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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9. 2020

"우주는 조금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이상하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그 광막한 질문은 언뜻 허망하지만 질문하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인간이 결국 무지하고 오만하다’는 한 문장을 매우 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그리고 매우 길고 흥미롭게) 이야기해 준다.


저자 본인이 과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이고,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행적을 뒤쫓는 과정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가 ‘거의 모든 것’이라고 칭했듯, 방대한 이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그는 과학의 분과 학문 영역을 넘나들거나 통합하며 과학사의 위대한 발견들을 추려내는 도전적인 행위를 훌륭히 완수해낸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단편적인 시각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연구가 맞닿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 개별종의 특이성이나 위대함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려는 가장 큰 메시지가 아닐까.


“우주는 조금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주 이상하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과학적으로 위대한 순간들을 결과가 아닌 과정이자, 또 다른 결과를 낳는 시작으로 기술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위대한 발견조차 그 과정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과 우연이 적지 않았다. 마치 우주가 탄생하고 지구와 생명체가 탄생하기까지 거듭된 매우 적은 확률의 기적들처럼 말이다.


우주를 상상하는 일은 늘 흥미롭지만 우주를 이해하기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직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 브라이슨의 말대로 우주가 “조금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아주 이상”하기에 우리는 그 불가해한 우주를 향해 갖은 낭만과 상상을 품는 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과학자들이 대부분 굉장한 인내심의 소유자임은 사실이지만, 우주를 상대로 한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특히 감명 깊었던 천문학자는 초신성 관측에 삶을 바쳤던 에번스 목사였다. 초신성을 찾아내는 일은 그것을 찾지 않으려는 노력과도 비슷하다는 말이 그의 어려움을 잘 대변한다. 그러나 에번스가 기어이 초신성을 관측해내는 순간은 그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감격적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적인 표현이 가능하게 했다.


장엄하게 죽어가는 별에서 발생된 빛이 6,000만 년 동안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고요 속의 우주공간을 달려와서, 2001년 8월 어느 날 밤하늘에 반짝이는 작은 별빛의 형태로 지구에 도달했다. (…) 나는 우주공간을 통해서 수백만 년을 지나온 빛이 지구에 도착하는 순간에 누군가가 하늘의 바로 그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것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정도의 사건이라면 당연히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겠지요.”  -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中 -


이처럼 인간은 결국 의미 있는 짧은 순간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기꺼이 허비하며 살아가는 매우 불합리한 존재가 아닐까. 그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낭만적이지만.


과학자의 업적과 명성, 또는 노벨상 간의 상관관계

- “세상이 좀 더 정의로웠다면 셸레는, 패터슨은…”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면 (모든 분야의 학자들이 그러하듯) 정의롭고 위대한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그들이 해낸 업적에 비해 명성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집단보다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과학자 집단에서조차 업적과 명성의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이 책에는 그렇게 운이 없거나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과학자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고집스러웠던 스웨덴의 화학자 셸레는 인의 생산법을 비롯해 무려 여덟 가지의 원소를 최초로 발견하는 업적을 세웠으나, 그의 발견은 다른 사람의 공로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세상이 좀 더 정의로웠고, 스웨덴어를 쓰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았더라면”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좀처럼 탄생하지 않는 것에 정부의 무관심이나 과학자들의 열악한 여건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 절대 굴복하지 않았던 과학자 ‘패터슨’ 또한 인상적이었다. 패터슨은 1923년 이전에는 대기 중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납이 그 후로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위험수위에 이른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많은 위협과 불이익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1970년에 청정대기법 제정, 1986년 미국에서 모든 유연 휘발유 판매 금지라는 눈부신 결과를 얻어냈다.


그는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지질학자였고,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만드는 데 기여한 몇 안 되는 과학자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의 연구가 인류 전체의 멸망 시계를 최소 몇 년 정도는 늦추었을지도 모르는데, 노벨상이 대수일까. 명성이나 돌아올 이익에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연구에 매진했고, 지금도 여전히 매진하고 있을 무수한 과학자들께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갑자기 지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 지질학!


이 책은 한동안 천문학과 물리학 쪽에 관심이 쏠려 있던 내게 지질학의 매력을 다시금 일깨워주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는 지질학을 꽤 좋아했었다는 사실 또한.


고등학교 때 당연히 교과서에 있었던 판 구조론을 이론이 발견되기 이전부터 논쟁이 되던 시기까지로 확대해서 보니 더욱 흥미로웠다. 판 구조론의 발견은 화학과 생물학과 지질학이 모두 맞닿는 순간이었다. 바닷물의 화학적 조성이 크게 변하던 순간, 생물학사의 중요한 사건, 대륙의 이동과 충돌 순간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발견하는 순간 과학자가 느낄 희열은 어느 정도일까. 신의 영역을 문틈으로 목격한 느낌일까. 문득 ‘어느 누구보다 신에게 가까이 간 인물’이라고 평가받았다는 뉴턴이 떠올랐다.


판 구조론이 있기 전까지는 지진, 군도의 형성, 탄소의 순환, 빙하기의 시작과 생명체의 출현과 멸종 등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기적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견이 놀라운 것은 하나의 의문만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미시 세계의 하나의 답을 좇다가 그 답이 거시 세계의 미지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식이라면 우주에 대한 의문이나, 세포 속의 DNA에 대한 의문이 일맥상통하는 이론 하나로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과학은 무슨 운명이 적혀있을지 모르는 포춘쿠키를 깨무는 일과 같이 느껴진다. 물론 과학자들의 연구는 대부분이 나쁜 운수이거나 꽝이라는 점에서는 확률이 더 낮겠지만, 뭐 그런 점도 과학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일 테니까.    



생명은 그저 존재할 뿐

-“단지 살아간다는 것”의 위대함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을 꼽자면, “(우리가) 아는 게 없다”이거나 “아무도 모른다”일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과학사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책이 가르치려하는 것이 단순히 인간의 무지함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관점, 즉 인간의 오만함을 깨뜨려 온 것이 묵묵히 자기 분야에서 자기 할 일을 해온 과학자들의 끈기가 낳은 발견들이라는 것과, 그것들만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기는 아직도 우리가 충분히 무지하다는 것, 그리고 ‘단지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여전한 위대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무수한 생명체 중의 하나이며 인간은 유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생명체들과 하나이고, 의도나 노력이 아닌 놀라운 행운으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인류는 이제는 “행운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마어마하게 방대하고 외로운 이 우주에서 기적적으로 존재할 권리를 얻은 생명체들은 인류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인간은 앞으로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하나의 지구’를 대상으로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생명체의 멸종이 인간과 전혀 무관할 것이라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고, 오히려 어떤 생명체의 멸종이 최악의 불운이라는 포춘쿠키를 와삭 하고 깨뜨리는 버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좀 더 겸허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우리는 대단한 목적 때문에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그 존재의 후손을 남기려는 강력한 본능을 빼앗을 권리는 그 어떤 생명체에게도 없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단지 살아간다는 것’ 외에는 요구하지 않는다. 더 발전하려는 욕심으로 불필요한 파괴를 일삼는 생명체는 지구상에 인간뿐이다.


이끼류가 아무리 단순한 생명체라 해도 그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보다 무해하고 무욕적이다. 빌 브라이슨의 말대로라면 모든 생명체는 하나이고, 이대로 가다가는 남겨진 포춘쿠키 안에는 ‘인류가 매우 앞당긴 종말’이라는 불행한 미래만이 들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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