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소프트 버전 1984’에 살고 있다.
강제적 전체주의가 아니라, 자발적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시대.
우리는 진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디어, 감시, 소비 시스템 속에서 보이지 않게 통제되고 있다.
이 순환을 깨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1984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는 반란을 일으킬 수 없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의 순환 구조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번 반복됐다.
특히, 정보 통제, 미디어 조작, 감시 시스템, 대중 선동 같은 사례에서 이 패턴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느낀 적이 많다.
현대 사회에서 ‘1984처럼 사람들을 길들이는’ 사건들
중국의 ‘사회적 신용 시스템’ – 디지털 감시의 완벽한 모델
사람들이 자유롭게 반란을 일으킬 수 없는 이유? 감시 시스템이 모든 걸 통제하기 때문.
중국은 1984에서 빅 브라더가 만든 “텔레스크린”을 현실화한 나라다.
“사회적 신용 시스템(Social Credit System)”**을 도입해서, 국민들의 행동과 신용 점수를 평가하고, 점수가 낮으면 비행기, 기차 이용 제한, 금융 대출 금지, 인터넷 속도 제한까지 당한다. 즉, 정부에 순응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말살’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정치적 발언을 하면 즉시 감시당하고,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받게 된다.
“사람들이 반란을 고민할 틈도 없이,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회.”
“억압이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
“중국은 거의 1984의 오세아니아처럼 작동하는 나라가 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대 ‘가짜 뉴스’ 조작과 여론 통제 – 현대판 진실부(Truth Ministry)
사람들이 체제에 저항할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이유는 뭘까? 뉴스와 정보가 왜곡되기 때문일까?
1984에서 진실부(Ministry of Truth)는 역사와 사실을 조작해서 사람들이 다른 관점을 가질 기회를 없애버렸다면, 현대 사회에서도 뉴스, SNS, 미디어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보를 조작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
미국 대선 때마다 가짜 뉴스가 양쪽 진영에서 쏟아져 나와서, 사람들이 진짜 정보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뉴스에서 “우리는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라는 내러티브를 조작해서 국민들이 전쟁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중국은 “천안문 사태” 같은 역사적 사건을 검열하고, 젊은 세대가 아예 모르게 만들었다.
“진실이 삭제되거나 조작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걸 인식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이게 바로 1984에서 오웰이 경고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개념이다.
미국 NSA의 대규모 감시 시스템 – 현실판 ‘빅 브라더’
사람들이 저항할 기회를 잃는 이유? 모든 것이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4에서 “사상경찰(Thought Police)”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감시하고, 반체제적인 행동을 하면 즉시 체포했다. 현실에서도 정부는 국민들이 ‘자유롭다고 느끼면서도 감시당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미국 NSA(국가안보국)는 전 세계의 인터넷 활동, 통화 기록, 이메일을 대규모로 감시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정부는 “테러 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감시를 정당화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
“자유롭게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
빅 브라더가 ‘우리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캔슬 컬처(Cancel Culture) – ‘자발적인 사상경찰’ 시스템
사람들이 저항할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 스스로 서로를 감시하고 검열하기 때문인데 1984에서 “2분 증오(Two Minutes Hate)”는 사람들이 특정한 대상을 향해 증오를 표출하도록 조작된 행사였다. 현대에서도 SNS에서 ‘캔슬 컬처’가 작동하면서, 대중이 서로를 검열하는 구조가 생겼다.
현대에 누군가 SNS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발언을 하면, 대중이 한꺼번에 몰려가 비난하고, 그의 경력을 파괴하며, 심지어 생계를 끊어버리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말할 용기를 잃고,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즉, 당이 직접 통제하지 않아도, 대중이 스스로 서로를 통제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당신이 반란을 꿈꾸지 않도록,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만든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검열을 하면서, 체제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오웰이 1984에서 경고한 가장 무서운 점은,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동안, 이미 체제의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순환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판적 사고력 키우려면 정보 검증 습관 만들어야 한다. 단 하나의 뉴스만 듣지 말고, 다양한 출처에서 비교하며 분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정부나 기업이 왜 특정 정보를 강조하는지, 그 의도를 항상 의심해야 한다.
