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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Oct 10. 2019

피에트로 마르첼로 <마틴 에덴>

아름다운 존재의 힘겨운 투쟁, 부산영화제 상영특집(1)

*2019 부산영화제 상영특집(1), 부산영화제 상영 기대작리뷰입니다.

*아트렉처가 부산영화제 프레스로 참여한 취재리뷰입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095


아름다운 존재의 힘겨운 투쟁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탈리아의 신진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근작 <상실과 아름다움>에서 이 같은 미학이 아직 풀어내지 못한 숙제를 희소성과 엮어서 탐구하였다. 본 작품에서 아름다움이 대두되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어느 고즈넉한 성(castle)과 이를 지키는 관리인과 어느 새끼 물소의 우정이었다. 성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웠다. 허나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성을 여전히 누군가가 관리한다는 것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그 성에 다시금 관심 갖기 시작하였고, 이 고성을 아름답다고 찬동하였다. 또한 동물을 언제나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새끼 물소와 교감을 나누는 관리인의 이야기도 대단히 희소한 것이었다. 또한 성과 우정에 대한 아름다움은 관리인이 사망함으로써, 그리고 새끼 물소까지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면서 더욱 각별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들의 아름다움이 상대적인 판별 속에서 피어난 것인지를 반문해야만 한다. 관리인이 성을 관리함에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이 덧입혀진 것이 아니다. 성은 관리인과 무관하게 그것 자체만으로 독립적인 내재적인 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이 희소해서가 아니라, 어떤 두 생명체가 언어와 표피라는 막대한 간극을 뛰어넘어 내밀한 영역까지도 어루만지는 그 교감 자체가 아름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진정으로 목도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단지 쇠락한 성을 누군가가 관리한다는 그 희귀한 이야기에 관심을, 또한 동물과 인간이 교감한다는 마찬가지의 희소성에 주목을 행한 것뿐이랴. 즉 마르첼로는 아름다움이 가진 신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그가 선택한 필름이라는 매체가 가진 일련의 미적 속성에 주목하게끔 만들지만,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기는 미에 대한 관조가 대상이 지닌 독자적인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취향, 관심에 의거한다는 바를 지적하였다. 그래서 새끼 물소의 죽음은 미적 대상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고양시켜줄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상실이나 희소성으로 착각된 미에 의해 진정으로 아름다운 피조물이 상실되고 있는 비극을 목도한 것이다.



이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독 나름의 답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대한 규정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첼로는 이 같은 미학을 바탕으로, 또한 잭 런던의 1909년 소설인 『마틴 에덴』을 원전으로한 새로운 신작 <마틴 에덴>을 내놓는다. 원전의 뼈대는 다음과 같다. 노동계층인 마틴 에덴은 명망 있는 귀족가문의 자제인 루스를 만나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고양된 정신성, 그리고 지성에 대해서 눈뜨게 된다. 그리고 루스 또한 지금까지 가상으로만 접해왔던 남자들 대신,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남자의 도래에 마음이 이끌린다. 마틴은 가상 속에 등장하는 완벽한 미를 갖춘 남성은 아니지만, 그 동물성의 이면에 내재한 순수하고도 맑은 영혼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내재해있다. 그래서 루스는 마틴에게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추함을 모조리 소거하고 부르주아지의 취향에 맞는 아름다움으로 탈바꿈 시키겠다는 열망을 갖는다. 그리고 마틴은 루스에게 다가가기위해서 영적으로 고양되고, 미를 체화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된다. 소설은 이 같은 계급의 충돌이 도드라지지만, 한편으로 이를 영화화하는 마르첼로가 이전 작에서 다룬 미에 대한 탐구 또한 도드라진다. 부르주아지가 형성하는 미적 취향은 오직 부르주아지의 취향만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 부르주아지의 취향으로 노동계층을 재단하는 것은 교조적이지 않은가? 또한 그 취향은 과연 삶과 현실을 반영하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적 취향은 과연 부르주아지에 의해 형성된 예술계에 의해 편입될 수 있을까?


