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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Oct 09. 2020

Not Alone, 박희현

https://artlecture.com/article/1899




HIGHLIGHT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 피해자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받는다. 성 학대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인 경험과 정서를 표현하는 일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정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주변의 시선에 주눅들지 말고 피해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해자의 자기표현 욕구는 존중되어야 한다. 박희현에게 작업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회복 탄력성을 회복시켜 주는 행위이다. 그것은 상처 치유의 일환이자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의욕과 열정의 표상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 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자신에게 정신 분석 치료를 받았던 여성 환자들이 말한 아버지의 성적 유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프로이트는 그것이 실제 경험이 아니며 여성 환자들의 왜곡된 환상이자 히스테리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근래에 와서 밝혀진 프로이트의 임상 사례 조작만큼이나 허무맹랑하고 신빙성 없는 주장이다. 프로이트의 의견은 그렇게 수많은 남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 인간의 마음의 발로이자 덧없는 바람일 뿐이다. 고래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안면이 있는 사람, 더 나아가 가족이나 친지에 의한 성폭행은 매우 흔하게 발생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친족 성폭력이 전체 성폭력 중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매년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는 사회의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개인 신상이 공개되는 걸 꺼리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경찰에 신고하고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더라도 재판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싸움을 포기한다. 우선 가해자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일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재판을 통해 피해자가 배상을 받고 가해자가 법적인 처벌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가벼워서 피해자의 상당수가 무력감과 절망에 빠져 소송을 취하하고 가해자는 거의 타격을 받지 않고 일상생활로 복귀한다.


친족 성범죄의 피해자는 그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가족의 평화를 깨뜨리고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몹쓸 존재가 된다. 가해자의 가족이자 피해자의 친지는 피해자를 창창한 젊은이의 앞길을 막는 해충 취급하며 사실이 공표되면 모두가 큰 피해를 입을 터이니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가족과 친지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피해자는 이를 받아들인다. 사건은 유야무야 처리되고 피해자는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지고 매일 치유되지 않은 자신의 상처를 곱씹으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는 근친 성 학대 생존자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기를 바란다.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한 당당한 태도와 소신 있는 발언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남은 친족 성 학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박희현은 친족 성 학대 피해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작업 속에 녹여낸다. 작가는 성범죄 이후로도 계속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수치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은연중에 금기시되는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2020년작 <아무도 없다>는 제목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화면에 존재한다. 칼을 들고 있는 한 떼의 사람들은 얼굴이 지워진 어떤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 무리의 배경에는 날카로운 칼날들이 사방에 위협적으로 비죽비죽 돋아 있다. 무슨 이유로 사람들은 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일까? 얼굴이 까맣게 지워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이 작품은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누군가를 둘러싼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해자를 응징하는 피해자 집단으로 보는 것이다. 많은 경우 친족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적인 증거가 충분하지 못해 가해자는 무죄 판결이나 집행유예 또는 가벼운 형을 받는다.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과거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건 오로지 피해자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처럼 생존자들은 힘을 합쳐 가해자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행한다. 두 번째로는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가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모습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다. 가해자 무리는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를 사춘기 청소년의 성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사소한 잘못으로 치부하며 일을 크게 만든 피해자를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해자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가해자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 꽃뱀으로 피해자를 몰아간다.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뱀은 요사하고 간교한 생물로 여겨졌으며 타락과 악의 상징이었다. 또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위험한 동물이자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박희현은 비난과 배척의 대상인 뱀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역이용한다. 뱀은 작가의 여러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너와 내 눈 안에서>에는 얼굴 없는 한 여자가 세로로 동공이 길게 찢어진 뱀의 눈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 검은 얼굴의 여자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여기서 ‘너’는 여자의 수호자인 뱀을 지칭한다. 뱀은 여자의 친구이며 수호자이자 조력자이다. 뱀은 다정하고 강인한 존재이며 상처 입은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다. 박희현은 사회가 자신을 사악한 존재라고 비난한다면 그 자신이 악이 되어 성폭력 생존자에게 가혹하고 불합리한 이 세상과 맞서 싸우겠노라고 부르짖는다.