정보 소비 줄이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 만들어야 하낟. 하루 종일 뉴스, SNS에 빠져 있으면 생각할 시간이 없어지고, 조작된 정보에 쉽게 휩쓸리게 되기 때문이다. 빠르게 소비하는 정보(틱톡, 쇼츠)보다, 책이나 장문의 글을 통해 깊이 있는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감시받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기술(스마트폰, SNS, AI)은 “누군가가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사용해야 한다. 감시 시스템을 인식하고 경계해야 한다.
감시는 개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알고리즘과 시스템으로 이루어진다. 1984에서는 감시가 사상경찰과 텔레스크린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AI, 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을 통해 진행된다. 구글, 페이스북, X(트위터) 같은 기업들이 우리의 검색 기록과 SNS 활동을 분석해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지만, 이것이 조작될 가능성이 있고 특정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동으로 ‘감시 리스트’에 올라가고, 필요할 때 조작될 가능성이 있다. 반체제적인 행동도 체제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윈스턴은 반체제를 꿈꿨지만, 그의 모든 행동이 사실은 감시 시스템 안에서 조종되고 있고 현대 사회에서도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체제의 틀 안에서 움직이도록 조작될 수 있다.’ SNS에서 반체제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사실 그것도 플랫폼 기업들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며 기업들이 반체제적인 콘텐츠를 이용해 돈을 벌면서, 실제로는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도록 유도할 수 있다.
감시는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응을 만든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을 바꾸도록 강요했어.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체제에 순응하도록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끔찍하다.
오늘날의 감시는 1984보다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1984는 단순한 감시 사회를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조차 감시받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감시 시스템은 점점 더 보이지 않게 작동하며, 사람들이 스스로 체제에 순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제는 강제적 전체주의가 아니라, 자발적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시대이고. 우리는 진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디어, 감시, 소비 시스템 속에서 보이지 않게 통제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맑고 쌀쌀한 4월 어느 날, 시계들이 열세 차례치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1984 첫 문장. 이 첫 문장만으로도 불안한 분위기로 몰아넣는다.
현관 한쪽 끝 벽에는 실내에 걸기에는 너무 큰 컬러 포스터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폭 1미터가 넘는 커다란 얼굴 하나만 동그마니 그 려진 포스터로, 숱이 많고 까만 콧수염에 억세 보이면서도 잘생 긴 얼굴을 한 마흔다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 얼굴이었다.
윈스턴 스미스가 등장하면서 곧바로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이 드러나고, 포스터 속 거대한 얼굴이 암시하는 감시와 권력의 존재감이 강하게 와닿는다. 특히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는 설정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테마라 더 섬뜩하다.
윈스턴 스미스는 이미 육체적으로도 피로하고, 그의 현실 또한 피폐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추위와 거친 환경, 낡고 색이 바랜 세상. 이 모든 요소가 그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비참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는 문구와 텔레스크린의 존재는 이 사회가 개인의 사적인 공간조차 감시하는 체제라는 걸 암시하지. 텔레스크린은 꺼질 수 없고, 단지 소리를 줄이는 것만 가능하다는 설정이 강한 불안을 조성한다.
게다가 윈스턴의 외모에 대한 묘사—조악한 비누, 무 면도날, 겨울의 혹독한 환경 때문에 거칠어진 피부—이건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얼마나 궁핍하고 피폐한 지를 보여주는 장치이다.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윈스턴이 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억압적인 체제를 상징해. 거리 곳곳에 나붙은 빅 브라더의 포스터는 단순한 선전물이 아니라, 감시와 권력의 상징이다. “검은 콧수염이 난 얼굴”이 내려다보는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마치 모든 곳에서 감시받고 있다는 강박감을 조성한다.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이 문구가 주는 압박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억누르는 힘이다.
또, INGSOC라는 단어가 바람에 휘날리며 드러났다 사라지는 장면은 이 사회의 이념과 체제의 위압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헬리콥터 “건물 창을 기웃대며 탐지하는 경찰 정찰기”—이 장면이 특히 섬뜩해. 공중에서조차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며 감시하는 세계. 하지만 정작 윈스턴이 더 두려워하는 건 이 헬리콥터가 아니라 사상경찰.
“아주 작은 속삭임을 제외하면 모든 소리는 포착된다.”
