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 1929~2012)
자신만의 언어로 예술이라는 집을 짓는 여성 예술가들
https://artlecture.com/article/2793
한두해 전, 아이는 지금보다 어렸고 코로나 19의 대유행으로 어린이집에 가는 일도 불규칙했던 때 육아로 인한 우울증을 겪었다. 온종일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집안일과 육아에 매여 있었다. 아이가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세계를 공유하고 샘솟는 사랑을 느끼며 즐거웠지만 그러다가도 우울해졌고 가끔 통제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사소한 일로 아이를 꾸짖었고 남편에게 날 선 말을 던지고는 죄책감을 느꼈다.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표현을 따르면 ‘분열된 자아’로 살고 있었다. 글을 읽고 쓸 때는 고양감과 동시에 삶에 적극적이면서 자유로운 정신을 느끼는 반면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행할 때면 수동적이면서 억눌린,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자아를 발견했다. 둘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자신 안에서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삶은 그 자체로 피곤했다.
나만의 일을 찾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열망은 ‘엄마’라는 의무에 짓눌렸다. 필자 안의 어머니 상은 ‘아이를 한없이 사랑하는 엄마, 아이에게 너그럽고 언제나 인내하는 엄마, 자신보다 아이를 우선시하는 엄마’에 갇혀 있었다. 삶에 대한 열정과 아이를 위한 헌신, 두 가치는 공존할 수 없어 보였다.
남편의 삶은 아이 출생 전후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늦어지는 퇴근이나 주말 약속에 아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어떤 차이가 우리의 삶과 감정에 격차를 만드는 걸까.
남성들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창조와 성취, 야망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 누려 왔다. 그들에게 사랑은 이기적이다. 여성은 아이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늘 요구받는 반면 남성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여력이 될 때만 사랑을 실천한다(또는 그런 태도가 용인된다). 여성의 사랑과 남성의 사랑은 이토록 양극단에 존재한다. 사랑이 ‘남성이라면’, ‘여성이라면’, 이라는 전제로 규정되듯 알게 모르게 많은 단어와 개념이 성별에 따라 다른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여전히 선택은 ‘사랑’-여성적인 어머니의 사랑, 이타적인 사랑-문화 전체가 규정하고 지배하는 사랑과 이기주의-남성들이 종종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창조와 성취와 야망을 추구하면서 그래도 되는 것처럼 정당화하는 힘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성이 아니면, 우리의 운명은 여성의 이타적인 사랑이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그 양자택일이 틀렸음을 안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안다.”
44쪽,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를 만났다. ‘남성이라면’, ‘여성이라면’이라는 두 가지 선택만이 가능한 세계,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회가 틀렸음을 이야기하는 작가.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단어를 다시 돌아보고 여성의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진정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시인.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유대인과 비유대인, 이성애와 동성애 등 분리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언어에 저항하기 위해 ‘공통 언어’의 꿈을 노래했던 에이드리언 리치다.
에이드리언 리치(1929~2012)는 유 대인이자 뛰어난 병리학자였던 아버지 아널드 리치와 남부 상류층 기독교인이며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헬렌 리치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951년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시집 <세상 바꾸기>로 ‘예일젊은시인상’을 받았다. 미래가 촉망받는 작가로 주목받았지만 1953년 결혼한 이후 세 명의 아들을 낳아 키우며 ‘제도로서의 모성’이 여성에게 지우는 고통을 경험했다.
그녀가 1960년대 여성운동을 통해 가부장제의 실체를 깨닫고 레즈비언 정체성 탐구에 몰두했던 과정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에이드리언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유리한 조건에 놓인 엘리트 여성으로 성장하고 교육받으며 남성 중심의 사회적 압력을 외면할 수 있었으나 결혼과 출산, 어머니 됨이라는 여성적 경험을 통해 여성이 처한 차별적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는 그녀 삶의 전환점이 되었고 여성, 레즈비언,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종교와 인종, 동성애 등 모든 차별적 시선에 맞서 목소리를 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삶과 글쓰기에 있어 키워드는 정체성과 언어(시)다. 작가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치열한 고민으로 길어 올린 정체성은 자신과 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변화의 목소리를 발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특권을 지닌 토큰 여성으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레즈비언이자 유대인이라는 (미국 주류 사회에서) 외부자로서의 신분을 드러냈다.
“다시 보기는 되돌아보는 행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행위, 새롭게 비판적인 방향에서 오래된 텍스트를 접하는 행위를 말하며, 여성에게는 단지 문화 역사의 한 챕터 이상을 의미하는 생존 행위이다.”
