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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Sep 05. 2018

새로운 시대의 영화

-워크숍, 서치, 해피엔드-

새로운 시대의 영화 - <워크숍>, <서치>, <해피엔드>


*동시대의 새로운 시뮬라시옹

시각예술의 재현이라는 쟁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부터 시작된다. 플라톤은 회화나 조각과 같은 미술들을 두고 이중모방이라 폄하하였다. 플라톤의 시선에선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계의 사물들 또한 절대자의 이상세계인 이데아로부터 분유된 모조품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물질계를 가득 메운 사물들 또한 한 번 모방된 모조품에 불과한데, 회화나 조각과 같은 시각미술들은 이 모조품을 한 번 더 모방하여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이중모방으로 이는 당대의 시민들을 기만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스 홀바인이 헨리 8세의 재혼을 위해 왜곡을 행한 <클레페의 앤>이나 귀족들의 권위를 위해 의도적으로 차갑고 딱딱하게 그려낸 브론치노의 <톨레도의 엘레오노라>같은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기만이라는 관점은 일부 타당할지도 모른다. 허나 관점을 달리하면 기만이라는 표현 대신, 이 같은 작품들이 현실과 유리되어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될 여지도 있다.


이에 주목한 것이 보드리야르로서 그는 우리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조전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는 개념으로, 그리고 이 결과물을 시뮬라크르로 규정하였으며, 플라톤의 표현대로라면 이중모방물인 이들이 현실의 거울이라는 관점을 넘어서 독자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현실에 귀속되고 종속되어야 할 시뮬라크르들은 지시대상이 부재하여 독자적인 영향을 갖고, 역으로 현실에 영향을 주기에 이른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대상들은 시뮬라크르들을 지시대상으로 삼아 이를 모방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20세기만 하더라도 시뮬라시옹의 주체들은 소수에 집중되어 있어 결코 그 권력이 평등하지 않았다. 허나 동시대에 이르러 가장 대중적이고 힘을 가진 시뮬라시옹은 sns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그래서 동시대에는 많은 대중들이 주체적으로 시뮬라시옹을 하기 에 이르고, 이러한 시뮬라크르들은 현실세계와의 경계를 더욱 허문다. 이러한 동시대에 영화는 태생부터 플라톤이 이를 봤다면 이중모방이라 표현했을 것이고,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시뮬라시옹에 다름 아니다. 허나 동시대에 더욱 독특한 시뮬라시옹의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영화들은 이제 현실을 재현하지 아니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비춘다. 플라톤의 표현대로라면 이는 삼중모방이리라. 이렇게 어떤 본질에서 삼중으로 멀어진 상태를 비추는 영화들이 아나쉬 차간티의 <서치>, 미카엘 하네케의 <해피엔드>, 그리고 로랑 캉테의 <워크숍>이다.



*새롭게 태동하는 매체의 홍수에서 기존 매체들의 역할에 대한 고찰 로랑 캉테의 <워크숍>

가장 먼저 로랑 캉테 감독의 <워크숍>이다. 로랑 캉테 감독의 대표작 <클래스>에서 그의 색채가 오롯이 비춰지듯, 그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로빈 캉필로와 함께 현실을 비추고 사회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작업을 줄 곧 행해왔다. 이렇게 현실을 냉엄하게 비추는 로랑 캉테 감독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들이 범람하는 동시대의 동향 또한 그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고 비춰야 할 사명과도 같으리라. 로랑 캉테 감독은 이러한 시기에 동시대에 태동한 RPG게임이나 sns라는 시뮬라시옹의 이미지들을 현실의 이미지들과 분별없이 교차시키고, 새롭게 태동하는 매체들 속에서 이제는 아날로그 매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의 역할에 대해 재고하는 작업을 본 작 <워크숍>에서 행한다. 이는 주체적인 행위자의 역할을 요구하는 동시대의 시뮬라시옹 때문에 이전 시대의 다소 수동적인 시뮬라시옹이라 볼 수 있는 영화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로서, 사진과 영화의 태동 이후 다른 역할을 찾아 나서던 회화의 고찰을 이제 영화가 행하게 된 것이다.


