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술상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리톤 정경 Sep 30. 2015

누리어 가진다는 것

- 예술의 분배, '향유'를 논하다


 인간 삶의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식도락(食道樂)이다. 그러나 미식의 재미만을 좇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혀의 즐거움만을 찾아 편식을 하게 되면 잠시는 행복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영양의 불균형이 찾아온다.


 예술도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중문화를 음식으로 비유하면 간편하고 자극적인 ‘패스트푸드’에 가깝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 달콤하게 가공된 이미지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쉽게 소비된다. 고전 및 순수 예술이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어딘가 맛이 부족한 음식’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전예술은 건강식에 가깝다. 당장 나의 입을 만족시킬 만한 맛은 부족할지언정 인간 삶에 필요한 ‘예술적 영양소’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과거의 예술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고전예술은 왕족을 비롯해 귀족들의 투자와 비호 아래 꽃피며 성장했다. 투자자와 향유층이 동일하였고, 모두 사회의 상류층이었다. 이들에게 예술은 생계의 수단이 아닌 오락거리였고, 예술가들은 보다 완벽하고 무결하면서도 후원자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결과주의 예술 활동이 뿌리를 내리게 된 배경이다.


 당시에는 미덕이었을지 모르는 결과주의는 현대사회로 넘어오며 고전예술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예술을 누리고자 하는 향유층이 넓어지고 예술활동과 비예술활동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누구나 예술가임을 자처함과 동시에 작품을 만드는 이들의 과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4급 공무원 핵심리더 과정 인문학 교육 '오페라마' 中,



‘완성된 무대’만을 고집하던 고전예술은 결국 대중들에게 ‘재미없고 맛없는 음식’이 되어 영양가와는 무관하게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예술이 현대사회에서 좀 더 널리 향유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예술과 문화 역시 ‘모든 작용은 똑같은 크기의 반작용을 받는다’는 뉴턴의 ‘작용-반작용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대와 사회적 분위기, 대중의 취향이 ‘작용’이라면 예술 작품은 그에 대한 ‘반작용’이 된다.







 대중문화가 단기간에 융성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이러한 작용에 대한 ‘신속한 반응력’ 덕분이었다.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곧바로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제작하고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도 매력적으로 상품화하는 대중예술의 기민함. 고전예술은 이처럼 발 빠르게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대중문화의 적응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


상품의 질이 향상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용자가 필요한 것처럼, 예술은 결국 이를 즐기는 향유층이 확대되어야 발전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전예술을 누리고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예술가들은 작품이 제작되는 전후 과정을 대중에게 조금 더 개방할 필요가 있다.






 ‘작품’이라는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치밀함과 그에 담긴 고뇌와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관객들이 알 수 있다면 그들이 느끼는 감동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러한 쌍방향적 소통에 대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고전예술은 결국 구시대의 유물로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극적인 감칠맛은 다소 덜할지라도 어머니의 정성으로 오랫동안 푹 끓인 곰국처럼, 시간과 진심이 녹아든 음식은 먹는 사람의 마음에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고전 예술은 오랜 시간에 걸쳐 어쩌면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인간 삶의 단면을 수 십, 수 백 시간의 무대와 세월로 고아낸, 영양과 인간미 넘치는 진한 육수와도 같다. 그 따뜻함을 만끽하고 누릴 수 있는 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꿈꿔본다.




● 바리톤 정 경의 [예술상인] 제 9 화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가와 상인, 그들이 비롯하는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