않는, 하루 12-14시간의 노동을 휴일없이 해내야 하는 새로운 의미의 노동 착취 현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내인 애비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케어해주는 일을 하는데, 차가 없어 버스로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 집을 방문하면서도 늘어난 노동시간에 대한 추가급여는 받지 못한다. 개인적인 사정이 용납되지 않는 불안한 노동의 연장으로 리키와 애비가 지쳐가는 동안 그의 자녀 세브와 라이자는 방치된다.
어느날과 같이 리키가 택배 배송을 하다가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빈 페트병에 볼일을 보던 중 갑자기 청년 몇명이 다가오더니 리키를 폭행하고 택배 배송 위치추적기를 부수고, 택배를 훔쳐 달아난다.
눈을 못뜨고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로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리키에게, 택배회사 매니저가 전화를 건다. 분실된 택배 중 여권이 있으니 물어내야 하고 부서진 위치추적기를 배상해야 하고, 대체기사를 구하라는 전화였다. 택배회사에서 기사들에게 당신은 자영업자라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거라고 말하며 회사와 택배기사의 동등함, 택배기사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처럼 말하던 것들이 사실은 택배회사의 책임회피를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통화내용을 들은 애비는 리키에게서 전화를 빼앗아 회사 매니저에게 욕을 퍼붓는다. 사람이 다쳤는데 배상하라는 말이 나오냐고, 당신들을 위해서 일하는데 자영업자라는 소리가 가당키나 하냐고. 애비라는 캐릭터는 추가 수당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케어하고 모두에게 친절하며 가족들에게도 큰소리를 내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담아두고 눌러왔던 감정들이 너무도 비인간적인 통화내용으로 인해 폭발하게 되는데, 통화를 끊은 애비는 병원에 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본인이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한다. 인간적인 사람들은 인간적이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비인간적인 사람들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괴롭지 않다.
애비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리키는 다음날도 출근준비를 한다. 오늘 일을 나가지 않으면 벌점이 더 쌓이고, 회사에 배상할 돈이 더 많아지고, 어제 사고로 인해 회사에 갚아야 할 돈이 그대로 빚이 된다. 팔과 손에는 붕대를 감고 한쪽 눈은 아직 떠지지 않지만 차키를 챙겨 집을 나선다. 차에 올라 출발하려는데 아들과 아내가 따라나와 제발 가지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막는다. 한쪽 팔은 잘 움직여지지 않고 한쪽 눈은 보이지 않지만 리키는 두 사람을 뿌리치고 일터로 나간다.
켄 로치는 건조하게 리얼리티를 담아낸다. 잘생기고 예쁜 주인공이 아닌, 극중 역할에 충분히 공감하고 흡수할 수 있는 비전문 연기자를 캐스팅하기로 유명하다. 리키 역을 맡은 배우 또한 연기 경력이 많지 않고 건설회사 노동일과 배관공 일을 오래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주변에 있을법한 배우들이 과장되지 않게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리얼리티가 더 돋보인다.
예술이 정치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예술이 정치적 성향을 띠면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무기로 쓰여지기도 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작품에 의도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면 작품의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의 기능 중 하나를 '기록'이라고 봤을 때(예술의 목적이 '주술'이었을때도 있었는데, '기록'은 안될 이유가 뭔가?), 켄 로치의 영화들은 우리가 현재 살고있는 사회의 문제점과 몇몇 사람들은 그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고민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