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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Apr 22. 2024

책, 영화, 커피 그리고 멍청 비용

멍청 비용 때문에 홧김 비용까지 치르는 현명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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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많았던 한 주.


어제는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 합해 오십 보도 안 걸었나 보다. 곡 추천을 할 일이 있어 몇 곡을 돌려 듣고 책을 읽었다. 곡명은 아래와 같다. 모두 오래전부터 즐겨 듣고 있는 연주곡들이다.


Yann Tiersen <Comptine d'un autre été l'après-midi>

Kevin Kern <Le Jardin>

차이코프스키 <사계 6월 뱃노래>

DJ Okawari <Flower Dance>

Franz Gordon <A heart made of yarn>

어쿠스틱 카페 <Last Carnival>

하카세 타로 <정열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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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를 인상 깊게 읽고 내친김에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보았다. 가고시마에 가서 사쿠라지마 화산을 보고 싶다는 생각. 끊임없이 분출되는 연기와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화산재 그리고 삶. 활화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걸까.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죽음교육학회'에서 만난 존 선생님은 몇 년 전 한국에 다니러 오시기 전 내게 디엠을 보내 물었다. 지금 한국, 안전한가요? 나는 안전하다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 안전하다고 믿었기에.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얼마 동안 한국을 방문합니다. 안전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나는 그 문장이 난생처음 가 본 나라처럼 낯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당시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던가? 그래서 나라 안팎이 다시 한번 들썩였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처럼 워낙 여러 번 그래 왔기에 어느덧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 적응해 버린 것일까. 무뎌지다와 적응하다. 이 둘은 결국 같은 말일까.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들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사쿠라지마 화산 부근의 마을을 보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극 중 주인공 아이의 대사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왜 다들 이렇게 화산재가 날리는 곳에서 사느냐고. 부모의 별거로 엄마를 따라 외가댁인 가고시마로 오게 된 소년의 소원은 그래서 '사쿠라지마 화산의 폭발'이다. 그러면 온 가족이 다시 모여 살 수 있으리라는, 아이다운 희망에서였다. 아이의 친구가 그 소원을 듣고 말한다. 그럼 우리들은 어떡하라고? 그러자 곰곰이 생각하던 주인공 아이가 대답한다.


도망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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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과 그 생애에는 안과 밖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제외한 세상 대부분의 것들을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는 없다. 말하자면, 나 자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장면들에서 관찰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가족이나 친구 역시 그 내면은 볼 수가 없다. 아무리 가까워도 타인이기에 그러하다. 오직 자신의 내면만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삶.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괜히 여운이 남아 밤 열 시가 다 되어 커피 한 잔을 했다. (미쳤지!) 오빠네 부부가 싱가포르에 갔다가 온 가게를 다 뒤져 사 온 <바샤 밀라노 모닝> 커피이다. 가는 곳마다 품절이어서 어렵게 간신히 구해 왔다고 했는데 당시 속탈이 나서 빌빌거리던 나는 '아아... 고마워용...'이라고 시들시들하게 반응했었다. 그러고는 찬장에 모셔 두고 깜박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먹었다. 깜짝 놀랄 만큼 향이 진하고 좋았다. 그 결과... 카페인에 취해(?) 즉흥적으로 영화를 하나 예매했다. <플랜 75>였다.  


그렇게 나는 멍청 비용의 단초를 마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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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 비용'이란, 꼼꼼하게 챙기지 못하고 멍청하고 어리석게 날려 버린 비용을 뜻하렷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멍청 비용을 이만저만 써 버린 것이 아니지만 새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애써 예매한 영화를 그만 노쇼해 버렸기 때문이다! 예매를 할 때까지만 해도 문제 없었다. 시작 타임이 정오니까 그전에 운동 다녀와서 밥 먹고 책 한 자락 읽고 딱 영화관 가면 되겠네. (즉흥형 인간의 원대한 계획)


눈을 뜨니 열 시였다. (예?)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뇌리에 번쩍 스친 것은- 5월부터 시작될 글쓰기 수업에 필요한 강의안을 A 고등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것.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은 오전 시간을 불살라 강의안을 손보았고 송부까지 완료했다. 그러고는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시계를 보았다. 12시 39분. 점심 먹고 소화 좀 시킨 후 운동 다녀오면 딱 좋겠군. 하하하. 좋은 하루다. 그러면서도 뭔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는데, 뭔가 잊은 것만 같은 이 기분. 뭘까. 대체.


뭐긴 뭐야.

너 님은 지금 이 시간에 영화관에 있어야 하거든요.


카톡에 뜬 영화 예매 완료 문자가 하필 그때 눈에 들어올 게 뭐람. 한 시간만 더 일찍... 아니 그래도 못 갔겠구나. 쓰읍.


이렇게 영화표를 날렸다. 아깝고 아쉬운 내 영화.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열받아서 운동하러 뛰쳐나갔다.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근력 운동을 하고 15분 뛰고 커피 대신 레드불 마셨다. 그리고 중고서점에 들러 책도 한 권 샀다.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멍청 비용 만회하려면 돈을 아껴야 하지만 홧김 비용이 더 들었다.


참 정말 슬기로운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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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의 매력.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내게로 온 것들에는 늘 예상치 못한 시간이 숨어 있다.


책을 펼쳤더니 영화표가 나왔다.

책을 보고, 그의 영화를 보았나 보다.


이렇게 영화표에 꼼꼼하게 손으로 적어 주던 때가 있었던가.

지금도 그러한가.


그리 오래지 않은 날들인데 새롭기만 하다.

시간이, '걷는 듯 천천히' 흘렀나 보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내게로 온 것들에는 늘 예상치 못한 시간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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