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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Oct 18. 2019

크리스토퍼 오노레, <마법에 빠졌어요>

그대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서, 부산영화제 상영특집(2)

*2019 부산영화제 상영특집(1), 부산영화제 상영 기대작리뷰입니다.

*아트렉처가 부산영화제 프레스로 참여한 취재리뷰입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115


동시대 프랑스 영화감독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이를 꼽으라면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을까. 그는 언제나 개개인의 욕망과 그것의 불발을 영화의 주된 소재로 사용한다. 그의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 중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이들은 방탕해보일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로부터 유리된 인물들은 정신적으로는 고고할지 몰라도 육체가 느끼는 권태와 결핍에 의한 날카로운 신경질을 참지 못한다. 한편으로 욕망에 아무리 밀접한 이들이라 한들 그것이 언제나 욕망에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들이 바라보는 욕망의 대상과의 사이에는 심연과도 같은 거대한 간극이 자리하고 있기에, 언제나 그들은 욕망의 대상을 바라보고, 욕망의 대상은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바라보는 불일치의 연속이 그려진다. 이러한 소재를 그는 자크 드미 풍의 일상적인 뮤지컬로 녹여낸다. 그래서 다루는 것에 있어서도,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에 있어서도 오노레는 감각적이다. 하지만 그 감각적인 형식에 있어 드미의 성취를 온당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인상주의자들이 무심히 거리를 산책하는 듯한 플라뇌르적인 시선 속에서 대단히 일상 속에 녹아든 뮤지컬 영화를 선보인다. 드미의 정교한 미장센은 오직 그와 드뇌브에 대한 헌사와도 같았던 <비러브드>에서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비러브드>의 일탈 이후 그는 다시금 현실과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욕망을 바라본다, 그 짧은 황홀경과 그 후에 닥칠 거대한 공허를 포착하며.



크리스토프 오노레


본 극은 뮤지컬은 아니다. 극적이고도 치기어린 연출과 음악을 강조한 감각적인 멜로물이라 할 수 있다. 드미와 온당 닮아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여전히 그가 엿보이는 측면들이 있다. <쉘부르의 우산>과 <로슈포르의 숙녀들>에서 열연한 까뜨린 드뇌브의 분신과도 같은 키아라 마스트로얀니가 대신 거리를 활보하고, 사랑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는 분명 드미와 유사하다. 욕망은 곧 격정적인 본능의 흔들림,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출렁이는 자신들의 내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도입부의 극적인 핸드 헬드는 이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에 상응하는 듯하다. 이러한 욕망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내가 타인을 바라봄에 어떤 욕망이 형성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 타인에게서 내 욕망의 진위를 밝혀낼 수 없다. 타인과 함께 놓인 그 시공간에 의해 나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라 어떤 욕망의 맹아를 맺힌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키아라 마스트로얀니가 연기하는 마리아를 중앙에서 강조하는 구도가 나에 의해 규정되는, 나만의 것인 욕망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만 같다. 이윽고 영화는 마리아의 앞과 뒤, 상반신과 하반신, 타인이 보는 그녀와 그녀 자신이 거을로 보는 모습 등, 그녀의 총체를 대단히 리드미컬하게 분절된 숏의 연속으로 담아낸다. 그녀의 파편들은 모두 모아지고 직조되어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남편 리샤르와 함께 살아가는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언제나 온당 드러난다. 하지만 리샤르는 구조물 등에 가로막혀있거나,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잘려져 나가는 등 결코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또한 리샤르와 마리아는 서로 단절되어 있다. 프레임 내부에 함께 놓이지 아니하고, 또한 각자의 문지방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에게서 침입, 위반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 리샤르에게서만 그렇다. 리샤르는 마리아 서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일련의 '위반'을 행하였고, 마리아는 이를 불허한다. 또한 리샤르는 그녀가 목욕하는 나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다. 연적인 아스드뤼반은 옷을 벗어던지는 위반으로서 나체를 볼 수 있지 아니했던가. 리샤르에게서 위반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마리아는 어떠한가. 영화의 서두에서 그녀의 두 가지 위반이 목도된다. 하나는 교수로서의 그녀가 학생과 그릇된 욕망을 행하며, 또한 그 대상 아스드뤼반이 연인과 함께한 그 내밀한 현장을 폭력적인 시선으로 훔쳐봤다는 것이다. 결코 훔쳐보아선 안 될, 상대방의 가장 나약하고도 수치스러운 치부를 찌르는 위반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리샤르라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며, 불륜이라는 위반이 하나 더 추가되지 않던가. 허나 욕망의 본질은 언제나 위반이다. 바타이유는 인간이 동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속성들이 노동의 시간이자 폭력이라는 금기로 보았고, 이 시간과 금기를 넘어서서 욕망을 동반함과 동시에, 일련의 수치심과 수줍음을 느끼는 것을 인간의 에로티즘으로 보았다. 하지만 결혼에 의해 서로의 신비를 벗겨내는 그 위반은 사라져버렸다. 현재에 행한 불륜 이외의 과거의 욕망들도 그렇다.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가 여성을 구획한 폐쇄성으로부터 위반한 마리아, 사촌과 얕은 근친을 행한 마리아, 10대의 리샤르가 30대의 피아노 선생과 행한, 성인의 입장에서 금기에 다름 아닌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연상케 하는 그 관계 등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모든 욕망들은 금기로부터 위태롭다. 영화는 금기를 위반하는 에로티즘의 민낯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는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욕망 자체를 온당 옹호하는 극은 아니다.




