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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Dec 01. 2020

하와이에서 아침마다 와플 굽는 여자

호스텔에서 와플을 구우며 만난 사람들과 삶의 의미

코미디언을 하던 시절, 언젠가부터 '일이 안 풀려도 되게 안 풀리네' 싶어 지는 시점이 있었다. 누구도 나에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하면 잘 될지 말해줄 수 없었다. 가까운 동료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그저 많이 안타까워했었는데 그중에는 나와 함께 '문화살롱'을 하였던 정경미 언니도 있었다. 언니는 나에게 늘 희망과 기회를 주는 사람이었다. 나를 위한 기도도 참 많이 해주던 언니 었다. 어느 날 그날도 아마 새로운 코너를 심사받고 좋지 않은 결과로 낙담했던 기억이 난다. 언니는 그런 나에게 방송국 앞 카페에서 차를 한 잔 사줬었다.


"언니. 나는 개그맨이 된 지 10년 된 해에 내가 원하는 만큼 잘 되지 않는다면 그만둘 거야. 그때도 안 된다면 더이상 개그맨은 내 삶에 의미가 없을거 같아.”


그런 나의 말을 듣고 안타까워하던 언니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난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렇게 개그맨이 된 지 10년이 지났을 때 나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나의 다짐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하였다. 다행히도 그 무렵 좋은 기회를 얻어 작가라는 직업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작가라는 직업을 하는 동안 난 늘 괴로우면서도 행복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작가라는 직업은 참 섹시한 직업이었다. 개그맨은 방송에서 전면승부를 하는 일이라면 작가는 뒤에서 상황을 조종하고 그림을 만들어 가는 일을 하는 것인데 나는 그게 엄청 매력 있었다. 누군가를 키워내는 것에 희열도 느낄 수 있었고, 내가 만든 이야기를 잘난 사람들이 연기해주는데서 오는 쾌감도 있었다. 가끔 연예인 선배 앞에서와 작가 앞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연예인들과 매니저들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나랑 연예인 대 연예인으로 만났으면 절대 안 이랬을 텐데' 싶었고 그런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방송에서 일이 잘 풀리는가 싶다가도 잘 풀리지를 않았다.)


작가를 하는 동안 내 머리, 가슴 그리고 똥구멍은 늘 깨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똥구멍이 깨어있다는 표현이 약간 저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산책을 나가면 흥겨워서 응가가 마려운 강아지 마냥 늘 신선한 아이디어를 만들고 싶어 흥분이 되어 엉덩이가 들썩 거렸다는 표현을 솔직하게 하고 싶었다.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난 하루 종일 켜놓은 컴퓨터 마냥 내 몸에 온갖 감각들이 풀가동을 하며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영감을 찾아 킁킁거렸는데 그런 스스로가 참 멋졌다. 그런데 이 작가라는 직업도 개그맨 못지않게 서열과 연줄이라는 것이 대단했다. 개그맨으로 활동하던 당시 작가들과 함께 일을 하며 방송을 만들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도 바로 옆에 있는 작가들의 실제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던 게 참 아이러니한데, 하여간 작가란 직업은 실력이 좋다고 하루아침에 '스타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연차가 낮으면 낮을수록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작가라는 직업은 메인이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 도를 갈고닦듯, 쌓아야 할 많은 덕목과 연마해야 할 많은 기술이.... 그냥 쉽게 말해 박봉에 겁나 힘든 직업이다! 실력은 기본! 필요하다면 감정노동까지도 수려하게 해야 하는 엄청난 직업이므로 방송과 연예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작가를 하던 시절 박봉으로 정말 열심히 일을 하는데 시청률도 안 나오고 출연자들이 스트레스를 주는 날이면 가끔 현타가 왔는데 그때마다 난 과연 이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가 의문스러웠다. 그런 날에는 난 지인 작가와 함께 귀갓길에 순댓국집에 들러 국밥 한 그릇과 자몽에 이슬을 한 잔 (주량이 세지는 않아서)을 마시는 낭만을 즐기곤 하였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 일이냔 말이다! 난 있지 이 일 잠깐 쉬고 하와이 호스텔에서 접시 닦으면서 살고 싶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였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난 정말 말한 대로 되어 있었다. 하와이에서 접시를 닦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하와이에서 와플 굽는 일'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이 호스텔 사장 오빠를 졸라 무급 봉사로 일하게 되었다.


