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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ul 15. 2019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호크니 바라보기

데이비드호크니展

데이비드 호크니展

서울시립미술관

2019.03.22-2019.08.04


https://artlecture.com/article/883/



데이비드 호크니는 1937년 영국 요크셔 주 출생의 예술가이다. 살아 있는 화가들 중 최고가로 매매되는 그림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최근 매매가 라이벌인 제프 쿤스에게 그 수식어를 빼앗겼다. 회화, 판화, 무대 디자인, 사진 등 다양한 예술적 매체를 사용해 작업해 왔으며 작업 스타일 또한 한가지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리저리 다양한 시도들을 해 오며 폭 넚은 작업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호크니는 동성애에 대한 공적 발언이 터부시되던 때에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본 ‘데이비드 호크니’전은 아시아 지역 첫 대규모 개인전이다. 호크니가 영국 왕립예술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어떤 화풍을 거쳐 작품 세계를 구축했는지, 회고전을 보는 마음으로 관람했다. 1960년대 예술학교 학생 시절, 그는 학교에서 쉽게 할 수 있었던 판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특히 성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추상표현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으나 호크니는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구상회화를 그린다.


<여왕>은 간접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이자 작품 속 쓰여져 있는 'Queen'이라는 단어는 퀴어(Queer)의 은어이다. 또한 <난봉꾼의 행각>에는 처음 뉴욕으로 건너간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들을 모티브로 한 판화들이 있는데 여기서도 게이 바 방문, 성적 정체성이 타락되는 과정 등을 묘사하였다.


David Hockney, <여왕>, 종이에 에칭과 에쿼틴트, 1961, tate미술관


David Hockney, <난봉꾼의 행각>, 종이에 에칭과 에쿼틴트, 1961-3, tate미술관



그렇다면 호크니가 묘사하는 여성은 어떤 모습일까. 가장 대표적으로 <첫 번째 결혼>이 있다. 미국인 친구 제프 굿맨과 함께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방문하여 이집트 조각상 옆에 제프 굿맨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 <첫 번째 결혼>, <두 번째 결혼>이다. 이 작품에서 호크니는 여성과 남성을 각각 고대와 현대, 비현실과 현실, 자연과 문명 등으로 비유했다. 우선 고대와 현대의 비유는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다. <첫 번째 결혼>의 다른 이름은 <양식의 결혼>이기도 한데, 여기서 제목은 고대와 현대 양식의 만남을 의미한다. 남성은 양복을 입고 백인 남성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여성은 붉은 피부색, 부자연스러운 신체 표현으로 그려져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경직된 자세와 무표정은 그를 더욱 수동적으로 보이게 하고 대상화한다. 이러한 표현은 <두 번째 결혼>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조형적으로 캔버스를 이어 붙이고 벽지를 콜라주하여 입체적인 방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점이 차이점인 것 같다. <두 번째 결혼>에서도 신부는 여전히 신체는 딱딱하게 굳어있고 영혼 없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생(生)의 느낌이나 적극성 등은 찾아볼 수 없다.


David Hockeny, <첫번째 결혼>, 캔버스에 유화, 1962, tate미술관


David Hockeny, <두번째 결혼>, 캔버스에 유화, 과슈, 찢은 벽지 콜라주, 1963, tate미술관



호크니는 퀴어라는 점에서 여성주의와 나란히 하는 지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인지 여성에게 철저한 무관심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처럼 세심하지 않은 여성 신체 묘사나 그의 작품에 여성의 등장 빈도가 낮은 것 등을 보아 알 수 있다. 또한 에로티시즘을 가지고 익명의 남성들을 관능적으로 그린 작업이 존재하는 데 반해 여성은 호크니와 친분이 두터운, 현실 속 주변인들만이 반복하여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대표적 예로 셀리아와 어머니가 있다).

