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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May 16. 2019

당신의 색채

마리 로랑생

당신의 색채 – 마리 로랑생 

https://artlecture.com/article/757/#%EB%8B%B9%EC%8B%A0%EC%9D%98-%EC%83%89%EC%B1%84-%E2%80%93-%EB%A7%88%EB%A6%AC-%EB%A1%9C%EB%9E%91%EC%83%9D



“If you stay here, it becomes your present. Then pretty soon you will start imaging another time was really golden time. That's what the present is. It's a little unsatisfying because life is so a little unsatisfying. (당신이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되는 거예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 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은 원래 그런거니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중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에서 1920년대의 파리지앵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가 꿈꾸던 벨 에포크 시기. ‘좋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belle époque)’ 라는 말 그대로 좋고 아름다운 것들이 넘치던 파리의 전성기였다. 현재 우리가 익히 이름을 아는 피카소, 모네,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앙드레 지드, 에밀 졸라, 마르셀 프루스트와 같은 작가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으며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역시 이 시기에 건축되었다. 아름다운 시기는 아름다운 것들을 낳고, 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것이 마리 로랑생의 그림인 것만 같다. 당대의 귀족과 부호들이 앞다투어 초상화를 의뢰하고 싶어했다는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마리 로랑생의 그림은, 아름답다. 사과를 한 입 물었을 때 그 성분을 분석하기 이전에 맛있다, 고 느껴야 맛있는 사과인 것처럼 마리 로랑생의 그림은 첫눈에 아름답다. 파스텔톤의 색채와 섬세한 선과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묘사는 그 감정을 먼저 느낀 이후에야 눈에 들어온다. 코코 샤넬과 헬레나 루빈스타인이 초상화를 주문했을 뿐 아니라 샤넬이 마리 로랑생의 그림에서 의상 디자인의 영감을 얻었다고 화풍의 비밀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으나 짐작할 수는 있다. 그 색채와 우아한 선은 눈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어 필경 화가가 여리고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Elegant Ball or Country Dance), 1913, 마리 로랑생 뮤지엄 -1913년 앵데팡당 전에 출품하여 화가로서의 길을 열어준 기념비적 작품. 일류 화가의 삶이 시작된 이 해에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사랑에는 마침표가 찍혔다.



마리 로랑생의 삶은 그 자체로도 애수가 어려 있다. 귀족의 사생아였던 그녀는 아버지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인해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교사가 되어 평탄한 삶을 살기를 바랐으나 아름답고 재기발랄한 그녀는 몽마르트를 드나들며 예술가들의 뮤즈가 된다. 많은 남자들의 눈길을 받았으나 유독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에게 사로잡힌 한 사람.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였다. 5년 동안 열렬히 타올랐던 그들의 사랑은, 기욤이 루브르 박물관의 명화 <모나리자>의 도난범으로 몰리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파국을 맞는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라고 했던가. 마리가 연하의 독일 귀족과 결혼하자 기욤 아폴리네르는 실연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켰다. 이 시가 지금까지도 파리의 미라보 다리를 명소로 만드는 데 일조한 <미라보 다리> 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중




<미라보 다리, 파리>


그러나 첫사랑을 떠나 결혼한 마리의 삶 역시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결혼 직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신혼부부가 행복을 즐길 겨를을 허락하지 않았다. 독일과 프랑스의 대치 상태에서, 독일 귀족인 남편과의 결혼으로 인해 독일 국적이 된 마리와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머무를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다. 막 부부가 된 이들은 중립국인 스페인에 머물게 된다. 남편 오토는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마리는 절망한다.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에 가장 불행했던 마리. 그녀의 인생에서 ‘벨 에포크’는 너무도 짧았다. 그리고 전쟁의 공포와 남편에 대한 신뢰의 붕괴 등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불안감을 모두 그림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이 시기 그녀는 자신이 수감되어 있는 죄수와 같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인식은 그림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어두워진 색채, 무표정한 인물. 그림 속의 여인들은 마리의 페르소나가 되어 말없이 그녀의 비통하고 우울한 마음을 대변한다.



수감자2(The Prisoner2), 1917, 마리 로랑생 뮤지엄 - 바르셀로나 시기의 그림. 격자무늬는 같혀 있는 처지를 상징한다.


춤(The Dance), 1919, 마리 로랑생 뮤지엄 - 스페인에서 만든 작품의 집대성이라고 불리는 걸작. 춤을 추고 있지만 여성들의 표정은 수심이 가득하다. 1차 세계대전의 뒤에 남겨진 여인들의 비애와 젊은 날의 사랑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사망 소식을 접한 그녀의 슬픔이 모두 담겨 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에도 종지부가 찍힌다. 파리로 돌아온 마리는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화가로서의 입지를 쉽게 회복한다. 한층 성숙해진 그림의 결과 색채, 사람의 강함이 아닌 약함을 꿰뚫어보는 그녀의 통찰력은 이 때 절정을 맞는다. 아름다운 색채와 화풍 덕분에 초상화의 제의가 쏟아지고, <암사슴들>이라는 발레의 의상과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한다. 하늘하늘하고 가녀린 발레의 특성과 마리 로랑생의 그림은 완벽한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였을 것이다.