나의 근무 시간은 월요일 금요일 오전 5시 30분부터 8시 까지였다. 무급 봉사였지만 난 내가 하는 일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고자 와이키키의 기념품 가게에서 하와이안 셔츠 한 장을 샀다.

' 이 옷을 입고 전문가처럼 와플을 굽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게! '


새벽 5시에 알람을 맞혀 놓고 잠이 들었지만 내 몸은 늘 5시 10분 전이면 깨어났다. 너무 설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어떤 투숙객을 만날지 기대가 되었다. 해가 뜨지도 않은 와이키키는 코발트블루 빛깔이었다. 한낮의 쨍한 태양이 마스코트인 와이키키의 새벽은 바닷속 깊숙한 곳처럼 차갑고 깜깜했다. 활기찬 관광객들이 가득하던 그 자리는 새벽이슬로 가득하였다. 나는 그 새벽을 음미하며 호스텔 부엌으로 향했다.


"고은 씨 왔어요?"


나보다 더 먼저 출근해 호스텔을 지키고 있던 사장 오빠였다. 나는 사장 오빠와 함께 조식 서비스를 준비하였다. 하루 종일 와이키키를 누비며 열심히 놀기 위해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할 투숙객들에게 제공해야 할 식빵과 쨈, 버터, 오트밀, 티 등등을 비어있던 호스텔 부엌에 세팅하기 시작하자 텅텅 빈 공간에 온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하와이 여행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일상을 묵묵히 살아왔을 여행객들에게 조식을 제공한다는 일은 의미 있는 일 같았다. 투숙객 90프로가 서양인이었지만 나의 부족한 언어는 큰 어려움이 되진 않았다. 어차피 부엌을 찾는 투숙객들의 입은 하나요 그 입은 먹기 위해 바쁘니 말이다.


호스텔에서 일을 하면서 여러 군상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투숙객들의 표정은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 큰 어른들의 얼굴에서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흥분감과 기쁨을 본적이 얼마만이었던가 싶었다. 어떤 사람은 첫날부터 자신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수다스럽게 늘어놓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수줍은 고양이 같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와플을 구워주면서 누릴 수 있는 묘미였다.


나는 와플을 구우면서 미소의 힘에 대해서 배웠다. 처음엔 쭈뼛쭈뼛 다가오던 사람들도 미소 앞에서는 무장해제되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왔던 사람도 웃으면서 건네는 따뜻한 와플 앞에서 '너무 맛있어요'라는 말을 수줍게 건네고 돌아가곤 하였다.


나는 투숙객들 사이에서 성실하게 맛있는 와플을 굽는 사람이란 소문이 났다. 호스텔 사장 오빠는 내게 '팁 통을 옆에 두고 와플을 구워봐라'라고 말했지만 난 손사래를 치며 '투숙객들에게 부담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저 내가 하는 일을 더 의미 있게 하고 싶어 여행객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웃은 것뿐인데, 팁 통을 옆에 두면 가식적으로 보일 거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식 서비스를 하는 것이 재밌었다. 내가 만든 와플이 투숙객의 아침과 몸을 깨워준다는 사실도 너무 의미 있었고 다들 맛있다고 엄지를 척 세워주니 조식 시간에 대한 나의 열정은 조금씩 더 커져만 갔다. 와플에 초콜릿 가루를 넣어도 보고, 꿀도 넣어보는 등 차별된 레시피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반응이 바로바로 오자 흥이나 이번에는 좋은 음악을 틀어보자는 생각을 하였다. 나의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동원하여 활기를 줄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 틀기 시작했다. 음악까지 갖춰지자 사람들의 더욱 생동감 있어졌다. 와플이 구워지는 동안 침묵으로 기다리던 사람들도 음악과 함께하니 흥얼흥얼 거리기도 하고, 함께 놀러 온 커플은 음악을 들으며 키스를 하기도 하였으며, 간단한 목례 정도만 하던 투숙객들도 내게 다가와


"이 노래 좋은데?"