호크니는 종종 관심있는 문학을 작품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호크니가 문학 작품이나 인물을 묘사한 작품을 제작한 이유는 작품이 실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밝히는 그림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국은 동성애를 전면 금지하고 있어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을 함부로 제작할 수 없었다. 따라서 호크니는 문학을 차용하여 동성애를 다룸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숨길 수 있었다. 앞의 <난봉꾼의 행각>과 아래의 <카바파의 시 14편을 위한 삽화>가 훌륭한 예이다. <난봉꾼의 행각>은 영국의 화가였던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 동명의 원작을 재구성한 것이다. <난봉꾼의 행각>은 성적 제재가 비교적 약했던 미국의 뉴욕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카바파의 시 14편을 위한 삽화>는 영국 의회가 ‘성범죄법’을 통과시키고 영국과 웨일스에서 동성애를 비범죄화할 무렵에 맞춰 발표되었기 때문에 호크니의 작품은 큰 반발이나 반대 없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David Hockney, <카바피의 시 14편을 위한 삽화> 중 일부,종이에 에칭과 에쿼틴트, 1966, tate미술관



카바파는 이집트 출신의 그리스 시인이다. 호크니는 카바파의 시를 삽화로 표현했다. 그런데 네다섯점의 삽화에서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 남성 두 명이 등장한다.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누드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화된 남성 신체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서로 꽤 친밀해보인다는 점에서 필자는 판화 속 등장인물의 관계가 연인임을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 있었다.

LA로 건너간 후 호크니는 잡지에 나오는 관능적인 남성 모델들을 주제로 작업을 했다. <청결은 신성함만큼 중요하다>는 그 중 하나이다. 잡지에서 남성의 사진을 그대로 오려 붙였다. 목욕 소재는 여성과 함께 등장해왔다. 이것은 누드를 보여줄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여성 누드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여성의 신체는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앵그르의 <터키탕>이나 틴토레토 또는 루벤스의 <수잔나와 장로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신체가 이상화되고 가슴과 엉덩이가 부각되어 관능적으로 그려져 왔다. 또는 에드가 드가의 <목욕통>을 비롯한 목욕 장면을 그린 그림에서처럼 등을 완전히 내보여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호크니는 목욕하는 주체를 남성으로 설정했다. 우리는 단단하고 건강한 근육을 가진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남성은 관람객을 응시하며 관람객의 시선을 받아들인다. 웃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시선을 즐기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셀리아>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호크니가 남성의 몸을 어떻게 그리는지 알 수 있다. <셀리아>는 우선 불필요한 노출이 없는 복장을 입었다.관람객을 응시하지 않고 무언가에 열중한 모습이다.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스러움’, 관능성, 혹은 백치미 등은 표현되어있지 않고 셀리아의 인품 표현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필자는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David Hockney, <셀리아>, 종이에 리소그래피, 1973, tate미술관


David Hockney, <예술가의 어머니의 초상화, 로라 호크니, 브래드퍼드>, 종이에 잉크, 1972, tate미술관



한편 호크니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만을 그리지 않았다. 어머니 로라 호크니는 호크니가 가장 많이 그린 여성 중 한명이다. 노년의 여인임에도 젊게 그리거나 사회적 미의 기준에 맞춰 묘사하지 않고 자신이 어머니를 보는 시각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상반된 묘사가 나타난다. 어머니는 차분하고 단정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반면 아버지는 아론 샤프의 <미술과 사진>을 탐독하는 데 열중한 모습이다. 어머니의 모습에서 관능성이라든지, 행복한 어머니 도상이 적극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수동적이고 정적인 여성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David Hockney, <나의 부모님>, 캔버스에 유화, 1977, tate미술관



전시 후반부에는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움직이는 초점’ 작업이나 추상화, 디지털 사진 작업,그리고 거대한 크기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필자는 호크니 전시를 통해 성 소수자로서 그의 치열한 고민, 여성과 남성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그림에 녹아있어 인상적이었고, 남성의 신체 그리기를 더 좋아한 것이 느껴져 재미있었다. 한편 여성은 상대적으로 호크니의 작업에서 매우 특정한 소수 인물만 다뤄지거나 소외되는 것 같았다. 아마도 호크니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작가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제3의 성이든,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작품에 접근해보는 시도는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성의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작품을 바라볼 때 새롭게 다가오는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른 전시들을 관람할 때에도 한번씩은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감상해보겠다 다짐해본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호크니展> 전시도록



글_E앙데팡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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