박희현, <복수의 시간>, 2020, pen on canvas, 90.9×65.1cm


박희현, <너와 내 눈 안에서>, 2020, pen on canvas, 116.8×80.3cm


박희현, <제발 날 지켜줘 (나의 수호신)>, 2020, pen on canvas, 90.9×65.1cm


박희현, <아무도 없다>, 2020, pen on canvas, 90.9×65.1cm


박희현, <거울 속에서>, 2020, pen on canvas, 90.9×65.1cm



「아주 특별한 용기」의 작가 엘렌 베스와 로라 데이비스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해 생존자 스스로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조언한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은 심각한 학대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자부심을 갖게 해 주고 수치심과 두려움을 소멸하게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박희현은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하고 작업으로 표현한다. 2020년작 <거울 속에서>에는 그림의 전면에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여자가 있는 곳은 메마르고 삭막하다. 잎 하나 없이 메마른 가지만 있는 나무들은 뾰족하고 날카롭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다. 여자의 앞에 있는 거울에는 응당 비추어져야 할 여자의 모습이 없다. 거울 속에는 여자의 모습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은 마치 확대된 뱀의 가죽이나 표피처럼 보인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뱀은 상처받은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다. 여기서 우리는 뱀이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서 보이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반복되는 폭력으로 무기력해진 피해자가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피해자는 분노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범죄가 자신에게 남긴 상처를 계속 생각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가해자에게 분노와 증오를 품는다. 불안과 공포, 우울증, 수면 장애로 고통 받는 작가는 잠들기 위해 매일 약을 먹는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응징하고 자신이 받은 고통을 돌려주고 싶어 한다. 그러한 마음은 <복수의 시간>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작가는 선인장으로 대변되는 가해자를 공격한다. 선인장은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딱딱한 표피와는 달리 조직 내부에 수분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다. 뾰족한 가시로 뒤덮인 선인장의 외피는 견고하면서도 공격적이다. 질기고 튼튼하고 굳센 선인장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림 속 선인장이 부서져 속에 든 것을 쏟아내는 모습은 가해자의 파괴와 몰락을 바라는 작가의 염원의 표현이다. 선인장을 공격하는 무기는 여러 가지 종류의 수면제이다. 수면제는 작가에게 있어 치유의 도구이자 강력한 무기가 된다.

<제발 날 지켜줘 (나의 수호신)>에는 또다시 구원의 상징인 뱀이 등장한다. 그림 속의 뱀은 위협적이고 강인하게 보인다. 뱀이 지키고 있는 온실 한편에는 얼굴 없는 여자가 앉아 있다. 보호막이나 안전장치 없이 안이 훤히 보이는 온실은 외부 환경의 공격에 취약하지만 나비가 날아다니고 약간이나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풀과 식물이 있는 피난처이자 휴식처이다. 이 작품은 큰 뱀으로 표상되는 수호신,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강인한 존재가 자신을 지켜 주기를 원하고 스스로도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간절한 열망을 담고 있다.

범죄로 인한 피해와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상흔>에서 계속된다. 화면에는 버섯이나 균류의 자실체처럼 보이는 사물이 가득하다. 균류는 그늘 속에서 자라는 존재로 뜨겁고 빛나는 햇볕을 받으면 살 수가 없다. 작가는 그늘 속에서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배제되는 현실을 균류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균류의 뒤편에는 흡사 피부를 벗겨낸 인간의 근육 조직체와 유사한 3개의 사물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다. 마치 여성의 하체처럼 보이는 이 낯설고 기괴한 사물은 공공연하게 모욕과 배척의 대상이 된 작가의 경험과 주관으로부터 빚어진 일그러진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피해 사실을 고백해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과 편견에 찬 눈빛이다. 약자에게 가혹한 나라에서 생존자는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비정상적이고 해로운 존재처럼 여겨진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크고 작은 문제들로 살기 힘든 와중에 대중은 눈앞에 맞닥뜨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외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는 무거운 짊을 진 채 홀로 살아간다. 2020년작 <감옥>에서는 전면에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알 수 없는 존재는 울타리 너머에 있는 뱀을 바라보고 있다.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은 누구이고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은 과연 누구를 고립시키려는 것일까? 어쩌면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은 반인륜적 범죄 행위를 방관하는 가해자의 주변인일 수 있다. 아니면 생존자를 압박하고 힘들게 하는 타인이나 세상 혹은 편견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무기력증, 두려움, 절망감 등 온갖 정신적 외상과 질병에 시달리는 피해자는 끔찍한 폭력이 빚어낸 무형의 감옥 안에서 괴로워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꼼짝도 하지 못한다.

