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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Mar 04. 2020

댄디 Dandy

옷 잘 입는 모던 보이의 남다른 삶의 태도

https://artlecture.com/article/1465



"아마 부유한 사람이겠지. 그보다는 직업 없는 헤라클레스에 더 가깝고." 파리의 음유시인 보들레르가 댄디를 두고 한 말이다.


사실 댄디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자도 아니면서 당당한 멋쟁이임에는 분명했다. 벨벳 깃이 달린 검은색 프록코트에 검은 실크 모자를 쓴 신사, 구김살 없는 새하얀 셔츠에 사슴가죽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멋스럽게 맬 줄 알던 모던 보이였다.

댄디는 이제 막 근대 시민사회로 도래하는 시점에 등장했다. 18세기 산업혁명과 계급혁명으로 물질적 풍요와 신분의 구속이 와해된 시점, 그 틈바구니에서 자생한 독특한 산물이 바로 댄디라 할 수 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James Tissot, The Circle of the Rue Royale, 1868




개성 있고 기품 있는 옷차림과 당당한 태도는 댄디의 핵심이다.

댄디는 18세기 프랑스의 로코코 귀족 사회에서 풍미했던 파스텔 톤의 수예품 레이스, 화려하게 수놓은 패턴과 금장을 두른 단추, 여기저기 매달린 리본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호리호리한 몸매가 부각되고 구김이 없는 깔끔한 옷차림을 선호했다. 이들은 쓸데없는 장신구일랑 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절제 있고 세련된 형태미를 추구했다.**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몸의 라인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것이 댄디의 멋이고 에로티시즘이다.




David Jacques-Louis, Portrait of Pierre Seriziat, 1795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댄디 <Pierre Seriziat>의 초상을 보자.

화자는 벨벳 깃이 달린 검청색 상의에 흰색 실크 셔츠를 입었다. 담황색의 사슴가죽 소재로 된 바지를 입고 부추를 신었다. 손에는 노란색 장갑을 끼고 지팡이를 쥐었다. 검은색의 높다란 모자는 의도적으로 약간 삐딱한 각도로 기울여 썼다. 머리는 귀족들처럼 구식 가발을 쓰지 않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스타일을 냈다.

매끄러운 흰색 린넨의 풍성한 넥타이는 패션의 하이라이트다. 댄디는 넥타이를 멋 내기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넥타이를 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라는 스탕달의 말까지 있는 걸 보면 댄디의 넥타이 사랑이 어지간히 대단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댄디의 까탈스러운 요구에 맞춰 옷을 재단하는 일은 아무리 유능한 재단사라 해도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장갑은 손가락 부분과 손등 부분으로 나누어 재단할 정도였다니 말이다.***




경계인


John Singer Sargent, Lord Ribblesdale, RibblesdaleLord Ribblesdale 1902

 



그러나 진정한 댄디란 단순히 겉멋만 든 사내들이 아니다. 보들레르가 그의 저서 <현대적 삶을 그리는 화가>에서 말하길 "댄디즘이란 단순히 옷차림이 아닌 삶에 대한 태도와 매너에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에 임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댄디의 중요한 자격으로 강조했다.

댄디는 문학과 예술을 경시하거나 여기에 일체 무관심한 사람들을 멸시했다. 오로지 자본과 노동만을 절대적 원칙으로 삼고 예술에 실용적 잣대를 들이미는 부르주아의 현실주의와 속물근성은 댄디에게 몹시도 거북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절과 교양을 숭배하면서도 실상은 그에 반하는 삶을 사는 귀족의 허위와 위선적인 면모를 댄디는 혐오하였다.

이처럼 '나'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것을 경멸하며 어느 쪽에도 섞일 수 없었던 이 '경계인' 들은 스스로 품위 있고 고상한 취향을 지닌 엘리트라 자부하며 새로운 인종으로서의 자신들의 설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 프랑수아 모리아크,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 오스카 와일드가 대표적인 댄디들이다.




순리를 거부한 유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의 초상

 



세상의 순리를 방해하겠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댄디의 가장 큰 소망이었지 모른다.

이같은 소망으로 죽을 때까지 세상의 중심부를 강타하며 저항한 댄디가 오스카 와일드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시인인 오스카 와일드는 원래 소문난 멋쟁이에 재치 있는 언변을 갖춘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다.

그는 리얼리즘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인사로 좀체 가난이라던가 삶의 무거움에 대해선 관심 밖인 사람이었다. 마치 삶에 치열해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가벼워지기라도 한다는 듯, 그는 오직 아름다움만을 음미하고 추구함으로써 댄디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는 듯했다.

심지어 그는 타고난 자아(본성)는 자연적이고 원신적인 상태이기에 그 자체를 고수하는 것은 급이 낮은 삶의 방식이라고 여겼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솔직하지 못하다. 가면을 건네주면 그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라며 자연 상태를 초월하는 것이야 말로 수준 높은 삶이자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넥타이를 잘 매는 것이 인생의 첫걸음이라는 표면의 철학을 삶의 신조로 삼았던'것 만큼 그에겐 잘 가꾼 외양과 우아한 매너가 더없이 중요했다.

"성별이 의심스러운 자만심의 괴물"이라는 으젠 룽테의 말은 오스카 와일드를 두고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스카의 자기애와 신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가 성의 관한 전통적인 규율에 전면적으로 맞섰다.

오스카 와일드의 문학은 성의 억압에서 비롯된 무의식의 해방을 표출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그는 자신의 리비도 -동성애적 취향- 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에 반한 그의 행보는 파격이자 윤리근간에 어긋나는 파렴치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는 옥살이를 피할 수 없게 됐고 유미주의의 대표적인 추종자인 오스카 와일드는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남루하고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 생을 마감하게 됐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마지막 경우에도, 여우에게 물린 상태에서도 미소 짓는 스파르타 소년처럼 미소 지"(보들레르) 었을 듯싶다.

매사에 무심한 사람이었으나 남달리 예민한 사람이었고, 아름다움을 찬미한 사람이었으나 고통을 겪는 사람이었고, 귀족은 아니었으나 교양과 품위를 바탕으로 하는 귀족 정신을 자신의 예술세계에 갖춘 댄디였으니.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삶의 첫 번째 의무는 가능한 한 예술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무가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오스카 와일드).



<참고도서>


* 쥘 바르베 도르비이, <멋쟁이 남자들의 이야기 댄디즘>, 고봉만 옮김, 이주은 해설, 이봄, 2014

** 위의 책

***위의 책

샤를 보들레르, <현대적 삶을 그리는 화가>, 정혜용 옮김, 은행나무, 2014



글 아트렉처 에디터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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