텔레스크린의 기능이 구체적으로 설명되면서 공포감이 극대화돼. “아주 작은 속삭임을 제외하면 모든 소리는 포착된다.” 그리고 언제 감시당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설정. 이건 단순히 기술적인 감시를 넘어, 사람들의 내면까지 통제하려는 체제라는 걸 암시하지. 결국 사람들은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스스로를 검열하는 상태가 되는 것 으... 끔찍하군.
이 장면을 다시 읽으면서, 요즘 시대에도 비슷한 감시의 형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빅 브라더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형태만 바뀐 채 현실 속에 존재하는 느낌이 든다.
“도청당한다고, 감시당한다고 여기고 살아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었으며, 그런 삶의 방식은 이제 습관을 넘어 본능이 되었다.”
윈스턴이 살아가는 오세아니아는 감시가 생활화된 사회야. “도청당한다고, 감시당한다고 여기고 살아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었으며, 그런 삶의 방식은 이제 습관을 넘어 본능이 되었다.” 이 부분이 정말 강렬하다. 감시가 단순히 제도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수준까지 간 거다. 이건 마치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검열하고 감시 시스템에 순응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진실부”라는 기관이 상징하는 바도 강렬해. 진실을 조작하는 곳이 진실 부라니, 말 자체가 역설적이잖아. 하지만 이건 *이중사고 (Doublethink)*의 대표적인 사례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능력.” 이런 모순된 슬로건을 반복해서 주입하면 사람들은 결국 그걸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런던의 과거를 떠올리려 하지만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부분
특히 윈스턴이 런던의 과거를 떠올리려 하지만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부분이 중요하다. 기억이 사라지거나 왜곡된다는 건, 체제가 역사를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고, 결국 사람들이 과거의 현실을 알지 못하면, 현재의 억압된 상황을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진실부가 뉴스, 오락, 교육, 예술을 담당한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하다. 즉, 모든 정보와 표현이 당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고 평화부가 전쟁을, 다정부가 억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완전히 이중사고로 돌아가는 사회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장면 읽으면서 요즘도 정보 조작이나 감시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런 요소들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술은 거의 질산이나 다름없었고, 마시면 고무 봉으로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
윈스턴이 체제에 대한 저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순간.
빅토리 진과 빅토리 담배가 얼마나 형편없는 품질인지 다시 강조된다.
“술은 거의 질산이나 다름없었고, 마시면 고무 봉으로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
“담배 가루가 바닥에 쏟아졌다.”
이건 체제의 허울뿐인 승리를 상징하지. ‘빅토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 제공되는 것은 형편없어. 거짓된 승리의 이미지, 체제의 기만적인 프로파간다를 보여주는 장치.
하지만 “세상이 한결 유쾌해 보이기 시작했다.”
술이 주는 일시적인 환각처럼, 윈스턴도 잠시나마 현실의 억압을 잊고 싶어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그는 진짜 저항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공책과 저항의 시작
윈스턴이 “텔레스크린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한 것은 단순한 공간적 특징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텔레스크린은 감시 도구이지만, 거실 구조상 완벽한 감시가 불가능한 틈이 존재한다. 윈스턴은 그 틈을 활용해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려 한다.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공책을 꺼내는 순간이 중요하다.
공책은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다.
오세아니아에서는 개인적인 기록, 특히 체제와 상반되는 생각을 적는 것은 범죄다.
이 공책은 윈스턴이 자신만의 생각을 글로 남기려는 첫 번째 시도이자, 빅 브라더 체제에 대한 최초의 반항을 의미한다.
공책의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것도 흥미롭다.
“아주 아름다운 공책이었다.”
윈스턴은 단순히 글을 쓰려는 게 아니라,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싶은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진실이 조작되고, 기억이 왜곡되는 세상에서, 공책에 기록하는 행위는 기억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즉, 이 장면은 *“기록을 통해 체제에 맞서려는 인간의 본능”*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순간이다.