마리아는 불륜이 적발되자 집을 벗어나서 집의 건너편 호텔 212호에 투숙한다. 그리고 리샤르는 집에 남아있다. 집에 남아있는 리샤르와, 그 공간을 떠나는 마리아의 상반되는 태도를 통해서, 둘의 결혼의 역사를 함축시킨다. 리샤르는 어떻게든 가정을 사수해왔던 역사, 마리아는 이기적인 욕망에 굴복하여 바깥으로 계속 나돌았던 역사를 말이다. 각자는 서로가 집으로서 대화한다. 이러한 집에 일련의 마법이 발생한다.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25세 시절 리샤르의 모습이 현현하고, 리샤르가 마리아와 결혼하기 이전 만난 피아노 선생 이렌 또한 현현한다. 또한 마리아가 그간 관계를 가진 온갖 욕망의 대상들이 집대성되고, 그녀의 책임을 묻는 어머니 또한 현현한다. 그것은 정말로 우리의 현실에 당도한 기적인 것인가? 영화는 아니라 답한다. 이렌이 피아노를 치지도 않는데 소리는 들려오고, 무엇보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줄곧 강조된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집과 호텔, 그것은 그들 각자의 결혼의 역사가 함축된 공간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굽어보는 것이리라. 하이 앵글 구도에서 과거 욕망의 대상과 함께 놓인 프레임을 굽어보는 영화의 시선은 일련의 반성작업에 다름 아닐 것이다. 과거의 기억들을 되돌아보고 일련의 죄책감을 느끼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언제나 자기 자신을 깨닫기 위함이 아니다. 마리아는 25세의 리샤르가 이렌을 선택할 것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고, 리샤르는 이렌이 보다 적극적으로 유혹하여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즉 자신의 욕망에 대한 선택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상대방한테 전가하는 것이다.


허나 이윽고 마리아의 의식이라 불리는 남자가 현현한다. 그리고 25세의 리샤르는 살이 찌고 시간이 피부의 탄력을 앗아가 남루해가는 현재의 리샤르와 마주하고, 이렌 또한 레즈비언임을 자각한 지금 여기의 이렌과 마주한다. 하지만 현재의 리샤르는 25세의 리샤르가 자신인 바를 인지하지 못하며, 이렌은 자신이 자각하게 될 레즈비언으로서의 성 지향성을 부정한다. 모두 자기 자신을 모른다. 허나 그러한 자신의 모든 총체 또한 끌어안아야만 한다. 앞서 언급한 시계 초침 소리가 시간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음을 환기시켜 주며, 또한 올해 초 프랑스에서 개봉한 <신의 은총으로>나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와 같은 동시대적인 영화들이 극 중 세계에도 상영되고 있어, 영화가 현재를 다루는 것을 가리킨다. 오노레는 영화를 통해 사랑은 과거 지향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롤랑 바르트는 욕망에 대한 그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총체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이미지를 사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타인을 이미지로서 바라보기 위해 필터와 판단과정을 거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현재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그것은 미세한 과거일지 모른다. 또한 현재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불순한 것들이 모두 소거된 과거의 기억만이 우리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이미지를 바라보며 사랑이 가능했노라고 한탄한다. 지금 여기가 불완전하노니 우리는 과거의 기억만을 바라보고, 우리의 현재에 이러한 이미지에 부합하는 타인이 나타난다면 금세 위반을 시도한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가. 분명 현재적인 사랑은 인류 평생의 숙원사업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논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결혼이다.


영화의 원제인 <chambre 212>는 212호 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212라는 숫자의 프랑스 헌법은 결혼의 당사자들이 서로간의 신실한 의무,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과거에 놓여있다. 현재의 불완전한 상대방을 바라보면 언제나 사랑은 식어버리고, 이 같은 권태에 연인과의 금기를 위반하여 다른 욕망을 찾아 떠난다. 허나 그것은 결혼 이전에만 가능한 것이다. 결혼이라는 신실한 계약을 지킬 것이라면, 우리의 욕망은 언제나 제어되어야만 한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결혼은 상대방의 과거까지도 끌어안아야만 한다.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타인의 외피, 정신성만이 아니라, 그것이 밟고 서있는 과거까지도 끌어안아야만 한다. 그래서 영화는 '모두와 결혼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마리아는 리샤르와의 결혼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다시금 길을 걷는다. 그리고 옆으로 시선이 샌다. 하지만 그것은 멈추어야만 한다. 홍상수의 <클레어의 카메라>를 연상케 하는 사진적인 마무리, 그것은 결혼에 의해 지속될 수 없는 사랑, 욕망을 논한다. 오노레가 계승하는 드미적 속성은 다름 아닌 사랑과 욕망, 그리고 결혼에 대한 것들이다. 정신성만 드미와 유사할 뿐, 뮤지컬은 감각적인 멜로극으로, 색채는 디오라마나 연극적인 날씨로 뒤바뀌며 오노레 고유의 감각성을 구축하려한다. 다소 뻔하긴 하지만, 그 장치들에 충분히 속아줄 만큼 감각적이다. 그리고 드뇌브의 분신과도 같은 키아라 마스트로얀니는 어머니의 숨겨내는 비밀스러운 연기와는 달리, 대단히 대담하게 많은 것을 드러내는 연기를 선보인다. 하지만 달라진 삶의 형태와 연기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하는 사랑, 결혼의 형태는 유사하다. 현실의 사랑을 논한다면, 결코 사랑의 불가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리라.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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