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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un 26. 2019

일상의 미학, 앵티미즘: "빨래를 하는 여인"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풍속화

일상의 미학앵티미즘: "빨래를 하는 여인"

-(2)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풍속화-  

https://artlecture.com/article/842


궁정미술 취향과의 결별 

르네상스 말기 이래로 꾸준히 지속된 궁정미술의 발전은 18세기에 이르러 정체기를 맞았다. 교양 있는 중간층 시민계급이 등장함에 따라 과장되고 연극적인 바로크 양식과 감미롭고 유희적인 로코코 양식은 쇠퇴하고 대신에 일상적이고 친근한 것을 지향하는 신 미술 경향이 자리 잡았다.

여전히 궁적미술의 화려함과 장엄함의 취미를 고수하려는 화가들은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인공들의 삶에 눈을 돌려 그들의 평범하고 친근한 일상을 그림으로 그려내고자 한 화가들이 등장했다. 장 밥티스트 그뢰즈(J.B. Greuze)와 장-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B.S. Chardin)이 대표적이다.  



장 밥티스트 그뢰즈

장 밥티스트 그뢰즈, 하얀 모자를 쓴 여인, 1780

 

그뢰즈는 18세기 프랑스의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 유명하다. 섬세하고 우아한 필치 하며 실크나 레이스와 같은 의상 묘사의 탁월함은 그뢰즈가 아카데미 화단의 정식 멤버로 받아들여진 데에 조금도 의아함을 가질 수 없게 한다. 그러나 프랑스 풍속화의 대가라는 명칭이 그뢰즈에겐 그리 유쾌하게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역사화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했던 그의 바람은 애석하게도 그저 바람으로만 그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서민들의 실생활을 담은 그뢰즈의 그림에는 지체 높은 귀부인의 초상 대신에 우유를 나르거나 양모를 짜고 빨래를 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소재의 일상성과 평이성에도 불구하고 화풍은 여전히 관능적이고 유희적인 왕족 미술의 전형을 그대로 따른 탓에 통속화가 되고 말았다. 


장 밥티스트 그뢰즈, <빨래하는 여인>, 1876



가령 그림 <빨래하는 여인>을 보자. 젖어있거나 마른 빨랫감들이 산발적으로 놓인 실내에서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에 볼에는 복숭아처럼 발그스레한 홍조를 띤 젊은 여인이 스타킹과 굽이 있는 슬리퍼를 신고 빨래를 하고 있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미의 여신 비너스가 급하게 어느 가정집의 세탁실에 들어와 소매를 걷어붙이고 빨래를 해보려는 듯 사뭇 작위적이고 연출적인 모습이다. 더욱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이 여인의 시선이란 게 얼마나 도발적인가! 

아닌 게 아니라 1761년, 전시된 <빨래하는 여인>를 보고 드니 드디로가 내린 미술비평마저 그림 속 여인에게서 교묘히 풍기는 교태를 꼬집고 있다. "빨래를 하는 여인의 모습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 여인이 부리는 아양은 나로 하여금 조금도 그녀를 신뢰할 수 없게 한다."


 

장 밥티스트 그뢰즈, <아버지의 저주 배은망덕한 자식>, 1777


그뢰즈의 다른 그림 <마을의 약혼녀>, <깨진 주전자>, <아버지의 저주. 배은망덕한 자식> 등도 빨래를 하는 여인처럼 서민 가정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감미롭고 호색적인 로코코 화풍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단지 고된 노동과 검소함 그리고 가족에 대한 헌신 같이 진부하고 교훈적인 덕목을 덧씌웠을 뿐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신랄한 비평에 따르면 "그림의 구도는 독창성 없고 필치도 무기력한 대다가 색채에도 매력이 없으며 전적으로 예술 외적인 흥미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에 그친다. 아마도 순수한 회화적 요소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편이 더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샤르댕의 그림은 대단찮은 시민생활을 다룬 것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가 산출한 예술 중에서 최선의 것에 속한다. 그의 작품은 그뢰즈의 것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정직한 시민계급의 예술이다."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장-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빨래하는 여인>, 1730년대

 

미술사에서 샤르댕의 그림은 로코코 양식으로 분류되나 로코코 풍이라 부르기엔 그의 그림은 너무나 소박하고 수수하기 그지없다. 화려하고 선정적인 로코코 특유의 분위기를 비껴나가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정경을 과장 없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서 있고 명료하게 구성된 공간과 차분한 색조, 그리고 그림 전반에 흐르는 고요함 탓에 샤르댕의 풍속화는 흡사 '인간이 들어간 정물화'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처럼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장면의 사실성과 일상 사물의 물질성만을 강조하여 그것에 깃든 고유한 서정과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가장 가치 없는 물체에서도 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시간을 초월하는 존엄성을 부여한"(H.W. 잰슨, A.F. 잰슨) 샤르댕의 그림은 앞서 살펴본(일상의 미학, 앵티미즘: (1)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베르메르의 그림과 견줄만하다. 