난 특히, 요즘 세상에서도 감시 기술이 점점 정교해지는 상황에서, “텔레스크린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공간을 찾으려는 윈스턴”이 현실적인 공포처럼 느껴졌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알려진 지식은 극히 적었다. 많이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쉬지 않고 노동과 번식을 하는 한 달리 무엇을 하든 중요치 않았다. 아르헨티나 평원에 풀어놓은 가축처럼 그들 스스로에게 내맡겨 놓으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연스러운 생활양식 요컨대 일종의 대대로 전해 내려온 생활 형태 같은 것으로 복귀했다. 그들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으로는 고강도의 육체노동과 살림과 양육, 이웃과의 사소한 다툼, 영화, 축구, 맥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박이 있었다. 그들을 통제 상태에 묶어 두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1984에서 프롤레타리아(Proles, 노동계급)에 대한 묘사로 조지 오웰이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대목이다.
프롤레타리아(Proles)는 어떤 존재인가?
1984에서 오세아니아 사회는 당(Party)과 프롤레타리아(Proles)로 나뉘어 있고 프롤레타리아는 전체 인구의 약 85%를 차지하지만, 정치적 권력과 상관없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그들은 단순한 노동과 쾌락(오락, 술, 도박 등)에 몰두하며, 체제에 저항할 필요도, 의식적으로 각성할 필요도 없도록 설계된 계급이다. 당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사고할 줄 아는 계급”이지, 단순히 살아가는 노동자는 아니다. 그래서 당은 프롤레타리아를 철저히 무시하고, 이들이 단순한 본능적 삶을 유지하도록 방치한다.
프롤레타리아와 ‘가축 같은 존재’라는 비유
“아르헨티나 평원에 풀어놓은 가축처럼 그들 스스로에게 내맡겨 놓으면…”
당은 프롤레타리아를 감시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면서, 체제에 저항하는 것보다 생존과 오락에 집중하기 때문인데 당은 그들을 억압하기보다는,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할 기회를 제공해서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한다. 억압이 필요 없는 억압, 방치 속의 통제라니 이 부분이 불편했던 건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더 정교하게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와의 유사점 – ‘1984적 현실’
이 장면이 1984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로. 프롤레타리아가 단순한 허구의 설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오락과 소비’에 빠진 현대인들
1984 속 프롤레타리아는 영화, 축구, 맥주, 도박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현대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소비하고, 오락을 즐기도록 유도되는 구조가 있지 않은가? SNS, 넷플릭스, 유튜브, 쇼핑, 스포츠, 연예 뉴스에 가려져 정치나 사회 문제보다, 개인적인 즐거움에 집중하도록 설계된 미디어 환경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면, 단순히 오락만 끊임없이 공급하면 된다.” “현실에 불만을 가질 기회조차 없게 만들면, 체제는 영원히 유지된다.”
경제적 생존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구조
프롤레타리아는 “고강도의 육체노동과 살림과 양육”으로 인해 정치적 각성을 할 기회조차 없는데
현대 사회에서도 경제적 불안 속에서 생존에 집중하느라,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깊이 고민할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하루 종일 일하고, 가정을 돌보고, 잠깐의 오락을 소비하는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저항이란 너무 먼 이야기이며 현대인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사람들이 저항할 힘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면,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만들면 된다.” 너무 쉽지 않은가...
감시 없이도 ‘순응’을 유도하는 사회
1984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강압적인 감시 대상이 아니며 대신, 스스로 ‘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유도된다. 오늘날도 정부나 기업이 강압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대중이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시스템이 존재하니까
“스스로 통제받고 있다고 인식하지 않는 억압이 가장 강력한 억압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당의 통제에 관심조차 없듯이, 오늘날의 대중도 체제를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현실의 거울이다
조지 오웰은 1984를 통해, 억압이 단순한 강제력이 아니라, 시스템과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는 강제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설계된 계층이다.
결국, 가장 무서운 억압은 사람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 1984를 더 현실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지금 우리도 1984 속 프롤레타리아처럼 살아가고 있는 걸까?
1984에서 ‘양배추 냄새’의 의미
1984를 읽다 보면 양배추 냄새가 자주 등장한다. 윈스턴 스미스의 아파트(빅토리 맨션)에 들어설 때, “삶은 양배추와 낡은 천 깔개의 냄새가 났다” 는 묘사가 나온다. 이 냄새는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라, 오세아니아의 억압된 사회 분위기와 빈곤한 삶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다.
