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렉처 ARTLECTURE Mar 08. 2019

인간의 원죄는 악함

라스 폰 트리에, <살인마 잭의 집>

라스 폰 트리에, <살인마 잭의 집> - 인간의 원죄는 악함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세계 요약

언제나 금기를 위반하고 파격을 일삼으며, 형식에서의 혁신과 실험을 보여주는 시네아스트 라스 폰 트리에, 그의 최근 작품경향은 그가 앓고 있는 우울증을 영화로 승화하는 작업을 일삼았다. 그의 우울증 3부작인 <안티크라이스트>와 <멜랑콜리아>, 그리고 <님포매니악 볼륨1,2>중에서도, <멜랑콜리아>에서 한 개인을 파멸시켜버리는 불가해한 힘에 다름 아닌 우울증에 대한 탐구가 도드라졌다. 한편 <안티크라이스트>와 <님포매니악 볼륨 1,2>에서는 사드 남작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이를 계승하여, 예술에서 이뤄지는 금기의 위반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을 연구하였던 바타이유적인 주제가 두드려졌다. 전자의 경우 그간 기독교에서 여성에게 원죄의 이름으로 한해진 성적인 억압과 마녀사냥의 역사를 고발하였다. 그리고 후자에선 천박한 것, 동물적인 것으로 일컬어지는 성적인 집착인 색정증에 대한 탐구와, 음지에서 이뤄지는 금기에 다름 아닌 여러 성적 취향들에 대한 탐구를 보여줬다. 이렇게 공고한 기독교적인 원리로 구축된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행해진 여성억압과 성에 대한 탐구, 보편적인 금기의 위반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나 <백치들>에서도 줄곧 행해진 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이러한 라스 폰 트리에는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의 신작 <살인마 잭의 집>에서 금기의 위반을 한층 더 파격적으로 발전시킨다.




*바타이유의 미학 요약

그것은 폭력적인 성적 취향, 사도마조히즘 등을 넘어서는 살인에 대한 쾌락에 다름 아니다. 바타이유는 살인에 대해서 바타이유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금욕적인 종교가 노동 효율을 증진하기 위해서 성을 억압했다고 본다. 성에는 필연적으로 일련의 폭력과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체액이나 피가 쏟아져 나오며 죽음으로 도달해 가는 듯한 심리를 형성하고, 생산을 제외한다면 대단히 소비적이고 노동과는 효율이 먼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당한 진실한 에로티시즘에 도달하기 위해선, 기독교에서 금기로 규정하는 바들을 위반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가학적인 것, 폭력을 마주하며 공포를 마주함과 동시에 느끼는 쾌락은, 바타이유의 입장에서 억압된 본능의 전율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금기 중에서도 죽음은 에로티시즘과 본질적으로 한 쌍이다. 폭력과 출혈, 상처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연상시키며 한 쌍을 이루지만, 성애는 그러한 두려움조차 극복하게 만들며, 궁극적으로 에로티시즘은 죽음조차 넘어서게 만든다. 직접적인 성 행위에서 느끼는 오르가즘은 내가 살아있으면서 죽음의 저편을 맛보며 죽음을 간접적으로 넘어서는 감정이라면, 살인욕구는 그러한 죽음을 자신의 손에 쥐고 흔들며 타인을 희생시키며 자신의 손에 죽음을 쥐고, 죽음을 온전히 통제하는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의 극복과, 이로써 체득되는 극한의 쾌락을 폰 트리에는 본 극을 통해 탐구한다.



