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떠올린 기도
-독일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 그림에 나타난 죽음과 구원의 의미-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축축한 밤안개가 내려앉은 항구에 두 자매가 등을 돌리고 서있다. 자매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먼 풍경을 바라본다. 비장감마저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두 자매의 시선이 닿는 곳을 나도 숨죽여 따라가 본다. 짙은 쓸쓸함이 옷섶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련한 몽상에 젖어든다.
자매들이 서있는 곳은 부둣가의 대교이거나 선착장 같아 보인다. 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긴 난간은 수평선이 되어 두 공간을 가른다. 난간 안쪽은 지상이자 현실세계이고, 난간 바깥쪽은 지상 밖 공간이자 영적인 세계이다. 지상과 지상 밖을 가르는 수평선은 등 돌리고 선 두 자매와 교차하며 수직으로 갈라진다. 난간 밖으로, 안개에 싸여 어슴푸레 보이는 교회와 정박한 배들도 두 자매와 나란히 수직을 이루고 있다.
교회의 모습은 유럽 중세시대에 유행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수직선이 강조된 형태에 끝이 뾰족한 아치가 활용된 고딕 교회는 신에게 가까이 닿고자 한 이들의 염원을 반영하여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교회 옆에 정박한 배의 모습은 꼭 전설 속에 등장하는 폐허처럼 보인다. 주변을 둘러싼 안개는 낡은 집에 켜켜이 쌓인 먼지가 되어 눈 앞에 정박한 배를 보다 먼 과거의 화석물로 만들어 버린다.
이처럼 먼 과거 같기도 먼 미지의 세계 같기도 한 풍경은 낭만주의 풍경화의 특징이다. 낭만주의 주요 정서 중의 하나는 ‘먼 곳’에 대한 동경이다. 여기서 먼 곳이란 시간적으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의미하고 공간적으로는 먼 이국 취향을 의미한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한 낭만주의자들은 가까이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갈구했고 이들은 그 이상을 시간적으로는 중세 봉건시대에서 공간적으로는 동양에서 찾았다.
사실 낭만주의라는 어원 자체에 중세와 미지의 세계란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로맨틱’(Romantik)이란 단어는 프랑스어 ‘로망스’(Romance)에서 출발한다. 로망스는 상상력과 신비로운 중세의 이야기란 뜻으로 소설을 뜻하는 독일어의 das Roman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소설 같은 낭만주의 미술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수용자의 감정과 상상력에 호소한다.
이제 소설 속 세상을 거닐 듯, 이성의 불을 잠시 꺼두고 상상력의 불을 밝혀 <밤의 항구>를 다시 보자. 밤의 항구라는 현실 공간에 오버랩된 먼 곳을 바라보자.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그리고 삶과 죽음이 한 시 한 공간에 뒤엉켜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마치‘베일 쓴 여인의 얼굴’처럼 모호한 신비가 우리의 의식을 덮는 순간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진입한다. 육신의 눈이 감기고 영혼의 눈이 떠지는 순간이다.
공포와 전율
첫눈에 얼른 보이지 않았던 장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밤의 항구>의 화면을 가로로 나누고 있는 난간 바로 뒤로 어렴풋이 십자가가 보인다. 그곳은 십자가가 세워진 무덤이다. 무덤가에는 두 사람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린다. 이들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애도하는 중이다.
죽음은 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무기력한 가를 일깨운다. 프리드리히는 <해변의 승녀>에서 이 무한한 자연의 힘 앞에서 꼼짝없이 압도당한 인간의 모습을 일찍이 드러낸 바 있다.
검푸른 바다 그 위로 짙게 깔린 해무, 금방이라도 폭풍이 휘몰아칠 듯 꾸물꾸물한 하늘. 피할 수 없는 불행이 곧 닥쳐올 듯하다. 그림 전반을 휩쓰는 불안감 탓에 숨이 턱 막혀올 지경이다. 가까스로 눈을 돌릴 찰나, 풀 한 포기 없는 절벽 위에 서서 이 공포스러운 대자연의 위협을 온몸으로 대면하고 있는 왜소한 승려가 눈에 들어온다. 승려는 두려움으로 얼음처럼 얼어붙어 서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대자연의 힘 앞에 그는 무력하게 굴복당했다. 그러나 공포는 곧 놀라운 전율로 바뀐다. 자연 앞에서 마주한 인간의 한계는 자연에 대한 말 할 수 없는 경외심으로 우리를 전율케 한다. 바로 칸트가 말한 숭고의 경험이다. 이처럼 자연의 측량할 수 없는 크기와 보이지 않는 권능으로 두렵고 떨리는 감정은 프리드리히 그림 전반을 관통하는 정념이다.
자연에 대한 화가의 경외는 보다 심화되어 자연의 근원을 모색하는 데 이른다.
이 타오른 사유의 불씨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길로 화가를 인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연에 깃든 신성한 목소리를 듣게 된 화가는 그 신성을 화폭에 풀어낸다. <밤의 항구>의 십자가 무덤이 그것의 도상이다.
죽음과 구원
프리드리히 그림에서 나타난 죽음의 의미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임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 지상과 지상 밖,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를 뜻한다. 죽음은 양립할 수 없는 두 영역을 연결하는 중재적 역할을 하며 인간과 신이 하나가 되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할 관문이다.
프리드리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죽음의 의미를 예수의 죽음이 같은 의미로 확장시켰다. 하나님의 현현인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어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보인 것처럼 처럼,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죽음은 유한함의 끝에서 무한함의 시작을 연다. 이 구원에 대한 약속은 십자가 무덤가에서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슬픔을 위로한다. 그러고 보니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밤의 항구>의 자매들 또한 고독해 보이는 가운데 놀라운 신비를 전신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듯 보인다. 이들은 영혼의 눈으로 신성을 바라보며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지금 막 경험하는 듯하다. 특히 왼쪽에 선 자매가 오른쪽 자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제스처는 동일한 경험을 나누는 이들 간의 끈끈한 정서적 교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 불을 밝히고 있는 별 하나가 보인다. 프리드리히는 예술이란 기도의 언어라고 말했다. 화가의 기도가 별이 되어 조용히 반짝이는 것이다.
성탄을 며칠 앞둔 오늘, 마감일이 코앞에 닥친 원고를 쓰느라 노트북에 고개를 묻고 있던 차, 붉게 몸을 태우며 사그라들고 있는 석양의 꽁무니를 용케 잡았다. 2018년의 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해질녘이다. 올해가 어떤 이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암흑이자 광야와 같은 황량한 시간이었을지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진 나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나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며 그간에 나를 옥죄어 온 불편한 의식을 묻는다. 나의 이성이 눈을 감자 비로소 내면의 순수한 눈이 떠진다. 이윽고 진리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속삭인다. 이 진리는 현실의 시름을 잊고 확고한 평온과 안식을 약속한다. 프리드리히가 그토록 붙잡았던 구원에 대한 약속이다.
프리드리히의 기도를 떠올리며 나도 저 따라 소망 하나를 하늘에 띄워본다. 나의 소망도 하늘의 별이 되어 내가 사는 동안 저를 잊어도 저만은 계속 반짝여 주었으면... 하는 기도도 보태었다.
아트렉처 에디터_미술칼럼니스트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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