이러한 미에 대한 의문들이 도드라짐과 동시에, 극의 주인공 마틴 에덴과 그의 작품은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적인 제도의 승인을 받은 이후에야 미적인 것으로 판별되는, 마르첼로가 <상실과 아름다움>에서 탐구한 것과 유사한 주제의식도 도드라진다. 그래서 마르첼로는 자신의 관심과 유사한 이 같은 원전의 계층과 미에 대한 폭 넓은 탐구를 자신 특유의 개성적인 연출을 통해 시청각적으로 승화해낸다. <상실과 아름다움>에서도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픽션에 다큐멘터리적인 푸티지를 섞어냈었다. 이 같은 마르첼로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연출은 본 극에서도 이어진다. 하지만 원전이 된 문학을 시청각적으로 승화시키는 본 극에 있어서, 픽션과 현실적 푸티지 사이의 층위는 이전보다 더욱 무르익고 깊어진다. 영화는 가상으로서의 픽션과 현실로서의 푸티지를 오가며 두 층위가 나뉘고, 픽션에서도 연출의 기조에 있어 두 갈래로 나뉘는 듯 보인다. 그 두 층위는 마틴이 속한 프롤레타리아적인 연출과, 엘레나가 속한 부르주아지적인 연출이라 할 수 있다. 허나 전자가 우리의 삶에 더 밀접한 것이라 한들 이것은 여전히 리얼리즘이다. 진정으로 삶을 비추는 것으로서의 자연주의는 푸티지에 내재한다. 즉 가상으로서의 픽션은 현실적인 것과 현실유리적으로 나뉘기보다는, 계층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부르주아지의 취향이 현실유리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연출은 극의 시작에서부터 대두되는 핸드 헬드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실제 시선이 흔들리는 리얼리즘에 근접해 보인다. 한편으로 리얼리즘적인 연출이 거의 언제나 가리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을 지칭하는 연출로서 더욱 타당하게 느껴진다.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 선원 마틴과 부르주아지적인 취향에 몰입해있는 엘레나의 삶은 그 흔들림이 상이하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적인 연출은 곧 부동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움직임은 마틴과 그가 살아가는 뒷골목을 포착할 때 더욱 대두되고, 엘레나의 가족에 있어서는 고정된 카메라의 딱딱함이 대두된다. 이러한 계층과 관련된 삶 이외의 주목할 만한 연출은 16mm필름을 사용한 자글거리고 그레인이 언뜻 보이는 매체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극이기에, 초기 영화시대를 드러내는데 효과적인 매체로 보이며, 특히 후술할 고전적인 미장센들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매체다. 또한 계층갈등이 도드라진다 한들 결국 마틴의 척박하고도 힘겨운 삶을 드러내는 극이기에, 자글거리는 질감은 그의 삶을 지칭하는데도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이외의 연출은 마틴의 정신없이 흘러가는 삶에 상응하는 듯한 짧고 빠른 리듬을 가진 숏들의 연속이라는 것, 또한 엘레나에게 몰입되기 이전 마틴 또한 현상계에 떨어진 누군가의 이데아라는 것을 드러내는, 그를 연기하는 루카 마리넬리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시점 숏들이 흥미롭다.




