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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Mar 18. 2019

행복은 어디에나 있지: 에바 알머슨과 일상 다시보기

-헤테로토피아 혹은 헤테로크로니아의 세계

행복은 어디에나 있지: 에바 알머슨과 일상 다시보기 

-헤테로토피아 혹은 헤테로크로니아의 세계



몇 해 전, 난생 처음 KIAF(Korea International Art Fair)에 갔을 때였다. 세련되기도 하고 난해하기도한 현대 미술의 향연 속에서 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미소짓고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가득한 그림. 혹은 웃음짓고 있는 가족들의 그림. 정교하거나 힘있는 붓터치도, 독특한 색감이나 소재도, 그 어떤 ‘전문가적인’ 특징도 뽐내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옆집 소녀처럼 친근했고, 큰언니처럼 따뜻했고, 아이처럼 밝고 맑은 그림이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현대미술의 위압감 속에서 기가 죽어 있던 관람객에게 그 다정하고 온화한 그림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요리, 세리그래프, 2015 – 달콤한 컵케이크는 에바 알머슨의 그림과 꼭 닮았다.



미술을 전공으로 삼지 않은 일반인은 그림을 볼 때 지극히 단순하고 평이한 기준을 적용한다. 그림이 아름다운가? 보았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집에 걸어놓고 싶은 그림인가. 에바 알머슨의 그림은 이 세 가지 조건에 모두 적절히 들어맞는다. 특히, 만약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방에는 에바 알머슨의 그림을 걸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보기만 해도 미소를 머금게 되는 에바 알머슨의 그림을 벽에 걸어준다면, 아이는 적어도 그림을 보는 순간만큼은 활짝 웃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른마저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에바 알머슨의 그림을 방에 걸어놓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훈육이 필요 없이 바르고 명랑하게 자라날 것만 같다. 아이의 화폭에는 밝고 건강한 색채로 가득 찬 그림이 그려질 것만 같다. 


비단 내 아이나 내 가족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밝고 기쁜 모습을 보고 싶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싶고, 다른 사람들의 기쁜 소식에 함께 기뻐하고 싶다. 누구의 인생도 꽃길만 가득할 수는 없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더더욱 행복은 나누고 부풀리고 전이시키고 싶다. 이처럼 즐거움이 가득한 가족의 모습, 이토록 어여쁜 소녀의 모습. 소박하고도 즐거워 보이는 가족의 그림. 축제같은 일상과 일상 같은 축제를 살아가는 듯한 그림. 아이의 방에 걸어주는 일은 아직 요원한 바람이기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 행복을 나눠주는 일로 대신한다. 집들이나 결혼 선물을 할 때 종종 에바 알머슨 그림엽서에 편지를 써 주곤 했다. 좋은 일이 그의 삶에 가득 머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는 에바 알머슨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



꽃길, 세리그래프, 2015 – 꽃길만 걷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가족초상화, 세리그래프, 2016



사람의 마음과 눈은 비슷한 것인지, 에바 알머슨의 그림은 유독 다양하게 상품화된다. 비교적 흔한 에코백이나 우산을 넘어 발매트, 마우스패드, 손거울, 그릇과 보온병까지. 상업화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상품가치가 인정받았다는 것은 불특정다수의 대중에게 그만큼 동일한 감동과 매력을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누군가는 예술이 사회를 대변해야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순수하게 예술 본연의 기능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공허가고 고갈된 마음에 따사로운 행복을 불어넣어 주는 것 또한 예술의 기능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삶이 행복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미술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 드라마의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바꿔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곤 하는 요즘, 결핍된 행복을 예술이, 문화가 채워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대중의 바람이며, 그 허기를 달래주는 것 또한 예술의 역할은 아닐까. 대중에게 밝고 건전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 아닐까. 


에바 알머슨의 그림은 그 행복의 비결이 얼마나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 속삭인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 강아지와의 산책, 그네를 타는 모습, 연인과의 데이트 등 흔한 일상을 단순하고도 명랑한 색채로 그려낸 그림은 그림일기를 보는 것처럼 친근하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명료한 선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색감. 미술이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쉽고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을 화가는 알려 준다.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결국은 집 안에 원래 있었던 자신들의 새가 파랑새임을 알게 되는 동화에서처럼,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행복이 실은 거창한 것이 아니며 일상에 숨어 있다는 흔하고도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평범한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에바 알머슨의 그림은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을 연상시킨다. 빨간 웨딩드레스를 입고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레이첼 맥아담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영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자주 등장하는 에바 알머슨의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익숙한 일상을 다시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근거린다는 점에서 영화의 교훈이 그림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행복의 비결을 말해 준다. “나의 특별하고도 평범한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하고 즐겁게 매일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부자도 빈자도, 현자도 범인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행복하거나 더 크게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삶의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특별하고도 평범한’ 일상을 ‘완전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행복의 비법임을. 


행복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흔히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스어 eu(좋다) 혹은 ou(없다)와 topia(장소)라는 단어를 합성한 이 단어는 ‘세상에 없는 낙원’ 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대신 이 그림은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이 단어는 heteros(다른)와 topos(장소)의 합성어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인 유토피아와는 달리, 현실에 존재하는 이상세계를 지칭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다른 시선으로 같은 장소를 보는 것’ 만으로도 헤테로토피아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내 본다. 익숙한 공간도 색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나만의 헤테로토피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좀 더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공간이 아닌 시간으로도 이 개념을 확장해 본다. Heteros(다른)와 chronos(시간)의 합성어인 ‘헤테로크로니아’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평이한 시간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시간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 믿으며. 


여기 말고 저기, 다른 어딘가를 찾아야만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너무 힘겹게 느껴진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비행기표를 살 수도, 다음달 카드값을 외면할 수도 없고, 푸와그라나 트러플버섯 대신 김밥과 떡볶이를 먹어야 하는 일상이지만 행복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매일 오가는 출퇴근길도, 매일 만나는 사람들도, 매일 듣는 음악도 행복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은 그렇게 그림이 되고, 작품이 되고, 행복이 된다.



*에바 알머슨 전시회 ‘행복을 그리는 화가’ 가 마침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3월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3월, 새로운 학기와 새로운 봄날에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들르기에도 적합한 전시회다. 

링크:http://www.sac.or.kr/SacHome/exhibit/detail?searchSeq=34877



Andando, 캔버스에 오일, 2018


영화 <어바웃 타임>, 리차드 커티스 감독, 2013


행복, 캔버스에 오일, 2018


무도회, 세리그래프, 2016


공기, 캔버스에 오일, 2015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반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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