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나선 고갱의 삶과 예술-
현대적 야만 VS 원시적 야만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나선 고갱의 삶과 예술-
고귀한 야만인
폴 고갱의 작품 <과일을 든 여인>을 본다.
검고 풍성한 머리칼에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한 여인이 상체를 훤히 드러내 놓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에바다. 화가가 타이티 섬에서 생을 보낼 때 아내로 맞이한 여성으로 추정된다.
에바의 두 손엔 꼭 박처럼 생긴 연두색 열매가 들려있다. 그것에 고리와 뚜껑이 달려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물병으로 쓰이 는 모양이다. 그녀가 허리에 두르고 있는 붉은 바탕에 노란색 꽃무늬가 있는 옷은 파레오로, 현대 여성들이 수영복 위에 둘러서 입는 치마와 유사 하다.
그림의 배경엔 붉은 지붕을 얹은 노란 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나무 밑동에 소담스레 자라난 버섯 같다. 키가 크고 날씬한 나무들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초록 이파리를 넓게 펼쳐 뜨거운 열기로 데워진 땅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이 그늘을 찾아온 타이티 원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가로이 오후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우리는 나무 기둥에 몸을 반쯤 숨긴 채 조심스레 우리를 곁눈질하는 한 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이 수줍은 여인의 뒤로, 어쩌면 그녀의 자매일지도 모를 이가 거북이처럼 고개를 쑥 내밀고 뭐라고 속삭이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저 멀리 아직 걸음마를 떼지 않았을 어린아이를 들쳐 안고 이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는 젊은 여인의 모습도 본다.
고갱은 대도시 파리의 삶을 청산하고 2개월 간의 긴 항해 끝에 남태평양의 타이티 섬에 다다랐다.
그곳은 아직 만물이 지금처럼 정돈된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은 날것의 순수한 세상이었다. "과일들은 이상하리만치 탐스러웠고 열대의 향기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마치 과일 특유의 정열을 그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마술의 과일이었으며, 만일 맛볼 수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영혼의 비밀과 신비스러운 상상의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서머셋 모옴).
고갱은 이 기묘하고도 말할 수 없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타이티의 자연을 화폭에 담았다. 강렬하고 밝은 순 색을 사용해 날고기 같이 붉은 땅과 청금석같이 푸른 바위 그리고 태양빛이 노랗게 물든 들판을 그렸다. 그리고 저 장대하고 신비로운 모습의 타이티인들!
혹 천지를 창조한 신이 진토로 빚어 만든 태초의 인간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티 없이 순수하고 신비로우며 마치 이집트의 여사제와 같은 당당하고 우아한 위엄마저 있다. 이 "고귀한 야만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빛내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너희 어디 가니?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담보로 전력 질주 중이다. "가능한 것은 만들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이진우) 이 야심 찬 슬로건처럼 우리의 길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그래서일까. 자연 상태의 야만을 극복한 현대 사회는 초 단위로 진보하는 기술과 범람하는 산업 경쟁에 휩쓸려 역설적이게도 현대적 야만을 야기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미래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는 우리가 겨우 체득한 습관을 제 손으로 내쫓고 공들여 쌓은 문명을 가감 없이 허물어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생택쥐페리가 탄식하였듯 "단지 새 장난감에 감탄하는 젊은 야만인들"에 지나지 않은 걸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오매불망 기다리는 미래는 정령 황금빛 날개를 달고서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희망찬 소식을 전해올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 생명수와 같은 기대가 도리어 소금물이 된단 말인가! 기쁨보다는 결핍과 불안을 낳고, 우리를 번번이 절망의 수렁에 빠뜨리는 심술을 부리지 않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신기루를 약속 어음으로 받고서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의 포로가 된 우리는 이 황금빛 미끼를 겁 없이 덥석 덥석 물은 대가로 현재를 저당 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현존을 부정하고 미래만을 희구하며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현재의 자신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절망스럽고 아직 자기 자신이 가능태의 자신이 아니란 사실에 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키에르 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든다.
사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요한복음 11장 4절) 그런데도 이 병에 걸린 "나사로는 죽었다"(요한복음 11장 14절). 절망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 인간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거세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고루한 절망의 상태는 원시성의 결핍"이라고 주지한 키에르 케고르의 말을 상기해보자면, 인간은 순수한 본질적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 절망이라는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의 근거를 찾게 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이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생각건대, 이러한 철학적 명제는 고갱의 삶과 그의 예술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갱은 증권거래인으로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했음에도 삶에 대한 심한 권태와 환멸을 느꼈다. 산업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피폐해지고 인간의 순수성이 사라진단 생각에 그는 지치고 메말라갔다. 그러던 와중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통해 타이티 섬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고갱은 그가 추구하고자 한 순수성을 이 타히티 섬의 원시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갱은 파리를 떠나 타히티 섬에 도착한 후 이듬해까지 모든 사물의 기원을 발견해 내는 문제, 존재의 의미와 정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에 숙고했고 그것의 답을 회화로 표현했다 "(신명희 : 2003)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떠난 고갱의 삶
눈부시게 세련된 문명의 상징인 파리를 떠나 인간의 손에 오염되지 않은 땅에서 순수함과 지혜로 채워진 고귀한 야만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고갱에게 안식을 안겨줬다. 불안과 절망의 찌든 때를 벗고 원초적 자아로 돌아간 고갱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키에르 케고르가 일러준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지침과 맞닿아 있다. 먼저 자기의 밖으로 나가고, 그다음 자기를 잊어버리고, 마지막으로 본래의 자기에게 돌아오는 과정 말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고갱의 유럽 도피는 단순히 18세기 말~19세기 유럽에서 성행한 이국취미의 소산으로 볼 것이 아니라, 부패한 문명사회에 물들지 않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인간성의 발견과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한 한 인간의 뜨거운 열망으로 봐야 한다.
혹자는 안정된 삶을 버리고 원시의 땅을 찾아 떠난 고갱의 행보를 보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할지 모른다. 또는 평범에서 벗어난 비범한 순례자의 모습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갱은 단지 이렇게 해명할 뿐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다만 영원한 현재뿐이요"(서머셋 모옴)
영원한 현재. 이것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의식적인 종합이요 깊은 관계이다.
절망에 빠져 그것이 죽을병이 아님에도 죽어버린 나사로를 살린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요한복음 11장 43절) 하고 부른 그리스도의 긍휼이었다. 나사로는 자신의 존재 근원을 신(무한성)에게 찾음으로써 다시 생명(자아의 부재의 회복)을 얻었다. 고갱은 타이티 섬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원시의 힘(무한성)을 경험한 후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던 자기 권태와 삶의 공허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켰다.
자연 속 생명에게는 지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다만 현재를 절대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올바르게 존재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현재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순간순간에 깃든 무한한 존재와 깊은 교제를 나누며 나의 근원을 기억해 내는 일. 그것은 참 기쁨일 것이다.
참고문헌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김정욱 옮김, 소담 , 2003
생텍쥐페리,『인간의 대지: 바람과 모래와 별』, 허희정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 2014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 강성위 옮김, 동서문화사, 2007
이진우, 「근본악과 세계의 사상: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신명희, 「고갱에 있어서 원시주의 연구 」, 동아대학교 미술학과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3
글_아트렉처 에디터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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