영화는 음성기록을 남기는 마틴의 모습을 포착함으로써 본격적인 그 서문을 열어젖힌다. 원전으로 유추하건데 그 씬은 비로소 문학계에 인정을 받은 직후, 혹은 그 이전의 마틴의 모습을 포착한 씬일 것이다. 영화는 그러한 이전을 포착하기까지는 비교적 원전에 충실한 편이요, 그 이후는 살짝 원전을 뒤트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 이전부터 살펴보자. 원전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인 마틴이 처음으로 부르주아 계층을 갈망하게 되는 이유는, 엘레나의 집에 걸려있는 회화 한 폭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부터이다. 그것에 마틴은 깊이 빠져들다가, 이내 곧 너무 근접하자 그것이 추한 마티에르의 덩어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윽고 마틴은 엘레나를 마주하게 된다. 역으로 그들의 첫 만남을 영화는 회화를 근접해서 마주한 듯 얼룩처럼 흐리게 포착하고, 이후 투명하게 포착하여 마틴과 엘레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어쩌면 그 흐릿함에서 영화는 그들의 비극을 예고한 것인지 모른다. 또한 흐린 것이 현상계의 민낯이자, 투명한 엘레나의 모습은 곧 도취되었으나 현현하지 않은 이데아라는 것을 예고하는, 감미롭지만 대단히 치밀한 비극이 예고되어있는 날카로운 시퀀스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마틴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때로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도 포착한다. 어떤 계급에 얽매이지 않아도 충분히 총명하고도 순일한 그의 영혼을 포착하기 위한 연출에 다름 아니리라. 한편 그 영혼의 순일함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결코 닿을 수 없다. 영화는 엘레나가 마틴에게 보낸 편지를 그녀가 직접 낭독하는 숏들을 보여준다. 마틴과의 계층구별이 뚜렷할 때, 그녀의 뒤 배경은 파랑으로 포착된다. 하늘의 색채로서 이상과 동경의 대상, 현실적으로도 값비싸고 존귀하여 희소했던 색채로서 아직까지 에덴은 엘레나에게 닿을 수 없다. 또한 원전에서는 마틴을 엘레나의 관능성과 욕망을 일깨우려는, 그녀 어머니의 책략이 강조되지만, 본 극에서는 보다 적나라한 계층갈등을 강조한다.


영화의 푸티지는 마틴이 엘레나를 상상하는 장면에서도 활용된다. 그는 현재의 엘레나로서 결코 닿을 수 없는 초상의 그녀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푸티지로서 그녀의 과거에 상응할 소녀를 상상하기도 한다. 픽션의 영역이 가상으로서 불가능한 것이라면, 현실의 영역으로서 어쩌면 가능했을 푸티지의 영역은 아직 계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의 그녀와 그를 상상하는 것이리라. 영화의 이 같은 푸티지는 실제 삶의 예찬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마틴이 상상한 과거의 영역도 프롤레타리아트도 부르주아지도 아닌, 진정한 대자로서의 삶의 영역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감독은 실제 삶의 현장들을 예찬하는 것을 영화로서 보여준다. 엘레나는 마틴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예술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임과 동시에 이 같은 계층을 전면으로 타파하고자 하는 개인주의자 마틴의 삶과 예술은 푸티지로서 나타나곤 한다. 그가 프롤레타리아트이기 이전 누나와 함께 그저 어린아이였던 시절을 회고하는 푸티지, 선원으로서의 기억과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담아낸 예술, 그가 읽는 세계의 진리를 포착하고자 하는 전문 서적들은 모두 흑백이나 새피아 톤의 푸티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상이 아니라 감상자의 영역, 실제로 흘러왔던 영역들을 지칭한다. 또한 계층으로 구별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흘러갈 삶에 다름 아니다. 부르주아지의 예법 없이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투쟁에 함께 동조하지 않음에도 마틴은 존재하며, 또한 엘레나의 관능성은 노동계층의 아가씨가 가진 관능성을 질투함에 피어난다. 마틴을 사랑하는 것도 부르주아지적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육감적이고도 야성적인, 전혀 부르주아지적인 취향이 아닌 마틴에게 매료되었다. 영화가 예찬하는 것은 바로 삶, 어떤 즉자적인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삶에 다름 아닐 것이다.


