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신의 축복인가 악마의 저주인가
천재의 징표 VS. 가망 없는 정신병
:멜랑콜리, 신의 축복인가 악마의 저주인가
여기 알브레히트 뒤러의 유명한 동판화 <멜랑콜리아 1>(1514)를 보라. 천사가 주먹을 꼭 쥐고서 머리를 괸 채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져있다. 이러한 모습은 미술사에서 통상 ‘멜랑콜리 포즈’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그림 속 천사의 모습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고집스레 움켜쥔 혼란스러운 사색가의 모습이다" 라고 묘사 하였다.
'멜랑콜리 mélancolie'는 흔히 우울 또는 우울감, 우수 등으로 번역된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멜랑콜리를 포함한 네 가지 체액설을 하나의 의학이론으로 확립하였다. 히포크라스는 인간의 몸에는 “혈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점액”의 네 가지의 체액이 있으며 이것은 서로 다른 네 가지 기질 -성마른(choleric), 침착한(phlegmatic), 낙천적(sanguine), 멜랑콜리(melancholy)- 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멜랑콜리커는 이 가운데 검은 담즙이 과도하게 넘쳐흘러서 어둡고 우울한 성격을 소유한자를 의미한다.
멜랑콜리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예술 방면에서 비범한 재능을 드러낸 이들이 모두 멜랑콜리커였다고 증언한다.: 철학과 정치, 시 또는 예술 방면의 비범한 사람들이 왜 모두 명백히 멜랑콜리커였을까? 더구나 헤라클레스의 영웅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왜 몇몇 사람은 검은 담즙으로 야기된 질병 속에서 고통스러워했을 정도로 멜랑콜리커였을까?(아리스토텔레스, 『문제들』 , 김동규 역)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제들』에서 기술한 '비범한 사람들'이란 문구는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 위대한 예술가이자 천재로 이해된다. 낭만주의자들이 볼 때 비범한 천재들은 응당 멜랑콜리라는 성스러운 질병을 앓게 마련이었다. 이들의 몸속에서 과잉 생산된 검은 담즙은 종잡을 수 없이 특별한 기질을 갖게 한다. 마치 술에 취하면 -더없이 친절해지거나 도리어 난폭해지는-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듯, 마치 포도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검은 담즙은 이들을 지속적으로 보통의 상궤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어둡고 우울하며, 정상 내지 중심부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소외되고, 자기학대를 일삼으며 점차 광인이 되어간다. 이처럼 격분과 고통이 극에 달아 광기에 빠져든 자는 "진리를 바라보는 더 예리한 눈"(프로이트)과 열정의 과잉 –최소한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 최대한 본질에 육박해 간다는 뜻에서- 을 동력으로 하여 창조적인 예술가가 된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멜랑콜리가 커다란 죄악으로 치부되었다. 이 시기에 멜랑콜리는 관심이 없는 무력한 상태로, 13세기에는 나태로 까지 여기었다. 일례로 단테는 ‘이성의 선을 잃은 고통스러운 군중들’을 ‘비탄의 도시’(<지옥편>, 제 13곡)에 배치시켰다(강은실 : 2012).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유명한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 『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의 개념을 기독교적 교리와 신앙에 기반 하여 해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태초의 인간인 아담의 원죄로부터 시작된다. 멜랑콜리는 신의 뜻을 저버리고 악의 유혹에 넘어가 영원한 생명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된 아담의 슬픔이다. 그리고 그의 죄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이 자신의 본향을 갈망하고 본래의 자아를 찾고자 괴로워하는 심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통은 정신성(자기반성적이고 진리를 추구하는)의 인간들에게 유독 혹독하게 일어난다.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이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그러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멜랑콜리를 천재의 징표이자 신의 축복으로 칭송하였다. 특히 멜랑콜리가 사색하는 인간의 내적 성찰과 관련되면서 거울을 통해 내면을 바라보는 인간의 이미지가 멜랑콜리의 표상으로 등장하였다. 거울은 바로크 시대에도 주요한 소재로 이어져 헛됨(vanité),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모티프로 해골과 모래시계 함께 자주 이용되었다.
낭만주의 시대 이르러서 멜랑콜리는 세기병(mal du siècle)이라는 시대적인 징후로까지 나타났다. 멜랑콜리 증상과 현대성(Modernity)과의 관계를 논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특히 보들레르의 역할이 컸다. 보들레르에게 있어 멜랑콜리는 되찾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상실의 감정이자 『모욕당한 달』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여인이 삶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정신적 자기 분열 속에서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 피폐해진 세기의 아이야, 난 네 어미를 보고 있다. 무거운 세월의 더미를 거울 앞에 기울이고, 너를 젖먹인 가슴에 솜씨 있게 분칠 하는 네 어미를!” 보들레르, 「모욕당 한 달 La lune offensée」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랑의 대상(리비도)을 상실하고 애도의 가능성 –다른 대상으로의 리비도 전이, 즉 슬픔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찾거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서 고통의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마저 불가능해지면 자아는 자신을 리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주장했다. 이때 자아는 상실한 대상과(감정적으로 혹은 실제로 잃어버린) 자기 동일시를 하면서 자아의 상실감을 느끼거나, 자아와 대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김동규 : 2010). 이러한 "자기 징벌적" 성향은 상실한 대상에 우회적으로 복수하는 것이자, 대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자기 스스로에게 돌리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예가 자살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커가 느끼는 고통은 엄밀히 말해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보다는 자아의 상실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가 「슬픔과 멜랑콜리(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주장하기로, 리비도의 대상을 자아와 동일하게 대체하는 과정에서 리비도가 근원적 나르시시즘의 자아애로 숨어든다.
