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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an 17. 2020

프랑수아 오종, <신의 은총으로> - 숨지 않으리

https://artlecture.com/article/1343


드라마 2020.01.16. 개봉 137분 프랑스 / 프랑소와 오종


https://www.youtube.com/watch?v=qFXLmhbJfXw&feature=emb_logo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욕망은 확신에 차있다. 상대를 바라보는 주체의 육체는 전율하고, 심장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허나 주체를 바라보는 대상의 욕망은 알 길이 없다. 타자인 그대는 수줍은 듯 얼굴에 띤 아스라한 선홍빛 홍조와 망설여하는 태도 때문에, 과연 주체를 원하는 것인지 그 욕망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타자를 향한 주체적인 욕망을 실현하기란 언제나 대단히 어렵다. 이러한 어려운 욕망을 두고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는 숭고한 행위라 표현한 바 있다. 내가 타인의 욕망 또한 나와 일치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이를 토대로 욕망을 진행하는 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고압적으로 짓밟는 것으로, 이는 저열하다. 허나 상대방의 자유와 태도를 존중하며 행하는 욕망은 신성하다. 나의 확신에 찬 태도를 상대방이 존중하는 것, 상대방의 수줍음 띤 욕망을 내가 존중하는 것, 두 육체는 합일을 이루면서도 두 개의 정신이 공존하는, 서로의 자유가 결코 침해되지 않는 고결함을 보여준다. 허나 욕망 그 자체는 종교에 의해서 악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신성한 종교들의 교리에 의해 죄악으로 규정되어 음지로 유폐되었다. 그런데 동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천박하다 규정한 그 욕망의 추문들이 지속적으로 폭로되고 있다. 그것은 유폐당한 고상한 욕망도 아니요, 저열하고 천박한 욕망에 진배없다. 이는 상대방이 응하지 않은 성폭력이자, 또한 성에 눈뜨지 않은 아동 및 청소년을 향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욕망을 더럽힌 종교지도자들의 추악함을, 그간 욕망을 치열하게 탐구해왔던 프랑수아 오종이 치열하게 폭로해낸다. 이 같은 문제를 다룬 <나쁜 교육>과 <스포트라이트> 및 <더 클럽>과 같은 작품들의 르포적인 폭로의 계보는 프랑스에서도 이어진다. <스포트라이트>가 사건을 조망하는 언론의 태도를 <더 클랜>이 범죄자들의 태도에 초점을 뒀던 작품이라면, <신의 은총으로>의 포커스는 피해자들에게 향한다. 영화 속에서 빛이야 말로 본 극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사용되는 연출에 다름 아닐 것이다. 태양은 찬란하게 작열하며 따스하고 온화한 황금빛을 내뿜는다. 허나 교회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그 빛의 색채는 은빛으로서 차갑고 위협적으로 식어있다. 무엇보다 교회는 그러한 빛을 받는 공간이 아니다. 영화 속 스테인드글라스와 장미창은 그 찬란한 색채들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교회는 공허하고 또한 색채를 잃은 차가운 공간으로 표현된다. 또한 영화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피해자들을 감싸는 어둠이다. 그들은 언제나 찬란하고 따스한 태양을 등지고, 차가운 그늘 밑에 놓여있다. 오히려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은 가해자들로서 직관적인 빛의 사용으로 양지와 음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모순된 상황을 드러낸다. 일례로 알렉상드르가 건설노동자인 어느 한 피해자를 만나러갔을 때, 마치 드러날 수 있을 거란 희망 속에 태양은 작열한다. 허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다루는 폭력적인 태도에 의해 피해자는 진술을 거부하고, 이내 곧 그들을 비추던 태양은 숨어버린다.