<마드모아젤 샤넬의 초상화>, 1923,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 코코 샤넬은 이 그림에서 자신의 진취성이나 역동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초상화를 의뢰하였지만 마리 로랑생은 응하지 않았다.



메디시스(프랑스 왕 헨리 4세의 왕비, Marie De Medicis), 1926, 마리 로랑생 미술관 - 원래 루이 13세의 섭정을 했던 마리 드 메디시스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느껴지지 않고, 꿈꾸는 듯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겨 놓았다.



                                마리 로랑생, <폴 기욤 부인의 초상화>, 1924,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앙드레 드랭, <폴 기욤 부인의 초상화>,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같은 인물을 누가 그리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묘사할 수 있는지는 인상주의 화가 앙드레 드랭(Andrè Derain, 1880-1954) 이 그린 폴 기욤 부인의 초상화에서 포착할 수 있다. 당시 유명한 화상이자 수집가였던 폴 기욤은 많은 화가들에게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림을 보는 안목 또한 수준급이었던 그의 컬렉션은 현재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에 별도의 전시실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부인이었던 마담 폴 기욤이다. 폴 기욤의 사후 그녀는 장 발터와 재혼하지만 전남편의 유지를 받들고 재혼한 남편 또한 그녀의 뜻을 존중하여 폴 기욤 및 장 발터의 컬렉션으로 재탄생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실로 파리 미술계의 은인과 같은 부부인 셈이다. 아름답고 세련된 것으로 유명했던 마담 폴 기욤은 여러 화가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앙드레 드랭이 그린 초상화이다. 이 그림과 비교해 보면 마리 로랑생이 얼마나 인물의 서정성에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소 고집세 보이는 완벽한 우아함이 아닌, 나른하고 편안한, 소녀 같은 우아함을 극대화시킨 마리 로랑생의 초상화.

마리 로랑생의 그림은 그녀가 노년이 될수록 파스텔톤의 고운 색채가 더욱 깊어진다. 화가도 필경 그토록 곱고 온화한 사람이었을 것만 같다.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역시, 라는 생각이 든다. 평온하게 원숙미를 갖춘 색들은 우아한 결로 화폭에 내려앉는다. 수줍지만 숨기지 않는다. 여리지만 약하지 않다. 그녀의 색채를 닮고 싶다. 그토록 고아하게 나이먹고 싶다. 당시 그녀에게 초상화를 부탁하는 것이 왜 그토록 유행이었는지, 왜 모두가 그녀의 모델이 되기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색채를 입으면 나 또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기에.



                 화환을 입은 소녀(Jeune fille à la guirlande de fleurs), 1935, 마리 로랑생 미술관



            


"사실, 내 안에는 모든 아이가 다 있네. 난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 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구!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해가 되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미치 앨봄(Mitch Albom)



 

유난히 검고 맑은 눈동자와 여리고 하늘거리는 인물을 그려낸 마리 로랑생. 그녀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을 얇고 가느다란 쉬폰 한 겹을 덧댄 듯한 렌즈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사람들이 그 그림 뒤에 존재하는 자신의 청명하고 연연한 자아를 알아보아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먹물 같은 동자는 맑고 청아한 검정빛을 띈다. 파스텔톤과 원색의 고운 색감들은 그 검은 눈동자 안으로 수렴해 갈 것만 같다. 어둡고 그늘깊은 검정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검정. 인종도, 홍채의 색도 다를 터인데 그녀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다. 말년으로 갈수록 눈동자는 더 뚜렷하고 더 검어진다.

링컨은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였고, 공자는 마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 숫자가 한 해 한 해 다가올수록 어깨가 무겁다. 삶이란 분절이 아닌 총합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누적된 시간들은 감출 수가 없다. 삶의 굴곡을 모두 넘긴 인생의 후반기,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배포가 생겨간다. 시간을 축적시켜 점차 깊이와 완성도를 더해가는 이러한 종류의 미적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다면 구태여 나이 드는 것을 마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퇴적되고 응축되어 사람의 색은 빛과 향취를 더해간다. 시간을 잘 다스려 온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에게서 풍기는 고유의 공기, 혹은 아우라가 있다. 바라건대 나의 색은 맑고 밝고 따뜻한 색이면 좋겠다. 어느 색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기분 좋은 색이면 좋겠다.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는 바탕같은 색이면 좋겠다. 나이드는 것이 불안하기만 하던 어린 날과는 달리 스스로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 품을 수 있는 감정도, 사람도, 이야기도 더 많아질 것이기에. 세상을 보는 시선은 더 깊어지고 이해되지 않던 것도 헤아릴 줄 알게 될 것이다. 타오르는 정오의 햇빛보다는 따사로운 오후의 볕을, 날카로운 지식보다는 온유한 지혜를, 직화구이같은 강렬함보다는 뚝배기같은 뭉근함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나이 먹는 것이 조금은 기대되기도 한다. 나에게 쌓인 시간이 그만큼의 색채를 더해갈 것이기에.



샤를 델마스 부인의 초상(Madame Charlie Delmas), 1938, 마리 로랑생 미술관 - 여배우 찰리 델마스를 그린 이 작품은 마리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꽃, 머리장식, 부채. 마리는 좋은 것과 싫은 것의 차이가 분명한 사람이었고 이 초상화는 마리가 모델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극명히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아트렉처 에디터_반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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