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오 Mar 27. 2017

영화 <미스 슬로운>, 나 자신과의 싸움

(아래 내용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승률 100%를 자랑하는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이 거대 권력을 상대로 벌이는 로비전쟁!


거창한 홍보 문구의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드는 느낌은 스릴러 장르 특유의 긴장감도, 반전 스토리에서 오는 통쾌함도 아닌 주인공 '슬로운'이라는 인간에 대한 '애잔함'이었다.


물론 영화 안에서 다뤄지는 사회적 이슈와 이와 관련된 법안을 둘러싼 논쟁, 정치적 술수와 음모 가운데서 펼쳐지는 슬로운의 작전은 관객들에게 짜릿함을 선물해주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꽤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밝혀지지 않은 주인공의 삶과 심리를 다시금 상상하게 만든다.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하라는 회사의 압박에 자신의 신념상(슬로운의 '신념'에 대해서는 차후 다시 언급하도록 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 입장의 회사로 옮겨간 슬로운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급기야는 동료의 상처까지 이용하고, 팀원들에게 미행을 붙여 방해되는 자들을 축출해내며 불법적인 도청을 서슴지 않는다.


성공을 눈앞에 두고 상황이 역전되자 그녀는 동료들에게 숨겨 온 작전을 펼쳐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언제나처럼 그녀의 성공인데, 그녀가 졸음을 쫓기 위해 몰래 먹는 각성제처럼 찝찝하고 먹먹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슬로운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달려왔다. 다행인 건 그 목표는 그녀의 '신념'에 의해 정해지는데 이는 후반부 법정에서 그녀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옮은 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법정에서의 대사는 영화 전반의 상황과 그녀의 심리를 대변하는데, 사실 '진짜 슬로운'을 파악하기엔 역부족이다.


청소년기에 총기 난사 사건을 목격한 후 총기 규제 관련 법안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해온 동료 에스미와는 달리 슬로운의 신념과 행동은 단지 그것이 '옳은 일'이어서라는 것 외에 다른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각성제를 먹어가며 처절하고 집요하게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그녀의 신념보다는 성공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 때문에 그녀의 일상과 갖은 수단과 동료들 이 모두는 오로지 목적을 위해 희생된다.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결과'를 위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에스미에 의하면 선을 넘은) 행동들로 '과정'을 무시한다. 일은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어쩐지 허탈해하는 동료들의 표정이 이를 말해준다.



찜찜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을 희생양 삼아 정치적으로 썩은 권력의 한 부분을 도려내며 일을 마무리한 후 자신이 행한 불법적 행동들에 대한 댓가로 교도소에 들어간다.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그녀는 일부러 자신의 치부를 스파이를 통해 흘렸음을 밝히는데, 이는 지금의 교도소 생활도 작전의 일부였음을 암시한다.  


법정에 서기 전 모두가 일이 실패로 끝날 것임을 의심치 않을 때 그녀의 보스는 슬로운에게 다 끝났다며 이제 좀 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슬로운은 이걸 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얼 해야 하냐며 반문한다. 그녀가 계획한 작전의 마지막은 복역이었고 이를 수행한 그녀의 표정은 가장 평화로워보였다.


스스로는 멈출 수 없는 기차와 같던 그녀는 자신을 묶어둠으로써 '휴식'을 가지려 했던 게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교도소에서 나온 그녀는 어딘가를 응시하는데 아마도 이후 그녀의 삶은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으리라 믿는다.






영화 <미스 슬로운>이 흥미로웠던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이 '무늬만 여자인 남자'였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녀는 그것만 없을 뿐이지 완전히 '남자'라고 여러 번 묘사되는데, 실제로 영화 속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남자 주인공의 그것을 닮아있다. 똑똑함이 묻어나는 대사와 차가운 표정, 성적인 제스쳐 없이 일을 관철시키는 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호스트를 부르는 행동 등 영화를 본 많은 여성들은 '슬로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묘한 쾌감을 느꼈을 것 같다. 완벽하게 남자의 옷을 입은 여자라는 점에서 어설프게 묘사된 소위 (요즘 말로) 걸크러쉬 캐릭터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기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그녀 스스로가 비웃었던 방식인) '여성'을 활용하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마녀 재판 식의 작전을 끌어내는 것에서는 빈틈이 보인다.



어쨌든 영화는 이런 여성 캐릭터를 영리하게 활용했지만 정작 '미스 슬로운'의 심리 묘사에는 매우 인색하다. (물론 이 때문에 더 흥미로워지는 점도 있지만)  호스트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흐느끼며 눈물을 삼키는 슬로운의 모습이 언뜻 언뜻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삶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그녀의 대사도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이 지금의 슬로운을 만들어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몇 조각이라도 비춰졌다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더욱 깊이있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어쩌면 거대 권력과의 싸움보다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더욱 치열하고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영화는 끝났어도 앞으로 그녀의 삶이 좀 더 진실에 가까워지고 편해지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커피메이트>, 진짜 소울메이트는 내 안의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