라는 말을 건네며  더 적극적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 또한 문법도 맞지 않은 짧은 영어 실력이었지만 내가 튼 음악으로 한껏 들뜬 사람들을 보니 신이나 스몰토크를 주고받았다. 영어를 잘 못해도 여행지라는 특성상 크게 불편하거나 좌절할 일은 없었다. 모두들 '알게 뭐냐! 나는 행복하고 여기는 하와이다!'라는 식으로 쉽게 넘어가 줬다. 심지어는 서툰 영어로 용감하게 말을 하는 나에게 '영어를 잘한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음악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였다. 낯선 곳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신나는 노래를 듣거나, 본인이 좋아하던 음악이 갑자기 흘러나오면 오그라 들었던 마음도 활짝 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음악이 사람을 너무 가깝게 만들어 줘 난감한 상황과 직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음! 이 노래 좋은데?"


어느 날 한 독일 투숙객이 노래가 좋다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바나나 팬케이크'라는 노래 알아?"

"아니?"

"'잭 존슨'의 노래인데 그 사람이 이번 주에 와이키키에서 콘서트를 열어! 내가 한 번 들려줄게"


그는 굳이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직접 찾아 틀어주었다.


"아! 이 노래! 나도 들어 본 적 있어!"


그렇게 그와 나는 목례만 하던 사이에서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살면서 만나 본 적 없는 캐릭터였다. 선생님이 직업이라는 그는 키가 압도적으로 컸고 적극적인 성격의 남성이었다. 아침마다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대하여 품평을 하던 그는 어느 날 본인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며 나의 번호도 알려달라고 하였다.


"난다 뭐해?"


번호를 교환한 그날 밤 그에게서 온 문자였다.


"나는 호스텔 안내 데스크에 정보 업데이트 할거 만들고 있어."


당시 호스텔 사장 오빠가 부탁한 일이 있었다. 여행객들에게 하와이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게시물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나는 그 게시물을 만드느라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나 지금 외로워. 같이 방을 쓰는 친구가 오늘 안 들어온다는데 내 방으로 올래?"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서양사람들은 다 이런 식인가?


"미안해. 난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야. 조만간 이웃섬으로 놀러 간댔지 그곳에서 너와 성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나의 마음을 담은 문자를 작성해 보냈다.


"아. 깜짝 놀랐네. 휴...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문자를 보내 놓고 호스텔 안내 데스크로 가 게시물을 부착하고 있었다.


"난다!"


'으악!' 그 독일 남성이었다. 그 남성은 내가 일이 끝날 때까지 괜히 내 주위를 서성이며 야릇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선을 회피하고 일을 마무리하느라 등골이 다 오싹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나에게 어쩌라는 것인지... 내가 그의 행동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정말 심심해서 '브루마불'게임을 하자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조차 너무 싫었다.


"잘 자!"


일을 다 마친 나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쌩하니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조식 시간에 마주친 그는 전과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이 변해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을지 섭섭할 지경이다. 래도 와플 맛은 좋았는지 와플은 엄청 먹었다.


그 외에도 조식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되려 알려 주었다.

하루는 조식 서비스를 열자마자 이른 시간 휠체어를 탄 두 명의 신사가 들어왔다.

"$(%&(@#%ㅖ&^(ㅖ#@%"4"


알 수 없는 언어를 당당하게 구사하던 두 남성은 이태리에서 온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둘 다 밝은 표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특이점은 절대로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본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였다.


