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을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 가 떠오르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누군가 내게 브라질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너무 그렇다고!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The Girl From Ipanema'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이 음악은 참으로 차분하게 나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리우의 해변으로 데려다주는 기분이 들게 해서, 아마 살면서 제일 많이 재생한 음악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otonio Carlos Jobim)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 음악을 더욱이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브라질이라는 국가가 주는 심미적인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내 친구는 흘러가는 말로 죽기 전에 딱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브라질로 가서 흥겹게 축제를 즐기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축구와 삼바의 나라. 국기에서부터 볼 수 있듯 울창한 청록색 대지 위엔 기분 좋은 커피 향이 그득하고, 푸르른 하늘에는 샛노란 파티클이 흩날리는 축제가 일상인 나라. 브라질은 내게 이토록 환상에 젖은 나라였다. 적어도 며칠 뒤 한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삶의 찌꺼기가 뒤엉킨 곳,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쓰레기 매립지, '자르딤 그라마초(Jardim Gramacho)'. 2010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는 그곳을 배경으로 흘러간다. 거대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카타도르(Catador)'와 그들의 삶을 예술로 바꾸고 싶었던 사진 작가 '빅 무니즈(Vik Muniz)'. 그들은 약 2년간 함께 생활하고 소통하며 재활용 쓰레기를 활용해 카타도르의 초상이 담긴 작품을 만들고, 다큐멘터리는 그 과정을 가감 없이 다루고 있다.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나는 마치 달의 뒷면을 마주한 사람처럼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브라질의 삶이 그곳으로 모였다. 다양한 삶의 잔재들만이 벌거벗은 채 뒤엉켜 있을 뿐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실존하는 곳인지 믿기 어려울 만큼 자르딤 그라마초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
쓰레기 정원엔 울창한 청록색 대지도, 샛노란 환상도 없었다. 그저 삶의 찌꺼기들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희망을 주우려 애쓰는 카타도르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빅 무니즈는 예술로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지니고 그 혼돈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쯤에서 나는 궁금해진다. 과연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디자인은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부유하고 선량한 예술가가, 아무도 시키지 않은 험난한 곳에 직접 뛰어들어가 그들을 예술로 구원하겠다는 것은, 마치 '언더커버 보스(CEO가 신분을 속이고 자신의 회사에서 사원 체험을 하는 미국 CBS 예능 프로그램)'를 연상시킨다. 결국 보스는, 빅 무니즈는 다시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위로 올라갈 것이라는 사실은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시청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인) 나는 많은 것을 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아야 비로소 보인다. 많은 것을 목격하는 충격이 있어야만 그것이 생각에 미치고, 결국은 예술로서 변화를 촉발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호모 센티멘탈리스Homo sentimentalis가 되기 위한 노력
물론, 모든 '시각적 충격'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지는 못할 것을 나는 안다. 내가 목격한 혼란이 변화를 향한 첫걸음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향한 ‘감정’이 필요하다. 공감이나 기쁨과 벅참, 혐오와 공포, 슬픔과 후회와 같은 감정이 마음에서 피어올라야 그때야 변화가 만들어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자신의 책 『불멸(L'Immortalite,Immortality)』에서 언급한 단어, 호모 센티멘탈리스(Homo sentimentalis). 말 그대로 사람은 감정 동물이라는 뜻의 이 단어를 나는 매우 좋아한다. 내가 세상의 다양한 각도를 마주할 때 드는 감정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적인 에너지가 된다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감정이 행동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감성’, ‘감정’이란 말이 너무 많은 곳에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려 안타깝지만 말이다.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는 단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지금 번뜩 떠오르는 이름들을 나열하라면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마크 퀸(Marc Quinn), 뱅크시(Banksy),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 혹은 소설가 한강 정도이지만,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회적 변화를 촉구해보려는 시도를 보여준 예술가들은 정말 많다.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감정은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작품이 품고 있는 메세지의 방향은 모두 비슷하다. 예술이, 디자인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선순환(善循環)’적 구조를 구축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의 지구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동시다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을 나는 절대로 모두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트레이시 에민을 통해 성적인 가해가 한 존재를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바라보고 (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by Tracey Emin), 마크 퀸의 조각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은 신체의 형태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바라보고 (Breath by Marc Quinn). 혹은 소설가 한강이 그려낸 소년을 통해 태어나지도 않았던 1980년 5월의 광주를 아프게 바라봐야만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 그제서야 우리는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다. 구석구석 내가 놓친 아픔은 없는지, 내가 놓친 어둠은 없는지, 들여다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곳은 없는지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출발이다.
아트렉처 에디터_윤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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