허나 영화는 그 괴리를 드러낸다. 부르주아지를 열망할 수 록, 마틴은 계층에 있어서의 동족혐오에 휩싸여 그의 주변을 모두 배척하게 된다. 또한 상위계층의 삶에 감회되어 진정으로 자신의 업으로 삼고자 한 작가로서 나아가는 여정은 넘어설 수 없는 현실적인 계층의 벽을 뼈저리게 실감해야만 한다. 그 괴리가 안타까운 것은 손에 잡힐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편지를 낭독하는 엘레나의 뒤 배경은 빨강이다. 지상의 색채로서 그녀 자신도 이상적인 존재가 아닌 현실적으로 마틴을 욕망함을, 실제 삶의 층위로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또한 짙은 키아로스쿠로가 강조되는, 마치 고전 멜로를 오마쥬한 듯한 그윽한 씬을 통해, 진정으로 실현 가능한 낭만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상위계층에 넘어가려는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부르주아지들은 여전히 그를 농락한다. 마치 겁쟁이처럼, 그것을 극복했다면 야만인처럼, 그들과 함께 찍은 사이에서도 마틴은 이질적인 존재다. 다른 귀족들이 흰색 옷을 입은데 비하여, 마틴은 하늘색의 양복을 입고 있으니, 여전히 그들 세계에 동화되지 못하고 엇도는 인물임이 강조된다. 하지만 이내 곧 부르주아지들의 얄팍함과 그들의 취향이 결코 현실의 층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며, 또한 그들의 제도가 진실한 존재들을 농락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오히려 어떠한 계층도 열망하지 않는 개인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강건히 확립시키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대자적인 삶, 그것은 마틴의 주변에서 푸티지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강조된다. 대신 그를 포착하는 연출 자체가 그간 전개된 푸티지처럼 즉흥적이고 현실적인 구도 및 이미지 그 자체만이 대두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꿩 사냥도 그렇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작가로서의 자기존재에만 관심 있으며, 이러한 삶의 영위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자긍심과 품위도 내려놓은 것이다.


영화는 동시대에는 위험할 수 있는 잭 런던의 개인적인 정치사상을 보다 온건한 방향을 바꾼다. 파시즘 이전의 작품이기에 그 사상에 모태가 된 초인과 노예의 관계에만 치중한 니체의 해석을 거둬두고, 사회진화론에 치중하는 개인주의자로서 마틴의 성향에 집중한다. 원전에서처럼 브리스덴은 그에게 큰 스승이 된다. 영화는 원전의 시적 표현, 문학적 수사들을 감각적인 푸티지로 대체하고 있는데, 원전에서처럼 브리스덴의 위대함은 마찬가지의 푸티지로 번뜩인다. 허나 원전에서처럼 브리스덴은 자살한다. 특히 본 작에서 강조된 상징은 바로 성경 속에 감춰둔 권총이다. 그것은 곧 자살임과 동시에, 기독교적인 세계가 이끈 죽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독교적 세계란 곧 제도에 다름 아니다. 원전에서처럼 존재 그 자체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마틴을 엘레나는 뿌리친다. 그들의 사랑은 존재 대 존재로서가 아니라, 다른 계층으로서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의 열망이었다는 것이 폭로된다. 이별과 브리스덴의 죽음 이후에 마틴의 책은 대성공을 거둔다. 선원이자 노동계층, 부르주아지를 열망하는 작가지망생, 그리고 어떤 계층도 열망하지 않는 개인주의자 마틴의 존재는, 특히 영혼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하지만 결코 온전한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브리스덴의 죽음으로 목도하며, 그의 영혼은 병든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련의 변주는 이 시점에서 나타난다. 성공 이후의 공허를 보여주는 침몰하는 배의 푸티지, 그것은 출판 이후 병든 마틴의 영혼에 상응함과 동시에, 원전에서 그가 자살하는 결말에도 상응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전에서의 그는 성공 이후 영혼이 병들자 칩거생활을 하였고, 더 이상 집필이나 강연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영화와 원전의 가장 큰 차이다. 어쩌면 원전에서 계속 마틴이 살아있는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도 느껴지고, 또는 그가 적극적으로 사회 내부에 가담하며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이탈리아 내부를 비추려는 의도로도 읽혀진다. 그리고 원전과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후반부의 비중에 있을 것이다. 원전은 방대한 분량을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하는 마틴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활용하지만, 본 극은 성공 이후의 마틴의 삶을 포착하는 그 분량도 매우 상당하다. 그 삶은 길기만 할뿐 지리멸렬하며, 푸티지도 희박하고, 그 자신이 푸티지로서 비춰지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은 마치 그의 존재처럼 내재적 가치를 인정받는 대신 이념 및 계층의 투쟁을 위한 도구로서 전락한다. 원전에서 분명 뒤틀리게 변해갔지만 표면적으로는 평온하여, 그 병든 영혼을 단지 마르게리타만이 포착할 수 있었던 상황과는 달리, 본 극에서 마틴의 초상은 누가 봐도 황량하다. 제도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길 바랐다. 부르주아지들이 가진 모순적이고도 이상향의 삶을 담아내지도 않았고, 누나와 같은 노동계층들이 열망하는 해피엔딩을 담아내지도 않았다. 본 극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푸티지, 현실 그 자체로서의 삶을 담아냈지만 그것은 여전히 제도와 이념에 의해 재단된다. 극의 말미에 찾아온 엘레나조차 그녀의 계층을 갖게 한 어머니에 의해 떠밀려나온 것이다. 그것에 마틴은 좌절한다. 이는 원전의 배경이 되는 미국을 마르첼로의 조국인 이탈리아로 옮겨온 연유일 수 도 있으나, 그가 자살로 끝맺음한 원전의 비극에 일련의 구원을 선사하고 싶은 열망에서 비롯한 것일 지도 모른다.




