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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Nov 07. 2019

페드로 코스타, <비탈리나 바렐라>

흘러가는 어둠, 과거에서 다가오는 빛, 부산영화제 상영특집(4)

*2019 부산영화제 상영특집(4), 부산영화제 상영 기대작리뷰입니다.

*아트렉처가 프레스로 참여한 취재리뷰입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169


19세기의 화가들은 더 이상 이상향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미를 갖춘 여성들을 화폭에 옮기길 거부하였다. 이전까지의 화가들이 자신들의 뮤즈들이 가진 추한 요소들을 화폭 속으로 옮겨내며 그들의 '추'를 소거하는 작업을 일삼았다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연인이자 뮤즈들이 가진 추를 소거하지 않은 초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치중하였다. 19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뮤즈는 빅토린 뫼랑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마네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그녀는 <올랭피아> 및 <풀밭 위의 점심>,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과 같은 대표작의 모델로서 유명하다. 마네에 의해 캔버스로 옮겨진 그녀는 더 이상 비너스, 님프, 이상향의 여인이 아니었다. 창부, 도발적이고 천박한 여인, 군살이 튀어나온 일상의 여인으로 그녀는 화폭 속에서 반영구적인 불멸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같은 작품들을 보며 캔버스에 드러난 대로 마땅히 빅토린의 삶도 일치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마네가 이상향에서 추락시킨 현실과 나락의 여인상 또한 결코 진실은 아니었다. 빅토린 뫼랑은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에서처럼 옷을 헐벗은 창부는 아니었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고 교양이 넘쳤던 여인으로, 오히려 그녀의 이러한 진실은 마네에게서 드러나지 않는다. 당돌하고 주체적인 눈빛만이 마네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뫼랑의 유일한 진실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작가들이 아무리 현실적인 바를 표현한다 한들, 수동적인 뮤즈들은 주체적인 창작자에 자신의 존재가 왜곡되고 지워지곤 한다. 동시대에도 이 같은 창작자와 뮤즈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시네아티스트인 페드로 코스타는 그의 신작 <비탈리나 바렐라>를 통해 창작자와 뮤즈 간의 대등한 관계를, 역설적으로 뮤즈의 삶이 지배적인 창작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이름, 경험과 일치하는 작품을 연기하는 비탈리나는 코스타의 주관성만을 표현하는 뮤즈가 아니며, 코스타는 잡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삶만을 고스란히 응시하고, 이렇게 그녀의 삶을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겨내며 그녀에 대한 헌사를 표하는 작업을 행한다. 이 같은 전복적인 관계 속에서 페드로 코스타는 그가 고집하는 연출을 통해 자신의 색채를 드러내며, 그가 정교히 빚어낸 액자에 다름 아닌 프레임 내에 실제의 삶이 고스란히 옮겨온다. 이를 통해 감독의 색채와 뮤즈가 살아왔던 실제의 삶은 정교한 조화를 이룬다. 페드로 코스타가 고집하는 형식 중 하나는 4:3의 갑갑한 화면비라 할 수 있다. 사실 4:3화면비는 때때로 의아하게 느껴진다. 페드로 코스타가 필름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이행할 때, 재빠르게 새로운 기술에 편승했던 진취적인 시네아스트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4:3 화면비는 초기영화시대의 유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스타가 디지털이라는 매체에 주목한 것은 경제적인 요소와 촬영에 있어서 실용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름보다 투명하게 세상을 비춘다는 그 질감에 주목한 것도 생각한다면, 코스타가 집착하는 4:3의 화면비는 단순히 과거를 지칭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포르투갈 변방의 이민자 빈민촌인 폰타이냐스를 비추는 그의 관심에 의거했을 때, 4:3 화면비가 본 세계를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였기 때문이랴. 식민통치와 독립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시대가 흘러갔음에도 여전히 상위주체인 세계와 계층을 뛰어넘을 수 없는 갑갑한 그들의 삶을 재현하는데 이 같이 적합한 화면비가 또 있을까.