양배추 냄새 = 가난과 궁핍함의 상징
1984에서 양배추는 싸구려 음식이자 빈곤한 생활의 대표적인 상장이며, 오세아니아의 일반 시민들은 질 낮은 음식(빅토리 진, 빅토리 빵, 삶은 양배추 등)만 먹으며 살아간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배급받는 저급한 음식을 떠올리게 한다.
양배추 냄새 = 국가가 통제하는 저급한 삶으로 윈스턴이 사는 공간의 냄새부터 이미 억압과 피로가 깃들어 있다.
양배추 냄새 = 개인적 자유가 없는 ‘통제된 삶’
오세아니아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맛있는 음식을 선택할 수 없는데 빅 브라더는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배급만 받도록 통제한다. 윈스턴이 매일 맡는 양배추 냄새는, 국가가 개인의 삶까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양배추 냄새 = 윈스턴의 절망과 무력감
윈스턴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지만, 현실의 억압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데 그가 사는 공간은 희망 없는 삶의 상징이고, 양배추 냄새는 그를 짓누르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요소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불쾌한 냄새처럼, 독재 체제의 억압은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양배추 냄새는 윈스턴이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인 것이다.
현대 사회와의 연결해 보자.
우리는 ‘양배추 냄새’를 맡고 있을까?
도시의 ‘기계적인 공기’
대도시에서는 항상 일정한 냄새가 존재하지 않은가?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 저렴한 패스트푸드 냄새,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감이 스며든 공간 특히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다 보면 슬프게도 여러 냄새가 섞여 불쾌감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국가나 자본주의 시스템이 설계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반복되는 삶의 패턴 속에서 오는 무기력함
매일 같은 출근길, 같은 사무실, 같은 공기, 같은 피로.
윈스턴이 매일 양배추 냄새를 맡으며 지친 삶을 살아가듯, 우리도 어디선가 익숙하지만 피로한 ‘사회적 냄새’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구조
오세아니아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살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듯 오늘날에도 자본과 권력이 모든 걸 결정하고, 우리는 제한된 선택지만 제공받고 있는 건 아닐까?
‘양배추 냄새’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익숙해진 ‘억압’인 것이다.
1차 방정식에 미지수가 두 개가 붙은 것과 같았다.
이 문장은 해결할 수 없는, 혹은 답을 구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단 하나의 방정식으로는 답을 구할 수 없는 상황”, “무언가 빠져 있고, 불완전한 상태”
1차 방정식에 미지수가 두 개라는 의미는 일반적인 1차 방정식은 “ax + b = 0” 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미지수가 두 개인 1차 방정식은 “ax + by = c” 같은 형태가 되는데, 이런 방정식은 하나만 가지고는 해를 결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2x + 3y = 5”**라고 하면, x와 y를 하나의 값으로 정할 수 없고, 무한히 많은 해가 존재하는데, 정확한 답을 찾으려면 또 다른 방정식이 필요하다.
이런 수학적 상황을 현실적인 맥락에 비유한다면: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상황인데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하는 난처한 상황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에 대한 정보가 반쪽짜리라서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가 있지 않은가.
또한 선택의 기준이 모호한 상황인데 두 개의 변수가 동시에 움직이지만, 하나를 결정할 방법이 없을 때가 있지 않은가. 명확한 해답이 없이 계속 떠도는 문제를 암시처럼
해결되지 않는 관계나 감정과 같이 인간관계에서도 한 사람이 노력해도, 상대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답을 찾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사랑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명확하지 않을 때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관계는 마치 미지수가 두 개 있는 방정식 같았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없고, 또 하나의 방정식이 필요했다.”
“내가 손을 뻗으면 그는 멀어졌고, 그가 다가오면 나는 망설였다. 마치 미지수가 두 개인 방정식처럼, 끝없이 엇갈리며 해답 없는 문제를 만들었다.”
“2+2=5”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등장하는 “2+2=5”는 진실이 권력에 의해 조작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구절이다.
이 표현은 단순한 수학적 오류가 아니라, 전체주의 정권이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통제하고, 현실 자체를 왜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절대적 진실이 권력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당(The Party)은 국민들에게 “2+2=5”라고 믿도록 강요한다.
당이 원하는 것을 믿도록 사고 자체를 조작하는 것이 목표. 현실적으로 틀린 명제라도, 국가가 진실이라 강요하면 대중이 그것을 믿게 된다.