*연출 경향

그러한 극한의 위반과 쾌락을 담아내는 본 극의 미장센은 붉은 색이 주를 이룬다. 바타이유가 체액 및 혈흔에서 죽음의 징후가 포착되고, 그러한 징후들에서 띠는 색채인 붉은색을 본 극은 강렬하게 강조한다. 죽음이자 잭의 욕망에 다름 아니며, 잭 자신을 투영한 폰 트리에의 욕망에도 다름 아닐 것이다. 그 이외의 연출에 있어서 폰 트리에는 집대성을 시도한다. 바로 전작인 <님포매니악>에서 줄곧 사용된, 인서트 숏이 잭의 철학의 이해를 보다 시각적으로 돕는다. 또한 <님포매니악>에서처럼 잭이 버지에게 행하는 고해성사 속에서, 일련의 회고록의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본 극은 비정형적으로 일렁이는, 부드럽지만 매우 불안한 핸드 헬드가 강조된다. 이러한 연출은 감독이 1990년대 선언한 도그마 선언의 일부로서, 과거의 연출 경향을 본 작에 끌어온다. 한편 이러한 핸드 헬드는 잭의 혼돈에 다름 아닌 내면과, 견고한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내는 잭의 트러블에 상응한다. 이러한 불안정한 핸드 헬드는, 이 세계를 포착하는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롱숏의 정경과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3부에서의 모자살인을 포착하는 탐미적인 숏, 그리고 에필로그에서의 언급된 블레이크를 연상케 하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강렬하고 회화적인 숏들은 <안티크라이스트>와 <멜랑콜리아>의 경향을 집대성한다. 또한 골든 하트, 미국, 우울증 3부작 등 그의 굵직굵직한 대표작들에서 언제나 수난의 대상이 여성이었던바 또한 지속되고 있으며, 잭에게는 예술에 다름 아닌 살인을 지속하며 강박증이 치료되었다고 언급하는 것을 통해, 영화연출이 그에게서는 치료에 다름 아니었던, 특히 우울 3부작에서 대두되었던 치유적인 예술의 경향도 집대성되고 있다.




*음악 및 낭만주의모더니즘 예술론

이러한 연출 속에서 폰 트리에는 위반 이외에도, 다양한 담론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가장 첫 번째로 눈여겨 볼 것은 그가 지향하고 영향 받은 예술의 경향이다. 본 극에서 인서트 되는 회화들에서 가장 먼저 포착되는 것은 큐비즘 회화다. 회화가 결국에는 선과 색, 질료와 캔버스, 2차원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곧 그것이 본질임을 자각한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곧 예술의 자율성을 주창했으며, 이러한 자율성은 재료에 의해 건물이 결정된다는 잭의 지론에 의해 강조된다. 재료에 그 자체의 본질과 자율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잭의 지론은, 모더니즘의 가장 끝자락(혹자는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규정하기도 하지만)에 놓이는 미니멀리즘을 연상케 한다. 또한 강조되는 것은 바로크 시대 바흐와 비발디의 클래식에 다름 아니다. 음악은 고대에서부터 신이 예술가에게 영감을 투영한, 시각예술에 비해 자율적인 창조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러한 자율적인 예술가는 르네상스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러 천재 개념과 영감 개념을 거쳐 조물주에 버금가는 창조를 행하는 예술가의 지위로 굳혀진다. 이러한 낭만주의 시기는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 그리고 낭만주의 음악가 바그너의 음악들로 대표된다. 또한 잭이 살인을 행하는 와중, ‘신이 계시한 것만 같다’는 언급을 통해 예술가의 천재성 및 영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음악이라는 매체성과 낭만주의 및 모더니즘을 언급하며 폰 트리에는 자율적인 창조를 행하는 예술가라는 자신의 지론을 펼쳐낸다. 자본에 종속되기 쉬운 영화라는 매체의 약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작가성을 잃지 않은 자신을 투영한 상징들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자율성을 위한 아방가르드