이 같은 화면비의 갑갑함, 수동성은 코스타가 기용하는 비전문배우들의 디렉팅에서도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한다면 네오 리얼리즘의 기수들이 비춰냈던 비전문배우들의 즉흥성이나 자유로움, 일상성을 감상자들은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코스타가 기용한 배우들에게서 이 같은 현실적인 연기는 찾아볼 수 없다. 브레송을 연상케 하거나, 카우리스마키의 작품세계에서 인간들이 가진 극소의 감정까지도 소거한 듯한, 극단적인 무감함이 강조된다. 그들은 요구받은 것 이상의 표현을 행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구현하는 폰타이냐스의 이민자들의 삶에 부합하는 연기의 모습일 것이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카보베르데 내부에서도, 그리고 몇몇 이민자들이 향한 포르투갈 내부에서도 그들은 여전한 지배주체들이 만들어내는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수동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아킹은 그 요구에 부응하여 노동만 행하다가 그 결과물로서 죽음을 통한 절대적 해방을 맛보지 않았던가. 그들의 얼굴에서 비춰지는 것은 오직 무표정함뿐이요, 움직임 또한 대단히 절제되어 있다. 철저히 지배주체에 의해 사물화되어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서도 안 될 그들의 감정은 때때로 결핍을 견디지 못하고 찰나적으로 분출되거나, 폭압적인 흐름에 의한 유실 속에서도 잔존한 감정이 이따금씩 포착될 뿐이다. 영화의 무빙이 기껏해야 패닝 정도로만 그치는, 고정된 카메라를 필두로 하여 대단히 정적인 프레임이 형성된다는 것도 이와 결부될 것이다. 그 작은 소우주와 무미건조한 삶은 그들의 삶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코스타가 긴 시간을 할애하여 구축하는 미장센으로 대체되는데, 이는 때때로 현실과 유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숏의 분절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원쇼트원씬 및 감상자와의 시간을 동화시키는 긴 호흡의 롱 테이크를 통해, 영화적인 표현이 아닌 현실을 비추는 매체로서의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카라바조, 일곱 가지 자애로운 행동, 1607


아마도 본 극이 분명 폰타이냐스의 생을 여실히 포착하면서도, 그것이 우리와는 일련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일련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비탈리나 바렐라>라는 타이틀이 띄워지기 이전에, 폰타이냐스의 사람들은 오직 문을 열고 출입하는 사람들만이 포착될 뿐이다. 퇴장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출입하는 사람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퇴장하는 사람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윽고 등장하는 씬에서 포착되는 것은 조아킹의 혈흔이 묻은 침구다. 퇴장을 논하는 이들의 죽음은 아니지만, 편집을 통해 퇴장이 곧 죽음임을 상징한다. 비탈리나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불태워지는 나무와 향, 그리고 십자가 등의 상징을 통해서 죽음은 암시되고 있으며, 또한 밤에 내려앉은 자욱한 어둠이 결코 가시지 않으며 불쾌함을 자아낼 뿐이다. 마치 이탈리아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조를 연상케 하는 짙은 어둠 속에서 개개인의 존재는 흐려진다. 장례식장 내부로 진입하는 사람들에게서 강조되는 것은 그림자다. 육체와 그림자 양자를 분간하기가 어렵다. 과연 걸어가는 것은 그림자인가 그들의 육신인가. 또한 미약한 불빛 속에서 도착한 비탈리나의 육체는 실루엣만이 어렴풋이 비춰진다. 여인은 카보베르데에서 입고 왔던 복식을 일부 벗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비치나, 이내 곧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상복의 차림새로 옷을 바꿔 입는다. 그림자와 어둠에 의한 흐릿한 형상, 그리고 옷가지는 폰타이냐스 내부에서 이민자들의 수동성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폰타이냐스의 공간성에 기인하는 것일 수 도 있으나, 타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류의 보편적인 상황에서도 기인할 것이다. 오직 진입만이 존재한다. 카보베르데에서 막 도착한 비탈리나는 맨발로 비행기에서 내린다. 그 발은 축축하여 물이 떨어진다. 그 물은 애도를 가리키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포르투갈에서 다시금 새로이 태어난 듯한 탄생을 연상케 하는 시퀀스처럼 보인다. 허나 그렇게 진입한 삶에는 오직 밤과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며, 또한 포르투갈에서 그녀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누군가가 말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되돌아가지 않으며, 그럴 수 도 없을지 모른다.