로랑 캉테 감독은 이러한 매체들의 오락성에 집중한다. 액션이나 모험담에 대해서 대중들이 보다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게임과 같은 시뮬라시옹들이 존재한다면, 과연 보다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영화의 오락성이 이와 대비하여 어디에 이점이 있을까 하는 고찰인 것이다. 이러한 ‘워크숍’에서 영화를 찍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들이 만들려는 범죄소설, 즉 소설이라는 매체에 대신 투영된다. 이러한 워크숍의 학생들은 범죄소설을 만들려는 의욕이 제시된다. 하지만 단순히 폭력만을 향유하기 위해선, 그 폭력을 가상세계 속에서 보다 주체적으로 즐기는 새로운 시대의 매체들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본 극에서 주목하는 바는 영화는 그러한 오락성에 동참 하면서도 결국에는 현실 참여적이고 반영적인 역할을 충실히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랑 캉테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는 결국 현실반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폭력을 유희하며 다루더라도 이에 책임을 갖고 다뤄야 한다는 것이며, 영화가 허구일지라도 그 속에 구축되는 세계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보다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매체의 주체적인 폭력성은 분명 아날로그 매체의 폭력성보다 매혹적이다. 한편 그렇게 범람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무법천지라는 것이다. 판타지 게임을 하는 앙투안의 모습에서 그것을 현실에서 따라하리 라는 위험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유리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은 현실과 차이가 없는 시뮬라크르들의 폭력성과 자극성,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양지에서 유폐되었던 파시즘의 망령이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 다시금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반영하는 범죄소설을 본 극에서 다루며 이에 안티테제로 작용시킨 것이다. 즉 과격하고 폭력적인 시뮬라크르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오히려 현실에서 이를 모방하게 만드는 동시대의 새로운 위험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만인에게 평등한 시뮬라시옹이지만 이에 책임을 수반하지 않아 이내 곧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귀결된 것이다. 새로운 매체의 방종 속에서 영화는 여전히 동시대에도 그것의 행위자가 소수 독점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특권’을 가진 자들은, 그 특권에 대해서 보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으며, 그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책임을 보이는 태도는 동시대의 시뮬라시옹을 행하며 부조리를 불러일으키는 이들에게 안티테제로 작용한다.


즉 이렇게 현실에 침투하는 거짓 시뮬라크르들 속에서,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영화들은 이 같은 바에 대해서는 안티테제로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 로랑 캉테 감독의 동시대에 대한 입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동시대에 다시 불어 닥치는 파시즘의 물결에 주목하고, 무엇보다 이러한 파시즘의 망령이 만인에게 평등해진 시뮬라시옹을 인하여 더욱 팽창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파시즘의 망령이 꿈틀거리고, 그 망령이 예술가의 자유로운 예술혼을 억압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자유로운 예술혼은 결코 굽혀질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혼에는 사회와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어, 방종한 시대에 속에서 시뮬라시옹에 대한 자유의 책임 또한 강조한다.



*사이버스페이스로 이행된 물질계 – 아나쉬 차간티의 <서치>

다음으로 아나쉬 차간티 감독의 <서치>이다. <서치>는 실종된 딸 마고를 찾는 다비드의 여정을, 오직 새로운 시대에 범람하는 시뮬라크르들로만 제시한다. 영화를 이루는 모든 이미지는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범람하는 새로운 이미지들로, 명백히 그 가상성이 명시된다. 가상성을 은폐하려하는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사진이나 영화와는 다르다. 이 이미지들은 동시대의 감상자에게 결코 새롭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만연하여 주목하지 않는 보편적인 이미지들이다. 허나 감독은 이러한 이미지들에 빠른 리듬의 긴장감 넘치는 숏들과 줌인, 클로즈업 등을 통해서 긴장감을 부여하고, 스릴러로서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처음 태동하였을 때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미지였지만, 도처에 만연하여 이제는 새롭지도 않고 주목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들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시뮬라크르들이 일상화되어가면서 우리 물질계를 모두 대체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계가 사이버 스페이스로 대체된 작금의 현실에 대해서, 감독은 그 순기능과 역기능, 양자 모두 다뤄내며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먼저 순기능으로써 유실되기 쉬운 인간의 기억이나 훼손되기 쉬운 아날로그적인 저장방식 대신, 디지털 시대의 저장방식이 반영구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의 맹점을, 반영구적인 저장매체들이 메꿔 나간다. 이렇게 디지털시대의 저장방식에 간직된 인간의 추억들은,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간의 총체를 이룬다. 딸 마고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암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되는 아내의 삶까지, 저장된 기억의 편린들이 인간의 삶의 총체를 이룬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을 온당 담아낸다, 죽음까지 말이다. 이렇게 새로운 시뮬라시옹에 의해 온전히 대체된 인간의 총체는 보다 체계적으로 수합되어, 마고 실종 수사는 이를 토대로 진전된다. 아날로그적인 수사방식으로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일들이 단 5일 만에 모든 증거들이 수집된다. 더욱이 인간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다비드가 감상하는 유튜브의 음악 비디오나, 생중계되는 방송매체들은 이러한 현실과 양자 간의 질적 차이를 구분할 수 없어, 감상자들이 현실과 가상을 분간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현실과 가상 간의 거리가 좁혀진 상황에서, 원거리에서 공무를 집행하거나 예술을 향유하는 등 인간의 생활을 더욱 윤택한 방향으로 진보시켜 나간다.