이러한 자율적인 예술가는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자신의 예술을 펼쳐낸다. 모더니즘 시기의 본질을 찾고자 하던 일련의 강박처럼, 다시금 교조주의를 되살리려했던 그들의 한계처럼 말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렇게 모더니즘까지 이어진 예술관에만 정초하지 않는다. 본 극의 클래식은 글렌 굴드가 연주한다. 마찬가지로 완벽주의 경향이었지만, 피아니스트로서 그가 보여준 바는 전통의 위반이다. 당대의 통속과 유행에 반하는 그의 해석이나, 전통적인 태도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산만하게 보이는 그의 연주태도는, 전통과 결별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낳았다. 폰 트리에는 이러한 굴드의 연주영상을 줄곧 인서트하며, 아방가르드의 경향과 결합된 진정한 자율성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예술로서 행한다. 언제나 철두철미하게 계획된 태도로 살인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때때로 우발적으로 일어나며 예술에서의 즉흥성이나 우연성을 보여준다. 또한 아이는 죽여서는 안 된다는 예술에 있어서의 최소한의 문법과 윤리가 위반되고, 또한 흑인과 동양인들이 놓인 동시대적인 홀로코스트를 간접 재현한다. 적어도 폰 트리에라는 예술가는 예술 내에서 전적으로 자유롭다. 현상계의 그 어떤 이데올로기와 윤리로부터, 그들이 행하는 모든 속박을 거부한다.



*철학존재

또한 폰트리에는 철학적인 이야기도 펼쳐낸다. 철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관련된다. 1부에서 여성은 잭의 존재를 드러내려 애쓴다. 그리고 끝끝내 잭의 존재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또한 2부에서 잭과 클레어는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투쟁을 끊이지 않는다. 존재는 거짓으로 비호되며, 팽팽한 투쟁 속에서 클레어의 존재가 찰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또한 유년기의 잭이 숨바꼭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은닉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4부에서 잭은 자신의 존재를 고래고래 외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잭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존재의 진리는 치열한 투쟁 속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므로, 만천하에 떠벌려지는 진리는 오히려 타인들이 진리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찰나적으로 드러나는 진리는, 그 존재의 생을 위협하거나 무기가 된다. 1부에서 여인이 자신의 존재를 농담으로라도 드러내자 잭은 이에 위협을 느껴 살인을 행한다. 그리고 2부에서 자신의 과부라는 일련의 존재를 노출한 클레어는 잭에 의해 살해당하고, 또한 이후 알리바이의 명분이 된다. 그래서 폰 트리에는 진정한 존재는 잭의 존재처럼, 동시대의 구조 속에서 너무나 위협적인 것임을, 또한 그렇게 개인이 꽁꽁 숨겨놓는 존재의 진리는 우리가 결코 목도하기 어려운 것임을, 하지만 그 진리를 좇을 수 있는 흔적은 분명 남아있어 찰나적으로 현현하기를 원한다는 철학적 견해를 표명한다.



*철학선과 악

다음으로 선과 악에 대한 지론이다. 버지는 언제나 잭에게서 절대적인 선을 천명한다. 아마도 아가페에 다름 아닌 사랑을 외치며 말이다. 허나 폰 트리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선과 악은 상대적이며, 그것은 죽음에 의해 구획된다. 1부에서 그녀는 잭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연쇄살인마라는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여 목숨을 위태롭게할, 잭의 입장에서 그녀는 악이다. 폰 트리에게서 선이란 곧 자신의 생명에 다름 아니다. 3부의 사냥 직후에 클로즈업을 통해 감각적으로 포착되는 것은 감미로운 음식들이다. 그것이 선이다. 자신의 목숨을 영위케 하는 것, 죽음을 멀리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호랑이와 양에 대한 지론도 그렇다. 이 자연물들은 인간에 의해 절대적인 선과 악의 상징들로 재단된다. 허나 호랑이의 입장에서 자신의 선에 다름 아닌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양을 희생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호랑이의 입장에서 선이며, 양들 또한 결코 악하지 않다고 볼 수 없다. 양들 또한 자신의 선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을 텐가. 그래서 빛에 어둠이 내재되어있다는 일련의 양면성처럼, 그리고 잭과 버지가 한 쌍인 것처럼 선과 악은 명확하게 구획돼지 않는다. 그것은 모호하게 혼재되고 뒤섞여 있다.


