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메고 학교 가는 길에 오늘 배울 공부 생각을 하는 어린이가 있을까? 지각한 것도 아닌데 마구 신나서 뛰어가는 아이의 머릿속에는 교실 가서 만날 친구에게 자랑할 얘기, 장난칠 얘기가 가득하다. 우리 일상에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공유할 짝꿍이 있다면 과제로 가득한 삶이라도 조금 더 신나게 살 수 있을 텐데.
중년들 사이에서는 흔히 커플을 정겹게 일컫는 말로 “짝꿍”이라는 표현을 쓴다. 짝꿍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보다는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상상되고, 손깍지를 낀 채로 헛둘헛둘 박자를 맞춰 함께 흔들며 걸을 것만 같다. 이 거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1인 가구에게 필요한 인간관계는 바로 이런 짝꿍이 아닐까.
동거 가족이 없는 1인 가구에게는 반려자도 없는 걸까? 혼인을 통한 ‘배우자’라는 직함 없이는 반려할 수 없는 걸까? 반려동물, 반려식물, 심지어 반려기계나 반려취미와 같은 다른 요소들로 그 빈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것인가. 반드시 동거의 형태를 띠지 않아도 가족은 존재한다.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서약과 서류 없이도 반려는 가능하다. 반드시 주기적으로 만나고 서로의 일상에 깊숙하게 함께 하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삶을 함께 해 나가는 인간관계는 넓은 의미에서 모두 반려의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생활권 안에서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반려하는 경우도 있고, 벌써 몇십 년째 이어지는 모임에 참석하면서 간헐적인 형태로 공동체의 소속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이미 중장년이 지난 삶의 시점에서 다양한 상황의 1인 가구가 된 이모들, 고모들끼리 뭉치는 것도 종종 본다. 느슨한 룸메이트로서 한 아파트 안에 살더라도 사실상 각자의 삶이 분리되어 있는 하이브리드 형태의 1인 가구를 만날 때도 있다.
1인 가구들 중의 일부는, 실제로 다인가족을 꾸려서 사는 것을 의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평생을 반려할 가족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1인 가구는, 다인 가구를 1순위로 선택하려던 사람들의 차선책이 아니다. 소위 ‘배필’을 찾기 위한 적정한 시기가 있는데, 그 시기를 ‘놓치고’ 나면 영락없이 ‘노(老)00’이 되기 때문에 ‘별 수 없이’ 1인 가구로 사는 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은 이미 옛 것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가족 형태를 계속해서 고민해 봐도 괜찮다. 끊임없이 쇄신하는 삶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고 활기이며, 절대 ‘정착하지 못한 삶’의 모습이 아니다.
가수 이적의 인터뷰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관계를 쉽게 시작할 수 없는 이유 중에는, 우리가 처음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할 누군가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 갈 사람인지를 생각하다 보니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하게 되는 게 많고 사소하게 안 맞는 점이 발견되면 포기하게 된다. 관계와 소통은 점점 무거워지고 기대와 실망이 숱하게 오가게 된다. 하지만 3년이든 5년이든 인생의 일부를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고 생각하면 관계의 시작이 조금은 산뜻해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삶에서 혼자 나아가야 하는 순간들을 겪는다. 1인 가구는 그러한 순간들을 지날 때 가끔 두려움을 느낀다. 내 삶의 오랜 히스토리와 굴곡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 곁을 평생 함께 해 줄 거라는 약속이 없이 언제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일상마저 불안정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와 평생을 함께 할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가 독거노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장기적인 안전장치로서의 관계에만 매달리게 된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
도움이 필요하게 될 언젠가를 위해서 평생의 맹약을 맺을 사람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도 자신의 삶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참된 가치들은 항상 현재라는 그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할 때 더 찬란하게 빛난다. 내 삶에 오래 함께 해 준 인연들에게 감사를 갖되, 헤어짐이 예상되는 만남이라고 해서 시한부라는 꼬리표를 붙이지는 말자. 인생은 거대한 조형물처럼 빚어내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예쁜 한 조각 한 조각이 모여서 반짝이는 것이 모자이크 같은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