26쪽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자기 성찰에서 비롯한 은유로 시를 썼던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에 실린 그녀의 주요 에세이에서는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노력과 삶을 글쓰기로 확장시켰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글은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와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의 모성’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에서 에이드리언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지적한다. 글로 쓰인 역사와 문학은 오랜 시간 남성 중심으로 왜곡된 채 이어져 왔고 여성들은 ‘여성을 규정하는 자아’와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자아’ 사이에서 분열을 겪었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여성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모성’ 또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제도로서 작동함을 에이드리언 리치는 말한다. 그녀는 모성을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제시했는데 하나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아이들에 대한 잠재적 관계로서의 모성이고 또 하나는 그 잠재성을 남성의 통제 아래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도로서의 모성이다. 우리는 주로 전자의 개념이 전부인 것처럼 모성을 대해 왔지만 그 속에 후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암묵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여성이 자신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임신과 출산, 낙태 등)을 자유롭게 내릴 수 없고 동일한 부모임에도 ‘부성’은 ‘모성’만큼 절대적인 의미로 아버지를 제약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시인은 대다수의 여성이 출산 이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데 실패하는 이유를 ‘엄마 됨이라는 제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육아가 여성의 몫으로 강조되는 현실에서 여성의 몸은 자유로울 수 없고 ‘희생적인 어머니’를 추앙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정신을 보수적인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 가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존재에 대한 제약과 비하는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해져 왔다. 여자애가 무슨, 함부로 몸을 놀리지 마라, 조신해야 한다, 가족을 위해 희생해라… 이런 말과 본보기로서의 어머니의 가르침은 딸들을 좌절하고 분노하게 했다. 에이드리언은 여성이 여성에게 전하는 ‘자기 비하’의 관념을 깨고 ‘자기 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여성, 여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딸인 여성에게 필요한 사랑은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용기 있는 어머니의 보살핌’이라고. 그런 어머니는 우리 주위에 살 만한 공간을 넓히고 여성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함을 스스로 보여주는 여성이다. 시인이 재정의한 ‘자신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를 모두 원하는 어머니’라는 표현은 커다란 위안과 용기로 내게 건너왔다.
“사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꺼이 공유해야만 여성들이 진실로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집단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133쪽,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에이드리언 리치는 남성의 시선으로 규정된 언어로는 여성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고 여겼다. 여성이라는 고유한 존재와 삶의 특성은 남성이라는 편향된 시선과 언어로 쓰일 수 없다고. 여성의 진실한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여성의 동질성을 내포하는 ‘공통 언어’가 필요하며 그 일은 더 많은 여성들이 사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공유할 때 가능해진다고. 여성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그녀는 독려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내면의 어두운 방을 파헤쳐 부정했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깨지고 일그러진 모습에서 무늬를 찾으려는 시도는 고통스럽다. 미래가 촉망받는 시인에서 세 아이의 엄마로 옮겨가면서 자기 분열의 힘겨운 과정을 직시했던 에리드리언 리치. 자아라는 복잡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내면, 어머니와의 특수한 관계, 유대인이자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석하며 세상의 모든 차별과 분리를 넘어서는 언어로 나아갔던 시인. 그녀의 삶과 글은 거짓없이 자신을 마주하고자 하는 이에게 영감을 준다.
한동안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렸다고 느꼈다. 바람직하다고 믿는 엄마의 모습과 자연스러운 자아 사이의 격차를 좁히려는 노력은 매일 필자를 좌절시켰으므로. 필자에겐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고 에이드리언 리치의 ‘자신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를 모두 원하는 어머니’라는 모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영감의 물꼬를 터주었다.
필자 안에서도 언어의 변화가 생겼다. ‘좋은 엄마’는 희생하고 인내하는 엄마가 아닌 ‘나 다운 엄마’라고. 부정적인 생각을 다시 바라보며 재정의하고 재발견하는 일을 글쓰기를 통해 거듭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회적 시선에 사로잡혀 자신을 꾸짖고 억누르는 목소리 대신 내면의 욕구를 존중하고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어주는 목소리로. 자신을 고유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모습과 견주지 않는 마음.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이와 남편을 사랑하는 다른 방식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딸과 아내, 엄마로 주어진 역할을 다 짊어질 필요가 없으며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 우리 모두가 부족한 존재이므로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충분하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선을 긋고 나를 가두던 언어에서 삶을 끌어안는 언어로,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언어로, 더디게 나아가고 있다. 나무처럼 그늘을 넓히는 말, 내게서 자라나 타인에게 연결되는 언어, 손을 잡게 하는 이야기. 그런 언어를 더 많이 발견하고 나누며, 만들어가고 싶다. 그런 필자에게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자기 안의 가장 어둡고 연약한 부분을 응시하라고. 거기서 떠오르는 언어를 발화하라고.
<사진출처>
에이드리언 리치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2/apr/06/my-hero-adrienne-rich-eve-ensler
https://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adrienne-richs-poetic-transformations
공통 언어를 향한 꿈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4337842
글 아트렉처 에디터_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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