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겸사겸사 모녀 여행
난데없이 부산행.
시작은 그랬다.
얼마 전 엄마가 15년 근속 근무 상을 받았는데
유야무야 그냥 넘어갔더니
남편이 마음에 걸린다고, 어머니께 꼭 뭐라도
해드려야 된다고 자꾸만 뭐라 하더니
결국에는 호텔을 예약해준 것. (남편 최고)
거기에 어부지리로 나까지 끼여서 결국
엄마 15년 근속 근무 축하여행 겸 나 태교여행으로
모녀가 단둘이 호캉스를 하게 된 것이다.
호캉스의 장소는 어쩌다 부산 아난티코브.
엄마는 과감하게 평일에 가기로 했고,
요 며칠 주문이 많이 들어온 나도 휴가를 선언하고
모녀는 훌쩍 평일 일탈을 감행했다.
출발 직전까지도 엄마는 일에 시달려 예상보다
한 시간 늦게 대구에서 출발했다.
그 와중에 오늘 백신을 맞은 남편은 새 차를 사는 꿈을 꿨다고 한다. 그것도 아직 출시도 안된 신형 코란도 픽업트럭을. 함양으로 발령 나던 그때도 그런 꿈을 꿨었는데 해몽이 너무나 좋다. '꿈이나 소망, 목포 등이 이루어져 만사형통한다는 길몽'. 또 조직을 이끈다는 해석도 있어서 이참에 군수 되자고, 나는 군수 와이프 하겠다는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어쨌든 두 시간을 달려 기장에 도착했다. 작년 봄, 코로나가 터진 직후 프리마켓에 참여하러 종종 왔었던 기장인데. 일 년 넘게만에 다시 찾았네. 달라진 건 뱃속에 생명을 품었다는 것.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순간, 아 부산이다- 제대로 실감이 났다.
말로만 듣던 아난티코브에 들어서는데 무척이나 장엄하고 컸다. 로비로 이어지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전날 미리 투숙한 이모랑 사촌언니를 입구에서 만났다. 방에 짐만 풀고서 두 사람이 가이드해주는 아난티 곳곳을 구경했다. 파주 미메시스 뮤지엄이 생각나는 곡선을 살린 건물. 그리고 미국 갔을 때 Palos Verdes가 떠오르는 아난티~힐튼 오시리아 산책길. 미세먼지가 심해 뿌옇게 시야가 흐릴 거라 예상했는데 쾌청하고 푸른 바다까지 더해져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궁금했던 아난티코브 전매특허 메인 포토존 식빵 모양의 실내 터널도 마주하고. 크고 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담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안 찍고 갈 수는 없지. 사진은 꽤 잘 나오는 곳이었다.
얼마 전 생일여행으로 남해갔을 때 아난티코브 숙박은 못해도 이터널 저니는 들르고 싶었는데, 그때 못 이룬 걸 오늘에서야 이뤘다. 좋아하는 책들이 감각적으로 배치되어있던. 이곳에서는 하루 종일 놀 수 있겠다 싶었다. 육아서적 코너에서 마침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해서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바로 '아들의 뇌'. 딸로 태어난 엄마들을 위한 아들 사용 설명서이다. 물론 차밍군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아들과 딸은 뱃속에서부터 다르다는 책 설명을 보고 나서 강렬하게 이끌려 읽어야지 마음을 먹었다. 유전적으로부터 다른 아들을 미리 배워야겠다는 생각^^ 차밍아 이 책 할머니가 사줬어 엄마 열심히 공부할게.