또한 떠도는 벤투라를 포착하기 위해 본 극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하게 패닝이 사용된다. 벤투라는 멀리서 걸어오다, 우리 앞에 근접한 거리까지 다가오지만, 이내 곧 떠나가고 만다. 다시금 돌아갈 순 없고, 장례식장으로 진군하는 사람들만이 포착되는 것처럼 오직 탈출은 죽음만이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즉 <비탈리나 바렐라>라는 본 극의 타이틀이 뜨기 이전, 문과 출입이라는 상징을 통해 감독은 삶과 죽음을 비춰낸다. 본 극에서 자욱한 어둠은 곧 그들이 다가가는 죽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삶에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본 극의 세계 속에서도 아침은 존재하고, 또한 비탈리나는 거대한 침묵을 깨고 비로소 발화를 시작한다. 죽음을 응시하던 영화는 삶을 포착한다. 비탈리나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날카롭고 예민한 성미가 드러나고, 또한 주름으로서 억겁의 시간이 새겨진 주름 가득한 살아 숨 쉬는 그녀의 얼굴을 말이다. 하지만 그 삶을 비춤에 다시금 연상되는 것은 죽음이다. 온당 조의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은 폰타이냐스에 부재한 것처럼 보인다. 어느 누군가는 참치캔을 팔아야 하며, 어느 누군가는 남편을 잃은 비탈리나 앞에서 지금 여기에서 궁벽한 본인의 처지를 하소연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참치캔을 파는 누군가가 포착된 이후에, 감독은 식기가 부딪히는 사운드가 울려 퍼지는 식사하는 장면이 포착되는 씬을 이어 붙인다. 만약 부정했더라면 다시금 애도에 집중하는 장면을 이어붙이지 않았을까. 살아있는 그들에 있어서도 죽음은 근접해있다. 당장 지금의 생계가 촉박함에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여유로이 누군가의 애도에만 집중할 수 없다.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던 남자의 부인인 마리나가 극의 말미에서 사망하지 않던가. 화재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폰타이냐스의 열악한 환경과 그 세계 자체에 근접해있는 죽음을 다시 한 번 환기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감독은 비탈리나의 실제 삶을 빌려와서, 그것을 두고 인물들이 보이는 반응들을 탐구하며, 다시 한 번 폰타이냐스라는 지역의 공간성을 환기시킨다.


영화는 또한 단절이 포착된다. 한 노모가 그녀의 아들로 추측되는 느토니를 찾아 헤맨다. 찾아 헤매는 노모는 오른편에 위치하고, 한 청년이 왼편에 위치해있다. 하지만 노파는 그 청년이 느토니가 아닌지, 다시금 아들의 이름을 되뇐다. 하지만 그 청년은 느토니가 맞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말미에 그 청년의 이름이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 청년과 노모 사이에는 어둠이 가로막고 있었다. 영화의 어둠은 죽음에도 상응하지만, 나와 타인사이의 거대한 심연으로도 보인다. 어둠이 가득한 세계에는 미약한 빛으로 공간이 구획되며, 그렇게 나눠진 각각에 개인들은 위치하고, 서로는 어둠을 뛰어넘지 못한다. 비탈리나가 호아킹의 이주에도 함께 떠나지 않던 카보베르데를 저버리고, 여생을 폰타이냐스에서 살겠다고 말하는 것도 온당 고인에게 헌신하거나 그를 기리기 위한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 며칠간 지속되었고 25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함일 것이다. 감독은 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비탈리나의 입을 빌어 주장한다.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남편이 떠나가게 놔둔 것이며, 마찬가지로 남편도 그녀를 차마 오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사랑에 자신의 삶까지 온당 수동적으로 바칠 순 없기 때문이다. 남편의 공간을 넘어서 폰타이냐스의 곳곳, 거리와 대로, 공터를 누비고 식물의 뿌리와 마주하는 그녀는 결코 남편의 그늘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 의한 삶이 아닌 다만 비탈리나가 그의 영혼과 대화하고 싶은 그녀의 삶이다. 하지만 결코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본토의 언어를 사용하는 남편은 부재한 상황이다. 마주한다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남편과 대면할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이나, 과연 변덕스럽고 주체적인 타인들의 간극을 뛰어넘으리란 가능한 것일까.


