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강의를 내려놓자 벌어진 일
무기력한 사람은 무기력한 사람이 눈에 더욱 잘 띈다. 무기력한 교사는 학생의 시선을 피해 아무리 허공에 눈을 갖다 대도, 무기력한 학생을 마주칠 때면 어쩔 줄 몰랐다. 절망의 늪을 헤매던 당시, 아이들의 초점 없는 눈에 질린 나는, 그동안 꾸역꾸역 진행해온 강의를... 내려놓았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제안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 대해서 수업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말이야. 너네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한 달간 선생님 수업 시간을 이용해서 진짜 하고 싶은 거 해볼래? 시간 및 공간이라는 한계는 있겠지만 말이야."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수능 기간으로 괜히 어수선한 고2를 대상으로, 10월 말부터 11월 말까지의 기한을 잡고 약 한 달(10차시) 간 진행해봤다. 그래도 교사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어야 하니, 학습지(프로젝트 과정 메모 학습지)를 준비하여 차시가 끝날 때마다 확인 도장을 찍었고, 이것은 수행평가 포트폴리오 점수로 환산하여 반영했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과 발표 결과물은 생기부 세특에 반영한다고도 말했다.
내가 학생이라면 어떤 한 달 프로젝트를 진행할까? 아래와 같이 예시를 써서 PPT를 준비했다.
(교사가 떠들어대지 않는다는데) 학생들도 흥미 있어하는 눈치였다. 휴, 다행이다.
먼저 모둠을 구성했다.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산출해냈다. 3차시가 넘어가니 윤곽이 잡혔다.
똑똑한 학생들은 본인 진로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스스로 기획하여 10시간을 가득 채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XX책 완독 프로젝트
YY다큐멘터리에 드러난 미술작품 소개 프로젝트
청년 경찰 프로젝트
입시체육 영상제작 프로젝트
클레이 인체 조형 제작 프로젝트
연영과 수시 6관왕 프로젝트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 순수하게 본인 취미를 살린 프로젝트도 있었다.
ZZ공모전 출품 대상 받기 프로젝트
그림책 제작 프로젝트
OO고등학생 ‘하트 시그널’ 개최 프로젝트
세계 미스터리 사건 알리기 프로젝트
서울에서 부산까지 로드맵으로 여행 가기 프로젝트(진짜 10시간 수업 시간 내내 로드맵 화살표를 클릭 클릭하여, 결국 부산 찍었음... 그 과정을 다 녹화하여 빨리 감기로 급우에게 최종 공개함... 우레와 같은 박수가 5분 간 그치지 않음!)
대부분의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학생들이 진행한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영화분석(하지만 감상...) 프로젝트
게임 유튜버 분석 프로젝트
종이비행기 50M 날리기 프로젝트(복도에서 다른 선생님과 마주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좋아하는 것 찾기 프로젝트(결국 그 학생은 좋아하는 걸 못 찾은 것 같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 출판하기 프로젝트" 결과물을 소개한다. 이 팀원들은 교내 선생님들을 인터뷰하여 그 녹음 내용을 전사한 후(...) 책으로 엮어 냈다. (후에 한 학생에게 전해 들었는데, 하교 후 실제로 독립출판업체를 찾아갔다고 했다!) 학생들은 때로 교사가 못하는 걸 해낸다. 인터뷰 대상 교사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와 인터뷰한 내용 전문을 아래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