"@!#($&(%@$&(#&%#"

영화에서 볼 법한 제스처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특징이 이었다. 본인들이 무언가를 요구할 때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오히려 답답해하며 제스처를 사용해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받아내던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매년 와이키키에서 열리는 '장애인 서핑대회'에 출전하고자 하와이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활기 넘치고 표현력이 넘치는 그들을 만나면 나도 덩달아 목소리도 커지고 기분도 유쾌해졌었다.


하루는 그들이 호스텔 사장 오빠에게 여느 때와 같이 큰 목소리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대화가 끝날 때를 기다려 사장 오빠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었는지 물었다.


"아. 호스텔 구조가 휠체어 타는 사람들에게 불편하다고요. 턱 있는 곳에 비탈을 만들어 달라고 그러네요?"


5일 정도 머무르는 그들이었지만 아파트 입주자처럼 당당하게 장애인으로서의 권리에 대하여 요구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어느 날 그들이 조식을 찾아왔을 때 그들의 눈빛은 지쳐 보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서핑대회가 끝났다고 하였다. 그들은 상당히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와이키키를 떠났다. 장애를 이기고 서핑을 즐기던 그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특히 나의 와플도 아주 당당하게 많이 많이 요구하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당당함이라면 빠지지 않을 또 다른 투숙객도 있었다. 그는 거의 2달 가까이 호스텔에서 머물며 비행기 조종 수업을 받는다고 하였다. 원래는 시카고의 한 유명 증권회사에서 일하던 인재였는데 어느 날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다닌다고 하였다. 동양계 미국인이던 그는 원피스 주인공처럼 밀짚모자를 쓰고 수영 팬츠만 입고 돌아다녔다.


"와플 원해?"

"아니! 난 이 티 한잔이면 충분해! 하하."


군살 하나 없는 그는 단출한 차림처럼 조식도 티 한잔만 마시면 끝이었다. 항상 웃고 심각해 보이는 구석이 없어 보여 친해지고 싶었지만 친해질 틈을 찾을 수 없는 친구였다. 와플이라도 맛있게 먹어준다면 친해질 수 있었을 거 같은데 한사코 나의 와플을 거절하였다.


하루는 매일 수영 팬츠만 입고 다니는 그에게 놀리는 듯 장난식으로 물었다.


"너는 왜 맨날 바지만 입어?"

"빨래 값이 아까워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가 멋있어 보였다. 사실 여행지에서 빨래를 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빨래 값도 아깝고 시간도 걸리니 말이다. 남의 눈치 안 보고 빨래 값이 아깝다며 수영 팬츠만 입고 다니는 그가 멋졌다. 그리고 부러웠다. 여자들도 수영 팬츠만 입고 다닐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투숙객들은 가뭄에 콩 나듯 만났던 한국 투숙객들이었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녘에 일어나 조식을 준비하고 있던 나의 뒤통수에 대고 누군가가 한 말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동양계 여성분이 서있었다.

"아. 네! 한국분이셨군요!"


'아! 이 여성!!' 며칠 전부터 조식 시간에 본 적이 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 곳은 각국 여행객들이 모이는 하와이인지라 동양계라고 무조건 '알 유 코리안?'이라고 물을 수가 없었다. 난 솔직히 조식 때 몇 번 만났던 그 여성이 중국계 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사람이었구나!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너무 반가웠던 우리는 만난 지 몇 분도 안 돼서 어디서 왔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후루룩 쏟아내듯 말하고 있었다.


"조식 시간에 엄청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 보고 감동했어요. 살짝 휴대폰 보니까 한국 면허증이 보이는 거 같아서 한국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언니! 오늘 저랑 저녁 같이 먹어요!"


그녀와 나는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하였는데 며칠간 고생을 해서 그런지 난생처음으로 알람을 오전 6시로 맞추고 잠을 자다가 약속시간 1시간이나 지나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아이고 너무 미안해요..."