그래서 폰 트리에의 입장에서 선이란 결국 생명을 영위케 하는 것, 그 생명은 또한 자신의 생명에 다름 아닌 이기적인 것이다. 선이 죽음의 멂이라는 기준에 의해 상대적으로 구획된다면, 오히려 절대적인 것은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운명을 부여한 이 세계 자체가 악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폰 트리에는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을 포착한다. 3부에서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목적 없는 사냥을 하는 바가, 잭의 입으로 비판된다. 이러한 잭은 사냥법을 익힌 모자를 살해한다. 그리고 아이들만을 박제화하며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타파한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곧 까마귀도 잔뜩 살해한다. 잭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켜 자연의 편에 선 게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므로 그 악함과 예측할 수 없는 혼돈, 그저 본능에 충실한 것뿐이다. 한편 3부의 배경에 자연이라서 그런 파국이 일어난 것이라 치자, 그렇다면 문명 내부는 과연 선하고 악과는 거리가 먼가? 4부를 통해 그렇지 않음을 드러낸다. 문명 또한 이 세계와 자연의 일부이므로, 그 일원들인 인류는 악하다. <도그빌> 및 <만덜레이>에서 강조된 이기적인 공동체의 구성원들, 타인의 생명이 위협받는 것에 타인은 관심이 없다. 그저 재클린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이렇게 세계는 절대적으로 사악하다. 그저 찰나적인 선으로 잠시 악을 망각하고 멀리할 뿐이다.



*욕망

그리고 바타이유적인 본 극의 욕망에 대해 논해보자. 폰 트리에의 여전한 여성 수난극, 희생되는 여성들의 용모에서 서구의 미적인 기준들이 포착되며 욕망의 대상임이 상징된다. 1부와 4부에서의 금발여성들은 서구에서의 섹스심벌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2부의 붉은 머리의 클레어는 서구에서 음탕하고 천박한 여성으로 여겨지며, 에로티시즘을 연상시킨다. 또한 4부에서 재클린을 심플이라 부르는, 주체가 욕망의 대상을 이기적으로 재단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잭이 살인을 행하며 일련의 쾌락을 느끼는 듯한 태도는 2부에서가 대표적일 것이다. 클레어에게 교살을 시도하고, 희미한 목숨만을 남겨놓는다. 이러한 클레어에게 음식을 먹이며, 오롯이 자신에게 종속된 소유물로서 대한다. 사디즘 및 죽음에 근접한 폭력으로, 극단적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욕망이란 곧 소유욕에 다름 아니라는 바를 보여준다. 희미하게 남겨져있는 클레어의 숨통과 사진, 재클린의 가슴지갑과 냉동 창고의 박제들, 허나 쾌락은 길지 않고 죽음의 소유는 공허하며, 욕망은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무르익으니, 연쇄살인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인서트되는 와인제조, 부패되고 건조되고 곰팡이를 피운 포도들이 농익은 와인의 생산요건이다. 그것이 곧 잭의 살해, 그리고 쾌락과 예술과 동일시된다. 쾌락과 예술 또한 생명의 위반 속에서, 근접한 죽음 속에서 무르익는다. 이렇게 죽음과 근접하고, 죽음을 통해 무르익는 욕망은 악하다. 그래서 극악한 욕망은 현상계에서 행할 수 없다.