엘레나와의 작별 이후 마틴은 존재 그 자체로의 자신의 환영을 마주하고, 이를 따라간다. 이후 엘레나가 상복을 입고 있는데, 이는 원전에서처럼 실제 마틴의 죽음일지도 모르고, 자신으로부터 그를 떠나보낸 개인적인 추도식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환영을 따라감으로써 마틴의 영혼이 다시금 회복했다는 것에, 또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대륙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서 존재 그 자체로서의 여정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원전과 다른 본 극만의 구원이리라. 그것은 마틴의 죽음 이후의 구원일지도 모르고, 실제 삶에서 가능한 구원이자 회복일지도 모른다. 다만 현세이든 내세이든, 마틴은 언제나 존재 그 자체를 갈망한다. 전쟁으로부터 저 멀리, 존재 그 자체로 있을 수 있는 태양, 삶을 향한 추동으로 여전히 향해나간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다 한들, 강인한 그의 육신을 결코 부실 수 없다. 자살을 행하며 삶을 향한 추동을 느끼며 심연 속으로 침잠해간 원전과는 분명 다른 일련의 희망이 느껴진다. 이렇게 마르첼로는 잭 런던의 원전을 빌려와 전작에서의 논의를 연장한다. 제도에 의해 구획된 존재, 가치, 아름다움이 아닌, 그들 자체의 내재적 총체와 마주해야한다는 것이리라. 미국을 배경으로 한 원전을 탁월한 솜씨로 이탈리아로 옮겨내었고, 또한 시적인 문학의 맛은 다채롭고 감각적인 영화의 맛으로 승화시킨다. 더욱이 본 작품으로 볼피컵을 수상한 루카 마리넬리는 마치 네오리얼리즘 시절 비스콘티의 작품에 출연한 알랭 드롱을 보듯, 정제되지 않은 야성미와 그 안에 내재한 순일한 영혼을 세밀한 감각으로 표현해내며, 여러 시대를 간직한 영화의 다채롭고도 아름다운 앙상블에 깊이를 더한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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