장 시메옹 샤르댕, <식전의 기도>, 1740



<식전의 기도>는 샤르댕의 그림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중적 사랑을 받는 그림이다.

어머니가 저녁 상을 차려 놓으면서 어린 두 딸들에게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권하고 있다. 평범하고 소박한 이 일상의 장면엔 그 어떤 현란한 효과나 날카로운 암시 따위는 없음에도 신비로 우리만큼 아름다운 서정이 흐른다.

샤르댕의 그림은 감자를 깎거나 빨래를 하거나 시장에서 장을 봐오거나 물레질을 하거나 잠시 차를 마시는 순간에도 "어떻게 세속적인 행복과 종교적인 행복을 잘 결합시킬 수 있는지를"(김성진) 여실히 보여준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샤르댕의 그림은 사물을 대하는 영혼과 그것을 아름답게 감싸는 빛 앞에서 모든 것은 신성한 평등함을 갖는다. 그는 관습 안에 갇혀 약해진 아름다움 혹은 인위적인 취향이 아닌 자유롭고 강하고 범세계적인 아름다움을 현실 속에서 발견하게 해 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주고, 아름다움의 바다에 안내한다." 



장-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브리오쉬>, 1763


그림 속의 찻잔, 냄비, 구리 주전자, 마른 빵 덩어리, 복숭아와 달걀 등 프랑스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물체들을 보며 우리는 이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대상으로 바뀌는지를 경험 한다.

우리 눈에 익숙하여 잊어버리거나 무시했던 존재의 매력, 각각의 특유한 형태와 질감 그리고 빛이 닿았을 때 미묘하게 변하는 색감 등 고유한 개체성의 묘사는 화가가 구태여 물체에 어떤 특별한 성질을 부여하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림 속 사물들 사이에는 거의 우정이라 할 만한 어떤 조화가 자리 잡고 있다. "늙은 개 한 마리가 매일 같은 자리에서 익숙한 자세로 부드럽고 게으른 등을 보드라운 천을 덧입힌 바느질함에 기대어 보낸 세월은 이 둘 사이에 우정을 쌓았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두 발은 오래된 물레 쪽으로 자연스럽게 향해 있다. 어머니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몸에 밴 습관을 따라 자세가 잡혀 있고, 이렇게 어머니와 물레 사이에도 우정이 형성되었다. 또한 난롯불 앞쪽이 내는 색과 양모 실타래의 색 사이에서, 식탁을 준비하는 여인의 앞으로 기울어진 몸, 즐겁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과 오래된 식탁보, 아직은 이가 나가지 않은 그릇들 사이에는 우정, 아니 애정이 느껴진다."(프루스트) 


장 시메옹 샤르댕, <차를 마시는 여인>, 1735


이처럼 별 볼 일 없다고 치부한 일상이 향기와 풍요로 가득한 미술의 대상이 된 것은 일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따뜻하고 진지한 시선 때문이다.

우리가 그저 보잘것없는 일상의 사물들을 볼 때, 샤르댕은 그 사소함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주목하여 그림으로 충실히 기록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시선을 따를 때 우리의 눈에 익어 한 번도 특별하게 여겨본 적 없거나 너무 익숙해서 따분해져 버린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샤르댕이 우리의 하찮은 일상을 아름답고 고귀한 방식으로 구원시킴에 따라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도 우리의 소박한 삶의 가치를 생각하고 소소한 행복을 찾게 된다.

일상에서 매일 접하는 흔한 소재들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란 정녕 새로운 품격이 아닐 수 없다.

샤르댕이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우아한 아름다움은 평범한 것 속에 있다! 


[참고문헌]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백낙청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9

마르셀 프루스트,『독서에 관하여』, 유예진, 은행나무, 2017 




글_아트렉처 에디터&미술칼럼니스트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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