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거짓말과 속임수뿐이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선 두려워할 게 없어.”
영화 <트루먼 쇼>의 제작자 크리스토프의 대사다. 이 영화는 살아온 인생이 모두 쇼를 위한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방황하다 자신을 찾아 가는 이야기다.
일상을 의미 없이 거짓과 속임수가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제작자의 말은 우리에게 거짓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거짓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서 말하는 이 단어는 종종 속임수와 함께 쓰이며 뭔가 음습한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속임수(fake)와 거짓말(lie)은 어떻게 구분할까?
비슷한 말 아닌가? 하겠지만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상대를 속이기 위한 고의성이 반드시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누룩뱀 수컷들 중에는 암컷 냄새와 암컷 같은 행동을 하는 수컷들이 있다. 다른 수컷들을 물리치고 암컷과 짝짓기하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다. 부활버섯은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죽은 척하다 비가 오면 살아있는 식물처럼 생기를 띄우며 번식을 위한 곤충들을 불러들인다.
물새는 자신의 알이 있는 둥지 근처로 다른 종이 나타나면 죽어가는 것처럼 파닥거리면 자신의 둥지로부터 멀리 유인하기도 한다.
인간 또한 화장을 하거나 마스카라를 하는 일종의 속임수를 사용한다.
이런 속임수는 번식과 생존을 위한 것으로 거짓말과는 다르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속임수를 좋고 나쁨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서로 연결된 듯 다른 의미의 거짓말과 속임수.
헤르메스의 거짓말과 속임수는 요람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요람을 벗어나 자신의 형인 아폴론을 대상으로 거짓말과 속임수를 썼다. 장차 도둑과 속임수의 신답게 아폴론 몰래 올림포스 신들이 키우는 암소 50마리를 훔친 것이 그의 첫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소를 훔친 뒤 들키지 않기 위해 소 발굽의 앞뒤를 바꿔 걷게 해 반대방향으로 간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신의 요람으로 돌아와 자는 척 했다.
뒤늦게 눈치 챈 아폴론이 헤르메스를 상대로 다그치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태연하게 말한다. 이에 화가 난 제우스는 이 사실을 제우스에게까지 알렸다.
난감해진 제우스가 중재에 나서 헤르메스가 만든 악기 ‘리라’와 암소를 서로 바꾸는 것으로 이를 무마시켰다.
헤르메스의 이런 약간은 장난처럼 보이는 속임수는 신들 사이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장난은 신들을 유쾌하게 웃게 만드는가 하면 도둑과 거짓말의 신답게 언변도 뛰어나 연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한 헤르메스와 달리 신들의 종말을 초래한 거짓말 신도 있다.
로키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그는 북유럽 판 헤르메스라 할 수 있다. 멋진 외모와 뛰어난 말솜씨를 가졌지만 매사에 냉소적이면서 거짓말과 속임수에도 능했다. 그의 거짓말과 장난은 고요한 신들의 세상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오곤 했다.
또한 우리가 ‘13일의 금요일’처럼 13을 불길한 수로 여기게 된 여러 유래 가운데 하나도 로키의 신화에서 나왔다.
12명의 신들이 축제를 벌이는 자리에 로키가 난입해 발데르를 죽인다. 발데르는 오딘의 아들이자 빛의 신으로 모든 신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신이었다. 이 일로 13번째로 나타난 로키를 두고서 ‘13’을 불길한 수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분노한 오딘은 로키를 그의 아들로부터 창자를 꺼내 결박한 뒤 얼굴에 뱀독이 떨어지게 하는 벌을 내린다. 그런데 이 일은 말세를 의미하는 ‘라그나로크’로 이어지고 모든 신들의 종말을 가져오게 한다.
그런데 이들 두 거짓말의 신들이 하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장난과 기만으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헤르메스만 해도 거짓말과 속임수의 신이면서도 상업의 신이기도 하다. 장사에서 벌어지는 거짓말과 속임수는 우리가 알고도 인정하는 부분이 많다. 이를 두고 선악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인간 세상에서의 거짓말과 속임수는 구분이 더 어렵다. 역사로 가장 오랜 기록은 기원전 12세기에 있었던 트로이 전쟁에서 등장한다.
10년 넘는 전쟁에도 그리스가 트로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오디세우스는 한 가지 꾀를 낸다. 전쟁을 포기하고 다시 바다 건너 그리스로 돌아간 것처럼 꾸미고 해안가에 목마를 하나 만든다. 마치 신을 위한 선물인 것처럼 꾸미고 그 안에 잠복해 있다가 트로이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날 밤 들뜬 트로이 병사들이 잠든 틈을 타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나와 성문을 열어 그리스 군을 들어오게 했다. 이로써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하고 트로이는 함락되고 만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트로이의 목마는 거짓말, 속임수, 위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트로이의 목마를 사악한 간계로 보지는 않는다.