자아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양가감정(애증이 병존하는)을 느끼며, 대상을 상실할 시 분노를 느끼다가도 스스로에게 책임을 느껴 자기를 과도하게 비난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자아가 이미 대상을 내면화했기 때문에 그 증오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상의 상실과 그로 인한 증오- 촉발된 불쾌감은 자기 보존 본능에 위배되는 것으로 자아는 자기 상실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한편 "대상의 자기 동일화"를 통해서 자아는 대상과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할 수도 있다. 도저히 상실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멜랑콜리커는 그 대상을 자신의 마음속에 영원히 안치시키고 대상을 자신의 부분으로 위장시킴으로써 그와 분리되는 고통에서 해방하고자 한다. 그렇게 되면 종국엔 슬퍼도 슬픈 이유를 모르게 된다. 따라서 자기 비난, 자기학대가 멜랑콜리적 증후가 듯, 슬픔의 이유를 모르는 것 또한 주요한 멜랑콜리적 증후로 해독된다(김동규 : 2010).
자기 징벌적 멜랑콜리 증상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현대인에게 더욱더 가혹하게 이루어진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과 성과주의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성과 주체인 '나'는 더 많은 성과를 내려고 스스로를 압박하는 통에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성과 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성과사회에서는 타인의 강제에 따라 복종적 노동을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자유로 스스로 노동을 한다. 이때 내면의 자유와 강제가 동시에 일어나게 되면서 주체는 피로를 느끼며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울할 때에 현격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갈증이다. 갈증이 들끓는 자리에는 언제나 상념이 들어앉는다. 이 상념들은 젖은 머리카락처럼 엉켜 붙어서 신경을 자극하고 불안을 유발하며 급기야는 살기에 치닫게 한다. 보들레르 또한 시 「고양이 Le Chat(51번)」에서 자신의 머릿속에 살고 있는 정령인 고양이가 "제 왕국 속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주재하고, 부추긴다" 라고 묘사하지 않았나!
상념으로 가득 찬 자신의 내면의 풍경을 지켜보는 일은 지옥과 다름없다. 상념 속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한구석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소설가 송기원은 그의 자전적 소설 『또 하나의 나』를 빌어 마음공부란, 흡사 자신과 사생결단을 하는 식의 정면 대결과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은 물론 모든 사물과 정면으로 부딪친 적 없이, 누구에게도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감정을 드러내 본 적 없이, 애오라기 자신을 밀폐시킨 채 빈 껍질처럼 살아온 내가 더 이상 도피가 불가능한 막다른 골목에 자신을 집어넣고 느닷없이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면 대결의 결과가 바로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피투성이의 살기로 나타난 셈이었다.” 송기원, 『또 하나의 나』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양식을 위협하는 타자를 밖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마치 음식에 독이 들거나 상한 음식을 먹으면 구토가 일고 토해내듯 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은 내게 혐오감을 준다. 이때의 혐오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 장치로 작용한다(김종갑 : 2017).
그런데 막상 이상적인 자아를 위협하는 타자가 실은 싫은 타자가 아니라 내면의 열등한 나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무기력하고 신경질적인 자기혐오가 시작된다. 스스로가 바라는(혹은 믿고 싶은) 우월한 자아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자신을 혐오하는 것이다. 비할 데 없는 우울감에 빠져든 자아는 그만 기가 꺾인 채 공허한 마음을 하고서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홀로 표류한다. 그렇게 난파선처럼 떠돌다가 암초처럼 단단하고 상념에 부닺히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우울증을 원동력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아의 치유와 정체성의 보존을 위해 예술을 한다고 여러 번 고백한 바 있는 현대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를 비롯하여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지배하는 멜랑콜리적 기질과 그것의 특성에 몰두하며 창작의 결실을 맺는다. 과거에 갇혀 있다거나, 나르시스의 샘에 빠져있다거나, 사랑을 저버린 대상에 대한 슬픔에 젖어있다거나, 오히려 깊은 자기혐오에 빠져있다거나, 끊임없는 자기 상실감으로 고통받게 하는 멜랑콜리의 정념은 한없이 과민하고 끝없는 공상에 쉴 틈 없는 예술가들에게 때로는 신의 축복으로 때로는 악마의 저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이 보건대 멜랑콜리, 그것은 일순간 모든 시간의 지평을 닫아버리는 동시에 까마득한 영원의 문을 열어 인간의 영혼을 못 박는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은 소멸되며 모든 것이 영생한다. 때로는 천재의 징표로 때로는 가망 없는 정신병으로 불리면서.
<참고문헌>
강은실, 「멜랑콜리 논의를 통한 루이스 부르조아(Louise Bourgeois)의 시리즈 분석연구」, 2012
김동규, 「프로이트의 멜랑콜리론 - 서양 주체의 문화적 기질(disposition)론」(2010)
김동규, 「철학탐구」, 2009
김종갑, 『혐오 : 감정의 정치학』, 2017
한병철, 『피로사회』, 2012
<도판>
도판1 Albrecht Dürer, Melencolia I, 1514
도판2 Masaccio, Expulsion of Adam and Eve from Eden, 1424-27
도판3 Bartholomeus Hopfer, Melencolia, 1643
도판4 Arnold Böcklin, Melancholia, 1900
도판5 Edvard Munch, Melancholy, 1894
도판6 Caravaggio, Narcissus, 1597
도판7 Edward Hopper, New York Movie, 1939
아트렉처 에디터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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