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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Apr 25. 2019

우리 시대의 젊은 고전: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세계 #1

영화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를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젊은 고전: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세계 #1 (영화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를 중심으로)

 



들어가며

멕시코의 알폰소 쿠아론, 기예르모 델 토로,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곤잘레스 세 명의 감독을 ‘쓰리 아미고’(Three Amigo)라 부른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기준은 단순히 국적이 같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한 감독은 다른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고, 다른 감독은 도움을 청한 작품에 적극적으로 협업한다. 쓰리 아미고는 그렇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번 기획인 ‘우리 시대의 젊은 고전’은 쓰리 아미고 중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대표적인 세 가지 작품(<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 <로마>)을 다루면서 감독이 ‘생명’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녹여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신성이라는 생명 |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 <로마>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생명’이다. 영화 <로마>에서 굳이 클레오의 유산된 아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죽음-생명의 대비를 보여준다. 박제된 동물과 살아있는 동물, 무력시위 진압으로 인해 숨진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여기서 생명의 대립항인 죽음은 단연 생명을 ‘강조’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한편, <칠드런 오브 맨>의 배경은 전세계 여성들이 더 이상 아기를 낳지 못하는 2027년을 배경으로 하는데, 인류 중 가장 최후에 태어난 소년 디에고가 1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니까, 디에고의 죽음은 이후 강조될 생명을 예비하는 역할인 셈이다. <그래비티>는 아예 정자와 난자가 착상이 되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영화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여러 작품을 통해 ‘생명’을 강조하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영화마다 신선하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생명은 ‘신성’과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 다분히 종교적인 느낌이 물씬 배인 작품이기도 한데, 그건 단순히 영화의 배경이 인류의 종말을 다룬 묵시론적인 작품이라는 것에만 있지 않다. 이 영화에는 구원이 주어진다. ’죽음’이라는 종말을 앞둔 인류에게 한 아이가 가져온 ‘생명’이라는 구원을.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인간과 서로가 서로를 살육하는 참혹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탄생한 아기의 울음소리는 소란하던 그곳을 한순간 고요하게 한다. 모든 증오와 살인은 생명의 광휘 앞에 무릎 꿇고, 테오와 키(클레어-홉-애쉬티), 그리고 아기가 가는 길을 군인들이 비켜준다. 몇몇 군인은 아기 앞에서 무릎 꿇고 성호를 그리며 기도한다. 말구유에서 난 아기 예수를 경배하던 동박의 박사들처럼. 





요컨대 이 아기는 어떤 면에서 아기 예수와 같다. 아기를 낳은 엄마는 흑인이자, 범죄자 취급받던 이민자였다. 신분, 성별, 인종 모든 면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할 수밖에 없던 가장 낮은 그 여성 키에게, 인류의 구원자가 임한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영화 제목 역시 의미심장하다. 성경은 예수를 ‘사람의 아들’(인자, Son of Man)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이라는 제목은 ‘사람들의 아이들’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람들’로, ‘아들’을 ‘아이들’로 고친 복수 표현법은 그 아기를 통해 편만하게 될 생명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생명’은 단순히 목숨이 아니라, 신성이다. 구원이다. 메시아다.

 

 


중력이라는 생명 | 영화 <그래비티>에서

영화 <그래비티>는 어떨까. 거대한 우주 한복판에서 라이언(산드라 블록)은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위성의 폭발로 생긴 잔해더미와 부딪히고, 그 충격으로 생긴 운동에너지로 인해 거대한 암흑을 향해 그녀는 점점 멀어진다. 다행히 동료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가 그녀를 구하고, 소유즈를 타러 우주정거장으로 가지만 불의의 사고로 맷을 잃는다. 이제 혼자 살아남은 라이언은, 끝까지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생명을 억척스럽게 갈구하는 라이언의 성격보다,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다. 남편은 없고, 유일한 혈육인 아이는 4살 때 미끄럼틀에서 넘어져서 죽었다. 지구에서 뭘 하며 지냈냐는 맷의 질문에 그녀는 ‘운전하며’ 지냈다고 말한다. 운전은 그녀의 상태 자체다. 어디 마음 둘 곳 하나 없어 그녀는 늘 어디론가 이동 중인 셈이다. 우주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맷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한다. “Silence” 아, 지구에서 그녀의 삶은 소란스러움이었던 걸까. 한없이 고요한 이 우주에서, 그녀는 만족할 수 있을까.

 

좋은 이야기에는 두 가지 욕망의 층위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서사에서 드러난 욕망이고, 두 번째 층위는 숨겨진 내면의 욕망이다. 이 구분법을 <그래비티>에 가져오면, 라이언에게서 드러난 첫 번째 욕망의 층위는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고, 두 번째 층위는 삶에 대한 욕망이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말해준다. 그녀는 지금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인 (삶의) 중력이 결핍된 상태다. 소유즈의 연료가 얼마 남지 않자 그녀는 차분히 죽음을 준비한다. 환각 속에서, 맷은 나타나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말한다. “여기(죽음) 있으면 좋지. 눈을 감아버리면 세상 따위는 잊을 수 있잖아. 여기에서는 누구도 상처 주지도 않아. 하지만 가려고 했으면 가야지,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그대로 가”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설득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싶은 생명의 중력을 느꼈는 것인지도 모른다.




 

텐궁을 타고 그녀는 지구를 향해 돌진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이 영화를 다룬 글에서 지적했듯이, 이 장면은 마치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착상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지구로 가는 것은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기 위해서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있을 수 있는 힘, 삶의 중력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삶의 중력’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의 의미’, 혹은 ‘존재의 의미’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에서 그 둔중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대답으로는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가야지’라는 맷의 말 뿐이다. 이것은 ‘살려고 마음먹었으면 살아야지’와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삶은 ‘의미’, ‘목적’없이,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고 고귀하다는 것.

 

(다음은 ‘우리 시대의 젊은 고전: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세계 #2’로 <로마>에 나타난 ‘생명’과 감독의 또 다른 특징인 ‘물’을 다루는 방식을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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