신부를 연기하며 누군가를 줄곧 찾아 헤매는 벤투라도 그 타인을 결코 마주하지 못할 것만 같다. 신부와 비탈리나의 회고 속에서, 그는 샹봉이라는 지역에서 신부로 처음 발령받았고 거기서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울부짖다 희생된 망자들을 향해 세례해주지 않음으로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바가 밝혀진다. 신부가 찾아 헤매는 것은 그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허나 그들과의 매개는 죽음이라는 운명으로 인해 단절되어있다. 다만 그 죽음이 인류가 초래한 비자연적인 비극이라는 것에 초점을 둬야 할 것이다. 또한 본 극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은 역사를 뛰어넘을 수 없는 개인들이다. 거대한 침묵을 깨고 비탈리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며 행한 것은 폰타이냐스로 떠나버린 남편을 회고하는 것이며, 신부의 발화와 '나는 갈거야'라 외치는 몸부림도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그들의 충돌도 역사에서 기인하며, 서로가 몸담고 있던 다른 이념의 충돌로 느껴진다.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역사를 대변하는 개인들은 서로의 입장을 항변한다. 그래서 폰타이냐스로 향하며 다시 태어나는 듯한 비탈리나, 폰타이냐스 내부에서도 터널을 빠져나오며 새로운 삶에 진입하려는 그녀의 초상에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감독은 언제나 그랬듯 지금 여기를 차갑게 포착할 뿐이지, 비전이나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빛은 결코 희망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어둠이 우리의 도처에 깔려있는 운명이자 거스를 수 없는 현재라면, 광원으로부터 기인해오는 본 극의 자연광은 과거의 것이다. 어둠이 아닌 미약한 빛에 놓이는 그들은 결국 과거에 놓이는 것이 아닐까. 어둠과 빛 양자 모두가 어떠한 희망도, 비전도 품지 않는다. 내세에 대한 믿음도 부재하며, 교회는 오직 떠나가는 사람들만이, 그리고 거대한 공허함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느토니와 그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등장하는 오전과 오후의 시퀀스도 결코 비전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비탈리나가 남편과 함께 가능했던 시절을, 아니면 그 찰나적인 결혼생활의 회고처럼 느껴진다.


비탈리나를 보호해야 마땅할 역설적이게도 지붕은 무너지며 그녀를 위협하고 있더라도, 그녀는 꿈을 품는다는 것이 가능했던 과거를 엿보며 버텨나간다. 비탈리나의 입을 빌려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보다도 왕족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의 사색을 전하는 것도, 벤투라의 입을 빌려 배신자 유다의 어둠으로부터 태어났기에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류의 운명을 말하는 것도 수동성을 환기시킬 뿐, 이를 극복하는 의지와는 무관해 보인다. 이렇게 감독은 뮤즈 비탈리나 실제의 인생을 거의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오며, 지금까지의 창작자와 뮤즈 간에 일반적이었던 수직적인 관계를 타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싸늘히 식어버린 무표정함 속에서 드러나는 비애와 원통함, 그리고 이 같은 감정이 일련의 자비로 미세하게 뒤바뀌는 표현은 감독의 몫이 아닌 비탈리나의 몫이요, 그녀가 진솔하게 드러낸 내면의 민낯일 것이다. 이를 마주하며 카보베르데에 살았고 폰타이냐스에 사는 그녀의 역사를 비추고, 폰타이냐스 이민자들의 처절한 삶과 마주하는 감독의 관심을 줄곧 이어가며, 또한 그 생을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행한다. 그 고찰을 통해 죽음과 단절을 일으키는 어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허물어져가는 지붕아래의 철창에 갇힌 우리의 삶을 비춘다. 또한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형상을 드러내는 빛이, 현재적이라거나 미래가 아닌 되레 과거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바를 드러낸다. 어둠으로 가득한 현재에는 오직 죽음을 향한 진군만이 있을 뿐이며,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드러난 존재들은 과거만을 읊는다. 가능성조차 과거에만 존재하고, 종교도 세속적인 바를 제어할 뿐 내세로서의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떠돌며 삶을 지속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감독이 언제나 그랬듯 비전을 약속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삶처럼 영화도 그 흘러가는 어둠에 올라타 그 풍경을 다만 포착할 뿐이다.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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