영화는 이러한 음지로부터 태양을 향해 찾아가는 극이다. 이들이 삶을 회복하고, 과거를 심판하며 태양은 그들에게 복권된다. 알렉상드르가 아이들과 함께 공원을 노니는 장면에서 태양은 찬란히 빛난다. 그들은 과거의 흉터를 지워낼 순 없겠지만, 상처를 아물게는 해야 하며 삶은 복권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 과정 속에서 대두되는 것이 종교계의 외면이다. 극의 초반부에 대두되던 연출이라면 바로 나레이션이다. 그들은 바티칸과 교구, 추기경을 향해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당한 피해를 역설한다. 하지만 그들은 줄곧 직접적인 교류를 꺼린다. 그래서 이들이 간접적으로 주고받는 편지를 읽는 나레이션이 두드러진다. 그 나레이션은 가해자와 그들의 부역자들이 진실 그 자체의 현현에 다름 아닌 피해자들과 마주하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피해자들은 편지 안에 진실을 담아내지만, 가해자들은 언제나 두루뭉술한 말로 회피하고 거짓을 담아낸다.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행하는 것은 언제나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이다. 영화는 숨어있는 그들의 민낯을 서서히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러한 간접적인 나레이션으로서 청각과, 시각은 일치하지 않는다. 청각이 과거의 처절한 절규라면, 시각은 그들이 과거의 상흔으로부터 어떻게든 삶을 재건하려는 몸부림에 상응한다. 한편으로 피해자들이 폭력적인 사회적인 분위기 및 청산되지 않은 과거 속에서, 온화함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몸부림을 치는지, 이러한 고군분투를 보여주는 연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또한 공간감이 대두된다. 알렉산드르가 진실을 읽는 나레이션이 펼쳐지고, 시각적으로는 교회를 가는 준비가 포착되는 시퀀스에서,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이내 곧 문은 닫혀버리고 집은 텅 비게 된다. 피해자들 작금의 현실, 온화함과 달리 내부는 텅 비어있고, 또한 진실을 향한 문은 언제나 닫혀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극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포착되는 신부는 여전히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이 같은 시퀀스는 여전한 그들의 권위를 드러낸다. 편지라는 간접적인 대화를 넘어서, 직접적으로 마주했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는 명백하게 구분된다. 허나 이 과정에서 언제나 가해자인 신부가 피해자를 남겨두고 떠나가 버린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사과와 진실규명, 심판을 촉구하지만, 그것을 마주해야하는 대상으로서 가해자의 자리는 언제나 부재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텅 빈 공간감 속에서 희생자들의 삶을 복권하기 위한 클로즈업이 강조된다. 감독은 영화를 이끄는 가장 주요한 세 명의 피해자들과, 이들을 둘러싼 가족들, 또한 오만하고 위선적인 가해자들의 영혼에 주목하게 만든다. 전자들이 띠는 삭막함, 상실, 온전하게 충족되지 않는 기쁨과, 후자들의 무감함과 위선적, 특히 가해자로서 포레나 신부가 띠는 미소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클로즈업은 서서히 익스트림 클로즈업 수준으로 근접해가며, 진실로 향해가는 그들의 여정을, 또한 박탈당하고 음지에 숨어있는 그들의 초상을 직관적으로 클로즈업하며 그들을 향한 삶의 회복을 강조한다.


영화는 피해자들의 삶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이들이 왜 20~30여년이 지나서야 나설 수 있었는지, 피해자들을 둘러싼 환경과 구조의 태도를 영화는 고발한다. 피해자들이 나설 수 없는 이유로서 교회가 강조하는 믿음을 지적한다. 교회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피해자들은 신도들로부터 지탄을 받을까 쉬이 나서지 못한다. 그리고 일신론의 믿음은 하나의 진리를 지향한다. 그렇기에 다양한 진리의 가능성을 외면한다. 피해자들의 등장은 곧 하나의 진리가 거짓임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이 같은 하나의 영위를 위해서 오히려 피해자이자 삶 그 자체로서 그들이 은닉되기를 요구받는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전하는 신부들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신의 은총으로’라는 표현은 이미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를 사하여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기적인 ‘다행이다’라는 의미로 변질된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할 것이기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영화는 가해자의 자기위안에 다름 아닌 기독교의 회개를 지적한다. 하나의 진리로서의 기독교, 또한 이 같은 영향이 지대한 정치권력은 이러한 일에 결코 적극적이지 않다. 언제나 미온하고 부동하게 움직인다. 영화는 피해자들을 위하지 않고 제도의 영속만을 바라는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고발한다. 그래서 영화가 이에 안티테제로서 강조하는 장면들이 바로 회의이다. 피해자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고, 또한 무신론자와 기독교도의 대비는 극명한 대척점을 이룬다. 허나 그들의 의견은 언제나 공존을 이루며 서로가 합의점을 찾으려한다. 피해자들이 삶을 복권하고, 또한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은 곧 본령을 찾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도,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있어서도.