*규정되지 않은 예술그래서 각각의 개인이 규정하는 예술

이렇게 세계를 비췄으니 다시금 예술로 돌아가 보자. 그간 미학의 역사 속에서 예술에 대한 규정은 그 합의안을 찾아내지 못했다.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 제도론을 거쳐, 결국에는 회의론에 이르며 오히려 예술의 규정은 만인에게 열어젖혀졌다. 그가 자신만의 예술가를 확립했던 것처럼, 이제는 가능한 예술들을 몸소 보여준다. 인서트로는 나치미술들과 전쟁무기, 그리고 독재자들의 우상들과 선전미술들이, 잭의 입과 함께 예술이라 주장된다. 그리고 잭은 흑인과 동양인을 모아 홀로코스트를 재현함과 동시에, 그의 희생자들로 쌓아올린 집을 지어 올린다. 잭이 사용하는 재료의 자율성을 중시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예술들은 오직 미만이 추구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무기 및 잭의 집에서는 선과 거리가 멀고, 선전미술들이나 악의 이콘들에서는 진리와 거리가 멀다. 폰 트리에에게서 예술이란 결국 형식미에 다름 아닌, 미의 추구라는 관점이 강조되며, 그 미란 끝없는 위반을 통해서 일어난다. 허나 그러한 악한 미가 이뤄지는 곳은 현상계가 아니라 가상이다.



*자화상과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현상계에서는 결국 버지가 사랑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바는 에필로그에서 두드러진다. 에필로그를 포착하기 이전에 1부의 상징을 돌이켜보자. 동음이의어로서 공구 잭이나, 잭이 어디에나 있고 고장나있다는 바는 곧 우리들, 이 언어유희는 감상자가 잭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한 잭을 버지가 심연으로 이끌고 은폐시킨다. 그것이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가 대표하는 종교의 역할에 다름 아니다. 현상계에서 우리는 선해야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잭이기도 하다. 버지의 인도로 심연으로 향한 잭은 천국과 지옥을 마주한다. 천국은 평화롭지만 단조로운 노동이 반복되고 있다. 바타이유의 종교에 대한 견해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오히려 지옥은 쾌락과 향락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잭은 이러한 이분법적인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을 뛰어 넘는다. 그 이분법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획되어있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허나 잭은 그러한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다. 제 3의 길을 향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해나간다. 결국에는 죽음으로 향할지라도 말이다. 허나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세계는 악하여 어차피 우리는 절대적인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그 운명을 유희하려면 자유로운 선택을 추구하는 수밖에, 허나 어떤 자유는 죽음이라는 책임을 수반할지어다. 그래서 선하여 죽음을 멀리하려거든 이데올로기에 어느 정도는 순응해야 한다. 허나 삶을 유희하기 위해서 우리는 악할 필요도 분명 존재한다.



*정리

유럽 대륙을 비추거나,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도그마 선언을 행하거나, 미국의 스튜디오 창작 시스템을 신랄하게 꼬집거나, 폰 트리에의 20세기 후반부터 2000년대의 작업은 보다 거시적인 일대기를 보여준다. 허나 그가 저항하기 어려웠던 우울증 투병 이후에는, 그 일대기가 자신으로 향해 보다 미시적인 시선으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미시적인 관심의 종착역이 바로 <살인마 잭의 집>일 것이다. 이전 작들의 형식적인 혁신과는 거리가 멀고, <님포매니악>에서 종합된 바 있었던 형식들은 다소 노곤하다. 허나 다시금 종합된 그의 세계관은 그가 거시적인 관심을 표하든, 미시적인 관심을 표하든, 도그마 선언을 지향하든 탐미적인 미장센을 지향하든, 이들을 결코 구분하거나 결별할 수 없는 그의 총체를 이루는 일부임을 강조한다. 또한 그러한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폰 트리에가 던지는 질문들은 대단히 유의미하다. 어떤 감상자는 견고하게 바라볼 이데올로기의 절대성에 대해서 반문과 의문을 표하며 트러블을 일으킨다. 그렇게 상대성에 흔들리는 우리가 개혁을 일으키고, 비로소 자유로서 욕망에 자유로울지 모른다. 허나 이 파격적인 위반은 예술이라는 가상 속에서만 행해져야만 한다. 현상계에서 버지는 여전히 사랑을 외치고, 잭의 일부를 가둬야만 한다. 허나 현상계에서도 악한 위반은 일어나야만 하며, 잭인 우리는 그 위반을 보다 온건하게 행해야만 할 것이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

https://artlecture.com


매거진의 이전글 신세계로 갈,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