한편 이후 포착되는 악기능은 이러한 시뮬라시옹을 제어할 제도의 부재를 지적한다. sns를 통해 자신이 투영된 시뮬라크르를 만들 수 도 있지만, 자신과 전혀 무관한 가상에만 존재하는 시뮬라크르를 형성해 낼 수 도 있다. 마고의 실종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믿은 비극에서 비롯했다. 더욱이 시뮬라크르는 이중 모방의 세계다. 플라톤식 표현대로라면 진실에서 이중으로 멀어져있다. 물질계와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인격은 양분된다. 빠른 시간에 인간의 온 삶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한 시뮬라크르지만 그 시뮬라크르를 지배하는 법은 여전히 미비하고, 양분된 인격 중 익명의 힘을 믿어 자유는 이내 곧 방종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책임지지 않는 시뮬라크르의 생산자들은 옐로우 저널리즘을 행하는 자극적이고 악의적인 기자가 되어간다. 더욱이 이렇게 양분된 인격 속에서 진실은 더더욱 멀어진다. 나 자신이 본인의 시뮬라크르를 형성하며, 왜곡된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세계에서 타인의 진실을 왜곡하기란 더욱 쉬운 일이다. 더욱이 그러한 시뮬라시옹의 꼭대기에 위치할 수 있을 권력자라면 우리가 마주하는 시뮬라크르들의 진위를 의심하게 만든다. 결말에 의해 밝혀지는 로즈마리 형사의 진실이 그렇다. 로즈마리 형사는 모든 것을 조작 가능한 위치에 서있는 권력자로 시뮬라크르들을 왜곡하거나 그 해석 방향을 뒤틀어, 시뮬라크르들을 전제로 한 수사의 전체를 왜곡시켰다.


즉 권력자에 의한 시뮬라크르의 왜곡이지만, 한편 진실을 왜곡하는 권력자를 지적하는 것이 크게 놀라운 것은 아니다. 가상이 이토록 범람하기 이전에도 부패한 권력자들은 아날로그의 형태를 띤 진실이나 시뮬라크르를 흔히 왜곡해 왔으므로, 그것이 특별히 더 쉬워졌다거나 범람하게 된 것은 아니다. 즉 시뮬라크르만을 토대로 하여 진행된 수사에 제기할 만 한 비판이라기엔 만연한 부패상이다. 이렇게 영화는 물질계가 온전히 이행된 시뮬라시옹의 악기능을 포착하지만, 이는 여전히 물질계에서 가면을 쓰고 진실을 은폐하는 우리들의 태도와도 관련된다. 즉 진실과 거짓에 대한 문제는 굳이 시뮬라크르들이 대두되며 생성된 문제가 아니란 것을 감독은 지적한다. 이렇게 현실과 똑같은 문제에 처한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이 세계가 온전히 이행됐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현실에서도 우리가 진실을 파악하려는 열띤 노력이 사이버 스페이스로 이행된 새로운 세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무수한 현실 속에서도 거짓들은 범람하고, 우리가 마주하는 그 무수한 시뮬라크르들이 진실일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게 현실의 것인지 시뮬라크르인지를 구분하는 것보다, 우리가 무엇을 마주하든 그것의 총체와 진실에 다가가려는 대상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독은 <서치>를 통해서 역설하는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발전 속에서 여전히 미해결되고 방치된 문제들 – 미카엘 하네케의 <해피엔드>