개인의 사고를 통제하는 세뇌 기법으로 사람들에게 거짓을 반복해서 주입하면, 결국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이중사고(Doublethink)” 개념과 연결되는데, 이중사고(Doublethink)란 모순된 두 개념을 동시에 믿도록 하는 기법이며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다처럼, 모순을 진실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반항과 굴복의 과정
윈스턴 스미스는 처음엔 “2+2=4”가 진실이라고 믿지만, 고문과 세뇌 끝에 “2+2=5”라고 믿게 된다.
결국 “진실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에서 나온 구호
“2+2=5”는 실제로 소련의 스탈린 독재 정권에서 사용된 구호로 1930년대, 소련의 경제 정책(5개년 계획)을 4년 만에 달성해야 한다는 선전 문구로 사용.
우리는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 완수할 것이다.
→ “2+2=5”라는 비현실적 목표를 강요한다.
조지 오웰은 이러한 전체주의적 사고를 패러디하여 『1984』에서 사용했다.
전체주의 국가들의 정보 조작 기법으로 나치 독일: “거짓말도 충분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괴벨스의 선전 전략), 마오쩌둥의 중국 문화 대혁명: 과거 역사를 수정하고, 불편한 진실을 삭제했으며 북한은 “위대한 지도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라는 식의 절대적 신념 강요한다.
가짜 뉴스 & 정치적 선전
미디어가 정보를 조작하면, 대중은 결국 그 정보를 믿게 되는데 “경제가 나쁘다” → “경제가 안정적이다.” 같은 프레이밍 변화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특정 서사가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대중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치적 프레임 전환 기법은 부정적인 사건도 용어를 바꾸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군사 점령” → “평화 유지 작전”, “경제 불황” → “조정 기간”, “검열” → “국가 안보 강화”
교육과 지식의 조작
역사책을 수정하거나(개인적인 생각으로 역사는 승자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라 생각한다.) 특정 사건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집단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 “사실이 아니라 믿음을 따르라”는 식의 논리가 퍼질 때, “2+2=5”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
“2+2=5”와 윈스턴의 파멸
윈스턴의 저항 → 굴복 과정
소설 초반: 윈스턴은 “2+2=4”가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고 고문과 세뇌 후: “2+2=5”를 믿도록 강요받고, 결국 믿게 된다.
마지막 장면: 윈스턴이 “나는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완전히 무너진다. 이는 진실을 부정하고 권력의 조작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독재 권력이 원하는 것은 ‘거짓’을 믿게 만드는 것
당(The Party)이 목표로 하는 것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의 변화이며 물리적 강압이 아니라, 사고 자체를 바꾸는 것이 가장 완벽한 통제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2+2=5”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진실과 자유의 의미를 강하게 함축한 강렬한 상징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저항할 힘조차 없는 자유다.”
“희망이 있다. 그러나 희망이 작동할 가능성은 없다.”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삶에 대하여
“좋은 골목에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북적대고 있었다.”
“입술에 조잡하게 루주를 바른 여자애들, 그들을 쫓아다니는 사내애들, 10년 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뚱뚱한 여자들…”
사람들은 먹고, 놀고, 싸우고, 생존하는 것 외에 다른 고민이 없는 듯 보인다.
여자들은 화장을 하고, 남자들은 그들을 따라다니고, 아이들은 진흙 웅덩이에서 놀다가 혼나고, 노인들은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집은 허름하고, 창문이 깨져서 널빤지로 막아져 있고, 사회가 그들을 방치한 듯한 모습.
이들은 체제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를 본능적으로 살아가며 오세아니아의 하층민들은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생존 자체에 집중하며 살아간다.
오늘날에도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생존에 집중해야 하지 않은가. 하루하루 돈을 벌고,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삶을 사는 사람들은 체제에 저항할 힘이 없다.
1984에서 윈스턴은 “만약 희망이 있다면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의 현실 속에서 체제 변화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없다.