나락에 빠진 성범죄의 피해자는 소리소문 없이 우리 곁에서 사라진다. 생존자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고독이 삶의 목적을 상실한 피해자를 잠식한다. 박희현의 근작 <고독>에서는 매우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고독에 대한 표상이 등장한다. 그것은 고개를 숙이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적막한 어둠 속에 홀로 있는 사람은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사방은 검고 어둡다. 이곳은 피해자와 피해자의 상처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유구한 피해자 혐오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친족 성 학대 피해자는 공공연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다. 세상의 근거 없는 비난에 힘겹게 맞서 싸우는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처럼 고통스럽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열망은 작업에 고스란히 담겨진다. <내 세상에 너 홀로>는 울퉁불퉁한 절벽 꼭대기에 엉성한 천막을 치고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얼굴은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식별이 불가능하다. <상흔>에서 보았던 버섯이나 균류의 자실체처럼 보이는 사물이 존재하는 세계는 어둡지 않아도 텅 비어 있고 공허하다. 황량한 풍경 속 고독자 옆의 네모난 상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낸다. 혹 누군가의 관일까? 아니면 수면제가 든 상자일까? 답은 알 수 없다. 그러면 제목에서 지칭하는 너는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어쩌면 피해자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징벌을 받아 고독 속에 홀로 남겨진 가해자일 수도 있다.



박희현, <상흔>, 2020, pen on canvas, 90.9×65.1cm


박희현, <고독>, 2020, pen on canvas, 116.8×80.3cm


박희현, <내 세상에 너 홀로>, 2020, pen on canvas, 116.8×80.3cm


박희현, <악몽 속의 작업>, 2020, pen on canvas, 90.9×65.1cm


박희현, <감옥>, 2020, pen on canvas, 90.9×65.1cm



박희현의 작업은 직관적이고 명확하다. 작가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작업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은 명료하면서도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검은색 펜으로 성실하게 그려 낸 나날의 작업들은 차곡차곡 쌓여 또 다른 삶이 된다. 하지만 삶을 정립하고 회복하는 지난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박희현의 근작 <악몽 속의 작업>에서는 한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자의 얼굴은 검게 칠해져 있어 이목구비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있어도 여자는 편해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침대의 밑바닥에 불길한 검은 구들이 잔뜩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악몽이다. 여자는 기력이 소진되어 축 늘어져 있다. 공중에는 다양한 종류의 수면제들이 떠 있다. 수면제는 작가에게 짧게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도와주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또 악몽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생을 지탱해 주는 또 다른 조력자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 피해자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받는다. 성 학대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인 경험과 정서를 표현하는 일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정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주변의 시선에 주눅들지 말고 피해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해자의 자기표현 욕구는 존중되어야 한다. 박희현에게 작업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회복 탄력성을 회복시켜 주는 행위이다. 그것은 상처 치유의 일환이자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의욕과 열정의 표상이다.

친족 성폭력을 그저 한 개인의 불행한 경험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단 한 사람의 경험담이 아니라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친족 간 성폭행은 공공질서를 무너뜨리고 도덕과 윤리를 파괴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지극히 불친절한 이 세상에서 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은 지금보다 더 강력한 가해자 처벌을 주장하며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생을 이어 가고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의와 회복을 위하여 싸우는 생존자의 삶의 다채로운 양상은 우리 사회의 어둠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희현의 작업이 그 자신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숨이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저작권법에 따라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필자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영리적 ㆍ 비영리적 목적이든 간에 글의 인용이나 게재를 금합니다.




글 아트렉처 에디터_나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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