만삭의 임산부가 많이 걸으면 힘들다고 자꾸만 실내에 들어가 앉아 쉬라는 엄마 말에도 산책을 이어나갔다. 해 질 녘이 다가올수록 시시각각 점점 더 예뻐지는 하늘과 바다를 놓칠 수가 없어서, 셔터도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점심을 부산 오는 길에 청도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청도할매김밥으로 나누어 먹은 까닭에 배가 무척 고팠다. 이른 저녁으로 브레이크 타임이 갓 끝난 목란으로 정했다. 드디어 목란을 와보다니, 이연복 셰프의 멘보샤를 먹을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었다. 멘보샤와 소고기가지덮밥, 탄탄멘을 시켰는데 생각보다 음식들이 금방 나왔다. 새우살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있던 멘보샤. 새우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맛있게 먹었다. 케첩 맛이 많이 나는 칠리소스가 아쉬웠지만 그래도 에피타이저로 훌륭했다. 탄탄멘은 말해 뭐해. 땅콩소스와 살짝 감칠맛 나게 매콤한 국물이 풍미가 좋았고. 마지막 화룡점정은 소고기가지덮밥이었다. 원래도 가지를 좋아하지만 겉바속촉하다 못해 가지의 육즙이 흘러넘치는 가지튀김이 입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다 먹고 모처럼 기장 온 김에 이케아와 아울렛 구경가기로 했다. 주차장에 차를 가지고 가기 복잡할 것 같아 택시를 타고서. 이케아는 처음 동부산점 오픈 직후에 줄 서서 들어갈 때 남편과 신혼살림 장만하러 온 것 이후로 처음인데 평일이라 그런지 너무나 한산한 분위기에 편하게 구경했다. 관심도 없던 아기방과 육아용품들에 시선을 뺏겨 오래 머물렀던 이제 나는 누가 뭐래도 예비엄마. 그러나 막상 산 건 겨우 차밍이 빨래 후 기저귀와 의류들 담을 지퍼백, 그리고 이사한 어머니댁에 인화해서 넣어드릴 사진액자. 이게 다인 소심한 쇼핑왕 꿈나무^^ 립스틱이 거의 떨어져 가 건너편 아울렛도 들렀다. 근데 코스메틱 매장에 내가 찾는 바비브라운은 없었다. 결국 트리 앞에서 사진 한 장 찍는 거 말고는 수확 없이 돌아 나온 아울렛. 남편은 시골쥐가 도시 가서 눈이 핑핑 돌아간다고 놀려댔다. 그치만 만삭의 시골쥐 체력이 골골해서 얼마 못가 호텔로 돌아간다고 :')
룸으로 돌아와서는 탕목욕을 했다. 호텔의 꽃은 조식 이랬던가. 아니 엄마와 나에게는 반신욕이다. 매주 일요일은 목욕탕이나 찜질 방갈만큼 좋아하는데 이노무 코로나므스키가 터지고는 아예 발길을 끊은 터라 탕목욕을 통 하지 못했다. 게다가 임신하고서는 뜨거운 물이 양수를 데워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해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임신 말기가 되었기도 하고 15분 내외의 짧은 시간은 괜찮으니 모처럼 뜨거운 탕에서 반신욕을 즐기며 힐링했다. 그리고선 그린올리브와 송로버섯 맛 감자칩을 안주삼아 엄마는 알콜이 적게 든 레몬맛 맥주를, 나는 탄산수를 마시며 호캉스여행의 첫날밤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틀째 날, 역시 난 호텔 침구가 좋다. 바스락거리고 온몸을 감싸 안아주는 느낌의. 그러나 그럼에도 새벽 4시에 깨서 다시 잠못이룬 나는야 만삭의 임산부 :’) 어쨌든 오늘은 조식과 수영이 예정된 날.
이모가 임신한 나 맛있는 거 사주신다고 라메르 조식을 예약해주셨다. 그것도 일출시간에 맞춰서. 바다 앞에서 창가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보며 호텔 조식을 먹다니. 평생 해본 적 없는 호사를 누리네 (thanks 남편) 마음먹고 일출 보려 해도 실패할 때가 많은데 정말 구름 한 점 티없이 맑은 하늘에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선명한 해를 마주했다. 두근두근!
뷔페도 정말 맛있었다. 커진 차밍이로 인해 위가 작아져 많이 먹지 못함이 속상할 정도. 혹시나 역시나 디카페인 커피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놀랍게도 된다는 점! (임산부 배려인가요) 두 잔을 연속해서 마셨다. 먹다가 자꾸 창 바깥을 보게 되어서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하고선 해안 산책길을 혼자 걸었다. 남편이 있었으면 아마 함께 걷고 일출을 오래오래 바라봤겠지. 다음엔 꼭 같이 왔으면-
조식을 모두 먹고서 룸으로 돌아와
대망의 워터하우스 갈 준비와 함께 체크아웃.
정말이지 날씨가 다한 날. 하늘도 예쁘고 바다도 예쁘고 수영장 물도 따뜻하니 수영하기 딱 좋았다. 머리가 젖기 전 구석구석 사진 찍고 누볐다. 그리고 야외풀장에서 본격적인 수영 타임을 가졌다. 지난여름 계곡에 갔었지만 그때는 워낙 임신 초기라 조심해야 할 때라 배 아래까지만 담그고 수영을 못했었다. 그러니 임신하고 첫 수영인 셈이다. 물밖은 차갑고 물속은 체온보다 조금 더 따뜻해 수영하기 딱 좋았다. 짧아진 호흡 탓에 긴 잠영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겼다.
엄마와 언제 이렇게 단둘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나 돌이켜보니 2년 전 홍콩여행 이후 처음이다. 2017년에 갔던 미국행은 외할아버지 뵈러 가는 거였으니 홍콩간 게 거의 엄마와 한 유일한 해외여행이었던 것. 내 가게 일로 한창 고생시켜서 죄송한 마음에 보내드렸고 그때 "엄마 이제 자주 해외 가요."라고 했는데 코로나가 터져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렇게 국내에서, 그것도 말로만 듣던 아난티코브에서 호캉스를 즐기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또 나는 엄마에게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약속을 툭 던졌다.
"엄마 이제 일 년에 한 번씩 호캉스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