“그래. 하고 내가 그 여자한테 말했지. 다 좋아. 하지만 너도 내 입장이 되면 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비난하기는 쉬운 거야. 하지만 너한테 나 같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거야. 바로 그렇게 하는 거라고.”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비난하기는 쉽지만, 너도 내 입장이 되면 똑같이 했을 거야.” 이건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하면서,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태도. “그거야. 바로 그렇게 하는 거라고.” 즉, 사람들은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불만은 있지만,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반란의 가능성은 있지만,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킬 의지도, 동력도 없다. “내가 저 상황이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라는 말은 개인이 스스로 무력하다고 느낄 때 자주 나오는 사고방식이며 결국,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해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하며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여자들은 지나쳐 가는 그를 적의에 찬 시선으로 말없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적의는 아니었으며, 그저 낯선 짐승이 지나갈 때처럼 경계를 품고 일시적으로 긴장한 것뿐이었다.”
어떤 사회에서든 하위 계층은 외부인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경우가 많다. 변화가 필요하지만, 외부의 개입을 불편하게 느끼며 스스로의 방식대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단순히 억압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의 익숙함과 순응 때문이기도 한다.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삶’
프롤레타리아는 1984에서 가장 자유로운 계층이지만, 동시에 가장 무기력한 계층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바쁘고, 오락과 일상 속에서 스스로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당(Party)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저항할 힘조차 없는 자유다.”
“그들은 통제받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희망이 있다. 그러나 희망이 작동할 가능성은 없다.”
복권은 그들의 기쁨이자 도락이고 진통제이며 지적 자극물이었다.
이 장면이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중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또 = 경제적 불평등을 가리는 환상
현대 사회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복권에 더 많이 의존한다.
“한순간에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환상을 주지만, 실제로 복권 당첨 확률은 극히 낮고, 구조적으로 빈곤을 해결할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체제를 바꾸는 대신, 복권을 사며 ‘한탕의 꿈’을 꾸도록 길들여진다.
복권이 아니더라도, 현대 사회에도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억압이 없어도, 사람들은 스스로 길들여진다.
복권은 현실을 바꿀 기회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지 못하도록’ 설계된 장치다.
어쩌면 대중을 가장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아닐까?
기억이 사라지고, 기록이 조작되면?
“그러나 사실상 구시대의 몇몇 생존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긴 해도, 그들이 한 시대와 다른 시대를 제대로 비교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확신하지 못한다. 혁명 이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들은 체제가 바뀌면서 자신의 기억이 진짜인지 점점 의심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경험보다 체제가 제공하는 ‘공식적인 기록’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도, 그들의 기억이 무력화된다면 역사는 조작될 수 있다. 기억을 조작할 필요조차 없다.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의심하도록 만들면 된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뉴스, 미디어, 교과서, 정치적 담론이 역사를 특정한 내러티브에 맞게 편집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공식적인 과거’가 계속 바뀌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지고, 결국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직장 동료와 다투었던 일이라든가 잃어버린 자전거펌프 찾아다니기라든지, 오래전에 죽은 누이의 얼굴 표정, 70년 전 어느 바람 부는 날 아침의 흙먼지 소용돌이처럼 오만 가지 쓸데없는 것들을 기억했지만, 정작 의미 있는 사실들은 모두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인간의 기억은 조각난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개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하지만, 정작 역사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큰 그림은 잊어버리게 된다. 사람들이 개인의 감정적 기억에만 집중하고, 사회적 맥락을 상실하면 체제의 변화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큰 그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체제의 변화가 정말로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기준이 없다.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은 것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체제의 전략이다.
대중은 정치, 경제, 역사적 변화 속에서 큰 흐름을 보기보다, 개인적인 뉴스와 감정적 사건에 집중하도록 유도되는데 트렌드, 연예 뉴스, 가십, 소비문화가 우리의 기억을 사소한 것들로 채워버리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사회가 정말로 나아지고 있는지, 혹은 악화되고 있는지’ 판단할 능력을 잃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 없어지고 글로 남긴 기록이 날조되면, 인간 조건이 개선되었다는 당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기록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기록이 조작되고, 과거의 모든 데이터가 바뀐다면, 사람들은 과거가 어땠는지 알 수 없게 되는데, 결국 현재가 과거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지 않나.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1984의 핵심 명제)
뉴스, 교과서, 역사서, 데이터 기록이 편향되거나 의도적으로 수정되는 경우가 있다. 독재 정권에서는 불편한 진실이 삭제되고, 새로운 ‘공식 기록’이 만들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며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기록된 역사’를 통해 과거를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진실은 사라지게 된다.