<손자병법>의 맨 앞 장인 ‘시계(始計)’에서도 ‘전쟁은 속임수의 도다(兵者詭道也).’라고 하지 않았던가?
속임수는 절대적인 선과 악으로 구분선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거짓과 속임수의 문제는 진실과 위선의 문제로 번진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혹은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 위선적인 속임수. 정치적으로 지위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쓰이는 거짓말과 속임수는 선과 악의 문제, 진실과 기만의 문제다.
실화를 소재로 만든 '퀴즈쇼(Quiz Show)'라는 영화가 있다.
참여자에게 문제와 답을 미리 알려줘 승패를 조작한 미국 NBC 방송국의 비리에 관한 내용이다. 영화는 프로그램에서 강제로 하차한 출연자가 이를 고발하면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사건은 사회에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의회 청문회까지 열리게 된다. 방송사 측은 고발자를 정신이상자로 몰았다. 그리고 최종 우승을 한 찰스에게도 아무런 부정이 없었다는 증언을 요구한다.
찰스는 이때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진실을 말하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을 손가락질을 받을 게 뻔했다. 심한 경우 대학 교수였던 자신의 미래까지 흔들릴 것이다.
이전 출연자들도 모두 이렇게 해왔는데 왜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하는지 탄식하지만 이미 돌아갈 방법도 없다.
결국 진실을 말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리라는 순진한 믿음으로 사실을 밝힌다.
그의 진실을 밝히는 용기에 일부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는 법적인 책임은 면하지만 다시 대학교수 신분으로 복귀할 수는 없었다.
반면 끝까지 이를 잡아뗀 방송사와 프로그램 제작자, 광고주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비난을 무릅쓰고 거짓을 인정한 용기에 대한 결말치고는 너무도 씁쓸한 영화다. 거짓말이 어찌 보면 선이 되고 승자가 되는 이상하고 속 불편한 현실이다.
악이 선이 되고, 이기는 것이 진실이고, 강한 것이 역사가 되는 모순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다보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리플리 증후군’이 바로 그것이다.
‘리플리 증후군’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혹은 열등감을 피해 자신을 속이는 행위가 대부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에 대한 거짓말 테스트를 하면 모두 진실로 나온다는 것이다.
“선동의 제1의 가치는 거짓말이며, 거짓말도 백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이 말은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의 말이다.
그는 끊임없는 거짓말로 히틀러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게 하기까지 그의 거짓말은 교묘했고 치밀했다.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을 때까지 집요하게 거짓말을 양산했다.
결과는 무서울 정도로까지 독일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흡사 대장을 따라 무작정 앞으로 치달리다 절벽 앞에서 멈추지 못하고 떨어져 죽는 나그네 쥐처럼.
이들이 바로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리플리 증후군 환자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거짓에 의한 광기가 수시로 일어나는 것이 정치다. 선거판에서, 정치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TV는 패널들을 동원해 그럴싸한 논리로 사람들을 속이고, 이를 믿은 사람들은 제 2의 거짓말을 가공하기도 한다. 일명 ‘가짜뉴스’가 양산되는 유형이다.
이러한 거짓말 앞에서 이를 판단하는 사람들도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선택적 진실판단으로 그 거짓말의 탑 쌓기에 동참한다.
문제는 정치인과 리더들의 거짓말은 사회의 분열을 부르고 혼란 속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거짓말이 만든 이념과 지역, 문화, 인종의 갈등이 증폭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 때문이다.
1890년대부터 장기간 프랑스를 이념적으로 갈라놓았던 정치 스캔들이 하나 있다. 그 당시 최대의 반(反)유대주의 스캔들인 ‘드레퓌스 사건’이다.
프랑스 육군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법원에서 유배형을 선고 받는데 군사 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진범이 잡혔음에도 천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진영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진범 역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문제는 프랑스 정부까지 나서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위한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들 덕에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범인 에스테라지는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후 프랑스는 상당 기간 무죄를 주장하는 파와 반대파로 양분되어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당시 작가 에밀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기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했다. 그런데 에밀 졸라는 이 기고문으로 군법회의에 올라 1년 형을 선고받고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이는 이스라엘이 건국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이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동서를 나누고 세대를 나누고 사회의 계층을 나누고 있다.
어느새 한국 사회에서 거짓말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제 이 거짓말을 걸러내는 자정 능력과 철학만이 사회의 파탄을 막을 수 있다.
문학 비평가인 조지 스테이너는 좋든 싫든 우리는 모두 타고난 거짓말쟁이고 거짓말은 인간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했다. 천적을 만나면 죽은 척하거나 몸의 색을 바꾸는 동물들처럼 거짓말은 정말 인간 존재의 일부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 존재의 일부가 된 거짓이 우리의 몸의 암세포로 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_고산_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_일명 바람난 공학자
&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_ 하버드대 대학원(동아시아언어문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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