마지막으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해피엔드>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근작인 <하얀 리본>이나 <아무르>의 건조함이나 리얼리즘을 생각한다면 그가 적나라하게 sns 이미지들을 포착하는 것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상황설명을 위한 인서트숏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하네케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특유의 메마른 롱테이크로 이를 긴 호흡으로 집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90년대에 공개한 <베니의 비디오>나 <퍼니 게임>, 그리고 2005년의 <히든>에서 당대에 태동한 새로운 매체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더욱이 그러한 매체들에 만연히 뒤따르던 폭력성을 지적한 것을 생각하면 <해피엔드>의 적나라한 sns의 이미지들이 그리 놀랍지만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여전한 관심사다. 본 작 <해피엔드>는 하네케 본인의 전작들을 프랑스 칼레의 부르주아 가족에 집대성한 작품으로, 늙은 조르주의 행동이나 발화들에선 <아무르>가, 일방적인 성격을 띤 욕망에서는 <피아니스트>가,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향한 여전한 우월적인 태도 및 파시즘의 암시는 <하얀 리본>이 암시된다. 허나 본 글에선 하네케의 90년대의 관심이 어떻게 2017년으로 옮겨오고 있는지만 다루도록 하겠다.


하네케는 본 작의 오프닝에서부터 에브의 폭력성이 고발하고, 이를 sns 스트리밍 이미지로 포착하여 <베니의 비디오> 및 <퍼니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드러낸다. 에브는 햄스터에게 어머니의 우울증 약을 먹이는 장면을 스트리밍하고, 그녀는 소셜 네트워크의 자극적인 영상들에 심취된다. 성장기에 폭력성은 부모의 시선을 회피하여,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비판적으로 체화되어 간다. 이는 실제로 에브가 친구를 독살시도 했다는 발화를 통해서 드러낸다. 에브는 무감정적으로 보이고 공감능력도 결여되어 이에 죄책감을 띠지 않으며, 더 이상 본인이 감상하며 향유하는 수준의 폭력이 아닌, 본인이 직접 폭력을 행해 정복감을 느끼려는 사이코패스적인 형태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 같은 바는 <베니의 비디오>나 <퍼니게임>에서의 인물들을 연상케 하며, 대중문화의 현실에 침범할 수 있을 만연한 폭력들이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체화되어 감정형성 및 심리에 악영향을 끼침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성은 정제된 형태의 가상성이 명시되는 폭력이 아닌,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 자체의 폭력으로서, 일상을 만연히 침범하는 폭력이다. 더욱이 에브가 어머니의 사생활을 스트리밍을 통해 폭로하는 것을 통해, 무법천지에 다름 아닌 범람하는 폭력적인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경종을 울린다.


에브 외에도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은 이러한 sns를 토대로 소통한다. 오프닝에서 에브의 스트리밍의 이미지들이 드러났다면, 이후에는 공사장의 cctv 이미지로 이어지며, 이후에는 스마트폰으로 통화에 열중하는 안느의 모습과, 로렌스가 감상하는 보도영상을 포착한다. 시뮬라크르들과 현실의 경계는 구획되지 않고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오히려 현실을 침범하는 시뮬라크르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극중 부르주아들이 현실에서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기에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나누는 대화들이 더욱 적나라하고 진실에 가깝다. 그들이 가면을 쓰고 행하는 저녁식사는 감정을 찾아보기 어려운, 기계적인 냉기로 가득 메운다. 이를 통해 현실이 진실이고 시뮬라크르가 허구라는 도식 또한 깨뜨린다. 이는 에브의 부친 토마스의 불륜과, 사도마조히즘에 가까운 그의 물질계에서 금지된 진실한 욕망이 sns에서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한편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민낯들이 sns속에서 드러나도, 그것은 영화를 마주하는 감상자에게 허락된 기쁨일 뿐 이는 만천하게 공개되지 않는다. cctv를 통해 고발된 사고나 자신들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본을 통해 무마하고 은폐하려는 시도들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는 <베니의 비디오>, <퍼니 게임>이후의 부르주아지에게 집중된 매스미디어의 권력을 고발한 <히든>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20세기의 <베니의 비디오>와 <퍼니게임>, 그리고 21세기의 <히든>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2017년, 그리고 2018년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기술은 끝없이 진보하지만 이를 통제할 제도는 몇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부재해있고, 그 매체에 담긴 폭력성은 동시대의 청소년들을 사이코패스로 성장시킬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외에도 하네케가 다른 작품들에서 제기한 문제들 또한 여전히 잔존하여 남아있는 하나의 암담한 지옥도이지만, 본 극의 제목인 <해피엔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행복은 부르주아지가 은폐하려는 붕괴하는 진실이 고발되는 것을 마주하는 본 극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그 고발상은 감상자뿐만 아니라 영화 속 스트리밍을 시청하는 대중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안느는 자신들의 병폐를 끊임없이 은폐하려했지만, 이는 그저 아이폰을 든 에브의 손에서 쉬이 고발된다. 하네케가 포착한 미디어의 문제들 대부분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결말 또한 죽음조차 조롱되고 유희되는 작금의 현실이 녹아있다. 이러한 미디어의 현 상황에서 그 유일한 순기능이라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것, 더 이상 그것의 왜곡이 부르주아지의 손아귀에서 쉬이 놀아나지 않으며 그들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네케가 말하는 동시대의 유일한 행복일지 모른다.