영화 속에서 세 명의 주요한 피해자들은 너무도 판이한 각각의 가정환경이 대두된다. 이를 통해서 어떻게 기독교를 향한 믿음이 지속되는지,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신앙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지를 드러낸다. 알렉상드르는 신부에게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여전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는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부재한다. 부모는 피해자로서의 아들의 상흔이 그저 은폐되기를 바라고 쉬쉬하였다. 의존할 수 없는 대상이 없으니, 알렉상드르는 자연스레 의존의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프랑수아는 무교나 불가지론자를 넘어선, 무신론자로서 종교 자체를 부정한다. 그에게서는 의존의 대상이 존재한다. 부모님은 프랑수아가 성폭행을 당하자 적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프랑수아는 부모님께 의존할 수 있었던 반면, 형 루이는 여전히 기독교 신자다. 부모님은 피해를 입은 프랑수아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루이는 애정결핍이 있다. 이러한 애정결핍이 곧 기독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 것이리라. 에마뉘엘의 가정은 이혼한 편모가정으로서 해체가 대두된다. 어머니는 이혼 이후 아이를 교회에 보냈다. 아버지의 대리충족이리라. 허나 에마뉘엘의 실제 아버지도 전체를 위해 에마뉘엘에게 소란피우지 말라며 아들을 보듬을 줄 모르고, 부재한 아버지에 의해 교회에서 충족한 아버지는 그를 겁탈하였다. 영화는 각각의 가족의 형태들을 비추며, 이 같은 성범죄 속에서 회복해야 하는 것은 곧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해체된 가정은 다시 봉합을 이루고, 가족을 위해서 구성원을 희생시키는 그 전복은 다시금 뒤집혀야만 한다.


현실을 옮겨놓는 영화는 사실상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재판은 진행 중이며, 권력은 건재하여 이에 어떠한 판결이 이뤄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오종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장르적인 편에 속한다. <사랑의 추억>과 같은 건조한 리얼리즘을 추구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와 같은 감각적이고도 리드미컬한 연출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 채, 많은 대중들이 이 사건에 접근하길 바라는 친숙한 연출을 지향하며, 또한 세 명의 삶을 깊숙하게 파고드는 우직함을 선보인다. 그리고 사제들의 아동성폭행 이외에도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까지도 함께 엮어내며, 피해자들이 목소리내지 못하는 폐쇄적인 제도를 향해 규탄을 촉구한다. 영화의 결말, 여전히 시간은 밤이다. 허나 피해자들이 가정을 이루고, 또한 양지 위로 부상하며 여명은 밝아 오리라. 여전히 피해자들은 성기능 장애를 앓고 발작을 앓고 있으며, 트라우마에 의해 욕망은 찰나적이고 지속이 어렵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재건되어야만 하며, 진실한 사랑이 회복해야만 한다. 가해자들이 음지로, 피해자들이 양지로 향하면서 말이다. "신을 믿으세요?"라며 알렉상드르의 아들이 그에게 던지는 질문, 왜 신은 자신들의 매개자인 사제들의 성 범죄에 침묵하는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소한 선함과 정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도들과 무신론자들, 그들이 바로세우고자 하는 정신은 곧 종교의 본령이다. 그 본령을 외치는 신은 지금에는 없을지 모른다. 허나 우리는 신이 있는 세상, 침묵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움직여야 하리라. 




글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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