역사는 승자가 쓴 주관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1984의 세계는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A 언론 → “자유를 위한 혁명”, B 언론 → “폭력적인 반란”, C 언론 → “외부 세력의 개입” 이렇듯 어떻게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며, 시간이 지나면, 어느 서사가 ‘공식적이 되고 나머지는 잊히게 되지 않은가.
정보가 왜곡되면,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미디어가 선택적으로 보도하는 것만이 ‘역사적 사실’이 된다.
역사는 언제나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편집되고 기록을 남기는 자가 결국 ‘과거의 의미’를 정한다.
승자의 기록이 공식 역사로 남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조작될 가능성을 항상 의심해야 한다. 진짜 역사는 기록 자체가 아니라,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에 대한 국내 언론의 시각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크게 다르다. 보수 성향의 언론은 대체로 윤석렬의 정책과 행보에 우호적이거나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면, 진보 성향의 언론은 비판적 시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 성향 언론의 시각
조선일보: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관련하여, 대통령의 모순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도 계엄을 불가피한 조치로 이해하는 기조를 유지하며, 민주당의 연쇄 탄핵 추진이 국정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앙일보: 윤석열의 해명이 대체로 솔직하다고 평가하면서도, 국민들의 우려를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해 명확한 사과보다는 억울함을 설명하는 데 더 비중을 두었다고 비판했다.
진보 성향 언론의 시각
한겨레: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를 ‘헌정 질서 위협’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국민의힘이 국정 혼란의 원인을 민주당에 돌리려 하면서, 내란 사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 윤석열의 ‘군 투입 지시’ 발언을 ‘자백’으로 규정하며, 이를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사안으로 해석했다. 또한, 윤 대통령의 감세 정책과 기업 중심 경제 기조가 경제 불황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같은 사건이나 발언에 대해 언론사들은 각자의 시각과 해석을 통해 보도하며, 독자들은 이러한 다양한 관점을 비교하고 분석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고통과 공포가 생물학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 무력감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육체의 배신을 생각하고 거의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공포 앞에서 무너진다.
공포에 맞서 싸워야 할 순간, 오히려 몸이 반응하지 않고 무력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통과 공포가 생물학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는 고통과 공포가 생물학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생존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 않다. 사람들은 보통 공포를 느끼면 싸우거나 도망갈 것이라 생각한다. (Fight or Flight 반응) 하지만 현실에서는 공포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몸이 멈추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며 생존해야 할 순간에 인간의 신체는 비이성적으로 작동한다.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공포 마비’ 현상과 연결해 보면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인간의 몸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무기력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과 비슷한데, 이는 오웰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정확히 포착했다는 증거다.
“바로 그 순간 무력감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육체의 배신.”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 무력감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육체의 배신을 생각하고…”
결정적인 순간, 인간은 저항하지 못한다.
고통과 공포에 직면했을 때, 몸이 자기를 배신한다고 느끼며,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저항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체제에 굴복하게 되고 당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통 앞에서 결국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바로 이 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한다.
“가장 중요한 순간, 몸은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저버린다.”
“결국 인간은 당의 고문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육체의 배신’은 오웰이 경고한 디스토피아적 절망이다.
윈스턴이 공포를 느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패배가 아니라, 인간 생물학적 한계 자체가 통제의 도구가 된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1984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람들이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와의 연결 – ‘공포를 이용한 통제’
‘두려움을 통한 정치적 조작’
현대 사회에서도 정부나 권력은 공포를 조장해서 대중을 통제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전쟁 위협, 테러 공포, 경제 불안 같은 요소를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공포 앞에서 저항할 힘을 잃고, 체제에 의존하게 만들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이는 1984의 “공포를 이용한 통치”와 똑같은 구조이다.
사회적 압박과 무기력함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경제적 불안 속에서 ‘어차피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체제에 순응한다. 윈스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저항하는 대신 무력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공포 앞에서 무너진다.
고통과 공포는 생존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항할 힘을 빼앗는다. 당(Party)은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무력화하고, 쉽게 복종하도록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도 ‘공포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체제에 길들여질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공포 속에서는 ‘자발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공포 속에서 저항할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