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날,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고흐의 「아이리스」가 그려진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순간, 마치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강렬한 고통과 함께 숨을 멈췄다. 화면을 가득 메운 보라색 꽃들 사이, 유독 홀로 왼쪽 구석에 외롭게 피어있는 하얀 아이리스 한 송이. 그 꽃은 군중 속에 존재감 없이 서 있던 나의 모습이었고, 조직의 논리 앞에 짓밟히던 연약한 개인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전까지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하얀 꽃 한 송이는, 내 안에 숨어있던 가장 깊은 심연을 정확히 건드려, 나 자신을 비로소 마주하게 만들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날의 체험은 내게 '고통'이 어떻게 가장 강렬한 '미적 체험'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보며 느끼는 '공포'와 '연민'이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고흐의 그림 앞에서 내가 느낀 고통은, 바로 그 하얀 꽃에 대한 깊은 연민이자, 언제든 그렇게 짓밟힐 수 있다는 실존적 공포였다.
예술은 우리에게 안전한 거리에서 고통을 마주하게 하고, 그를 통해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게 해준다. 아름다움이 늘 보기 좋게 예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가장 아픈 곳에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이 아픔이 내 안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독 예민해서, 혹은 나약해서 상처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 "조직은, 시스템은, 군중은 언제나 제일 연약한 개인을 짓밟을 듯이" 달려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짓밟는 모습들을 무수히 보아왔고, 때로는 침묵으로 동조했으며, 결국 내가 짓밟히게 되었을 때야 후회하곤 했다. 한 사람의 고통은 온전히 한 개인의 것이 아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정치 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의 학살자 아이히만의 '악마성'이 아닌 '평범성'을 발견했다. 그녀가 본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그저 생각하기를 멈춘, 지극히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그의 죄는 유대인을 미워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유의 무능력' 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저 상부의 명령을 성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우리가 속한 사회, 회사, 심지어 가족이라는 시스템은 종종 우리에게 '아이히만'이 되기를 요구한다. 시스템의 논리에 순응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라고 말이다.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은 개인의 심리적 결함이 아니라, 이처럼 생각하기를 멈춘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폭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기록을 볼 때마다, 거대한 불의 앞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아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우리 모두 이 불의한 세계의 공범자라는 죄책감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영국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존 버거는 고통스러운 사진 앞에서 우리가 윤리적 문제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그 모습을 '보기만 하는' 건 옳은 일일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타인의 고통을 그저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안전한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무력한 질문은 우리를 괴롭히고, 동시에 우리를 성찰하게 만든다.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이 시대의 가장 정직한 고통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 무력하고 정직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는 한 노래의 가사를 떠올린다. 뛰어난 고음의 가수가 오히려 힘을 빼고 담담하게 부르는 그 노래는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는 백만 개의 조각으로 부서졌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하지만 이제 우리는 깨진 유리 조각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있어."
이 노랫말처럼, 고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상처받고 부서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깨진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발견할 수 있다. 무력감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힘은, 완벽함이 아니라 자신의 깨어짐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치유의 첫걸음이다.
도예가 이수경 작가는 버려진 도자기 파편들을 주워 모아, 그 깨진 틈을 금으로 이어 붙여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번역된 도자기'라는 이름의 이 작품들은, 상처의 흔적을 감추는 대신,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승화시킨다. 일본의 '킨츠기(金継ぎ)'라는 전통 기법과도 맞닿아 있는 이 작업은, 깨진 그릇을 버리는 대신 그 상처를 금으로 메워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철학을 담고 있다.
어쩌면 희망이란, 고통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나의 깨진 조각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노래의 가사처럼, "상처는 나의 일부야, 어둠 그리고 조화. 거짓 없는 내 목소리, 이게 바로 나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나의 가장 큰 상처를,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무기로 바꾸는 연금술의 시작이다.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 깊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든다. 나의 가장 아픈 상처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마음의 창이 되어준다. 당신의 그 상처가 바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무늬이자, 당신이 들려줄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다.
★ 생각의 도구상자: 오늘 하루, 당신의 작은 실수나 '깨진 조각' 같은 순간을 하나 떠올려보세요. 그것을 자책하는 대신, 이수경 작가가 깨진 도자기를 보듬듯, 그 틈을 메워줄 당신만의 '금'은 무엇일지 상상해보는 겁니다. (예: 실수에서 배운 교훈, 상처 덕분에 얻게 된 공감 능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