"괜찮아요. 언니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늦어서 미안하다는 나의 사과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한국에서 의대생이던 그녀는 하와이에 학회가 있어서 잠시 들렀다고 하였다. 그녀와 나는 와이키키가 보이는 유명한 팬케익 집에 가서 팬케익을 나눠 먹었다. 식사를 하는 거의 2시간 동안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깊은 이야기, 상처 받은 옛 연애사 등등 서로의 치부까지도 나누게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와이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하와이는 그런 곳이었다. 아름다운 하와이에서라면 어떤 심각한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낯선이 와 나눌 수 있었다.

또 다른 한국인과의 만남은 나와 동갑내기 선생님들이었다. 이번에는 조식에 함께 온 그녀들이 서로 차근차근 한국말을 하는 것을 내가 먼저 듣게 되었다.


"어머! 한국 분이세요?"


그렇게 한국인이라는 공통분모로 그녀들과 나는 그녀들이 묵는 3일의 시간 동안 가까워졌다. 내가 학창 시절에 보던 선생님들을 이렇게 친구의 입장에서 만나게 되다니 신기했다. 왠지 선생님이라면 반듯하고 고딕 체적인 그런 느낌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 선생님들은 너무도 캐주얼하고 한국 승무원들 만큼이나 뛰어나고 반듯한 미모를 뽐내고 있어 선생님이란 말에 놀랐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우리는 하와이의 하늘빛에 홀려 저 깊숙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까지 남김없이 나눠 버리고야 말았다.

그녀들은 선생님이 학생을 챙겨주듯 나를 따스하게 챙겨 주었는데 한식이 고팠던 내게 본인들이 가져온 귀한 한식을 나눠주곤 하였다. 몇 시까지 루프탑으로 나오라고 하여 올라가 보면 순두부찌개, 육개장 등 본인들이 먹느라고 바리바리 싸 온 음식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고은 씨! 저희 내일이 와이키키 마지막 날이라서 호텔로 가거든요. 저희랑 같이 호텔 수영장 가요! 놀러 오세요!"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정을 쌓았던지라 헤어짐이 아쉬웠던 참인데 그녀들이 여행의 마지막 날 기분을 내고자 묵게 됐던 비싼 호텔로 나를 초대한 것이다. 그녀들 덕분에 나는 호캉스를 즐기게 되었다. 함께 사진도 찍고 함께 맛난 음식도 먹으면서 그녀들의 하와이 마지막 밤에 초대받은 나는 기쁨과 아쉬움이 가득하였다.


"고은 씨. 우리 한국에서 꼭 다시 만나요. 그리고 와플 열심히 굽는 모습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그녀들과의 이별을 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날따라 하와이의 하늘은 슬퍼 보였다. 학원을 마치고 허전한 맘으로 그녀들이 떠난 호스텔로 돌아온 나에게 호스텔 사장 오빠가 말했다.


"고은 씨. 어떤 분들이 이거 맡겨두고 갔는데요?"


그녀들이었다. 쇼핑백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열어본 쇼핑백 안에는 그녀들이 사용하려고 가져왔던 응급 약품과 마스크팩 등 내가 요긴하게 사용할만한 것들을 두고 간 것이다. 그 안에는 쪽지도 있었는데 그 쪽지에는 부담스러워할까 봐 몰래 두고 간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호스텔에서 와플을 굽는 시간들이야 말로 내 인생에서 정말 의미 있던 시간이었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기쁨이 더욱 의미 있을 수 있던 이유는 대가 없이 베풀 수 있는 호의였기 때문인 거 같다. 애초에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깔려 있으니 난 기대할 것도 없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했던 것인데 그런 '무기대' 속에서 받았던 호의가 참 의미 있었다. 결국 내가 원하던 ‘의미 있는 삶'이란 명성,인기,물질적인 것을 뛰어넘는 일종의 교감이 주는 선물인 것 같다. 더불어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은 만나며 인간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도 한 의미하였다. 의미는 결국 쌍방에서 이뤄낼 수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생각난다. 신나는 맘으로 아침마다 와플을 굽고 있던 내게 진하게, 혹은 수줍게 건네던 사람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 그저 '고맙다'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면 나는 고맙다는 말을 공기처럼 하고 다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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