*정리

사진-영화라는 시뮬라시옹들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효율성을 지닌다. 그 경제적인 효율성 때문에 회화는 더 이상 대상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역할을 탐구하기에 나섰다. 그렇게 현실을 스크린 속에 재현해내던 영화가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계가 아닌, 동시대에 새로이 태동하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비춘다. 물론 사이버스페이스를 비추는 영화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먼 미래를 예고하는 공상과학 영화랄지, 현실을 부차적으로 설명하는 인서트 숏에 그쳤다. 하지만 동시대에 새로운 세태를 비추는 영화들은 그러한 사이버스페이스와 가상현실을 보다 적나라하고 과감하게 비춰내며, 현실을 비추는 씬들과 별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렇게 시뮬라시옹 된 가상현실을 비추는 영화들은 이제는 먼 미래가 아닌, 당장의 현재에 다름 아닌 물질계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로 이행되는 세태를 비추고 예고한다.


이렇게 동시대와 근시일의 미래를 비추는 영화들 중 <더 워크숍>은 그러한 가상세계의 역할 중 수행자가 주체적으로 행하는 오락성에 집중하여, 보다 주체적인 매체들의 태동 이후 아날로그 매체들의 오락성에 대해서 반문하고, 보다 작가주의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사회파 감독으로서 오락이 됐든 진중한 표현수단이 됐든 현실을 보다 면밀히 비출 것을 요구하며, 그 현실에는 현실에 침투하는 가상현실이 예고되고 있다. 그리고 <서치>는 물질계에서 가상현실로 그 역할이 모두 이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시뮬라시옹을 통해 현실을 온전히 대체 가능함을,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시뮬라크르의 결과물을 비춰내며 온전한 삼중모방을 행하고 있음에도 현실과 멀어지지 않음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해피엔드>는 오히려 현실에서 우리는 여러 이데올로기와 제약 속에서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으며, 오히려 익명성을 무기로 어떠한 제약이 없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민낯을 드러냄을 보여준다. 그래서 삼중모방된 결과물들이 진실에서 멀어지는 게 아닌, 오히려 물질계의 현실을 모방한 시뮬라크르들 보다 진실에 근접함을 보여준다.


이렇듯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서 공개되는 작품들은 기존에 시뮬라크르로 여겨졌던 것들을 재현하는, 새로운 시대의 재현의 형태를 보여준다. 새로운 재현으로 온전히 대체되는 <서치>의 경우 8월 29일 개봉하였으며, 삼중모방된 시뮬라크르들에 진실이 내재됨을 포착하는 <해피엔드>는 하반기 개봉 예정이다. 이러한 시대에 예술의 역할에 대한 진솔한 고찰이 담긴 <더 워크숍>은 국내 미수입 작으로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는데, 부디 국내 상영기회가 추가로 있어 기존 아날로그 예술들에 대한 고찰의 장을 국내의 보다 많은 감상자들이 겪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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